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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82화 (82/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2화 - >

“뭐, 그건 됐고. 너 나랑 일 하나 같이 하자.”

“일······말입니까?”

“그래. 일.”

일을 같이 하자고? 나와? 그녀가? 왜?

전혀 예상치 못한 한 마디에 몸이 절로 굳는다. 도대체 어떤 규모의 일을 생각하고 있기에 그녀씩이나 되는 사람, 아니 드래곤이 나에게 일을 같이 하자고 하는 걸까.

그녀로 말할 것 같으면 전설 속에서나 등장하는 드래곤이었다. 어지간한 기사라면 상대할 수 있는 아종도 아니고, 고작해야 나 하나에게 꺾어버린 얼간이도 아니었다. 단신으로 왕국을 멸망시킬 수도 있는 존재에게서 나온 말인 만큼 보통 일은 아닐 텐데.

그러나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었던 만큼 내용 또한 나의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나있던 건 마찬가지였다.

“너, 나에게서 용언 좀 배워야겠다.”

“······예?”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가 제대로 들은 게 맞나싶을 정도로 어처구니없는 말이 아닐 수 없었다.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표정을 알아는 본 것인지, 아니면 자신이 한 말이 인간에게는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말인지는 알고 있는 건지, 그도 아니면 너무 급작스러웠다는 것을 알아차린 건지 그래도 한 번 더 이야기를 꺼냈다.

“뭐야, 전에는 멀쩡했는데, 왜 이리 말귀를 못 알아먹어? 용언 좀 배워야겠다고.”

쓸데없는 사족은 넘어가자. 그러니까 내가 이해한 것이 맞다면 인간인 나에게 드래곤의 전유물이라던 용언을 배우라는 건가.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용언을? 다른 건 다 제쳐두더라도 인간인 내가 용언을 배우는 게 가능은 한 건가?

“아, 너무 걱정하지 마. 나는 태어나자마자 적당히 사용할 줄 알았으니까. 평범한 인간이라면 수백 년이 흘러도 무리겠지만 비스무리한 것이나마 자유자재로 사용하고 있는 너니까, 백 년 정도 빡세게 배우면 제법 봐줄만하겠지.”

“배, 백 년. 아니 그보다 제가 왜 용언을 배워야 하는 겁니까?”

시간 개념부터가 터무니없다. 백 년이 지나면 내 나이는 거의 백삼십. 제아무리 마력을 다룸으로서 노화를 늦출 수 있다지만 인간의 수명을 초월할 수는 없는 법. 죽기 일보 직전에 용언이 무슨 소용인가. 용언을 익힌다고 내가 드래곤이 되는 것도 아닌데. 그러나 애초에 그녀에게는 내 반응은 중요하지 않았던 모양이다.

“그래서, 싫다고?”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그녀는 폭군이었다. 밑 사람의 사정 따윈 신경 쓰지 않는 폭군.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을 그녀 마음대로 해왔을 터이니 어련하겠냐만은, 밑 사람인 나는 나대로 사정이 있었으니 그녀가 말하는 대로 끌려 다닐 수는 없었다.

침착(沈着)

어떤 말을 해야 저 폭군을 설득할 수 있을까. 상대는 어떤 급작스러운 돌발 행동을 일으켜도 이상하지 않은 변수 덩어리. 적어도 내가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서는 대화 자체를 내 페이스로 이끌 필요가 있었다. 그러기 위해 차가운 머리는 필요불가결. 각인을 통해 떨리는 심장을 다잡으려 할 때, 그녀가 눈을 반짝이며 외쳤다.

“바로 그거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얼굴을 들이밀고 눈을 반짝이며 외치는 기백이 무시 못 할 수준이다. 저번에는 이 정도 반응까지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그 동안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바로 그거라고. 용언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마법은 아닌 그 어중간한 무언가! 그 아재와는 달리 내 눈에는 보였거든! 가능성이라는 게. 넌 이제부터 하나만 생각하면 돼. 인간으로서 용언을 다루는 것. 그 모습을 보여주면 그 아재도 깜짝 놀라겠지!”

“보여준다니, 그 전에 아재라는 분은 또 누구십니까?”

대화의 맥락을 파악하기가 어렵다. 한 번 입을 열 때마다 모르는 정보가 두셋씩 튀어나오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전체적인 판도는 대충 알겠지만 세부사항이 계속해서 바뀌는데 시간을 두고 지켜보는 것 외에 무슨 방법이 있단 말인가. 조금 더 이야기를 들어볼 필요가 있었다.

“······뭐, 좋아. 내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는 네가 열심히 해줘야 하는 만큼 설명을 들을 자격은 있겠지. 한 번만 설명해줄 테니 잘 들으라고. 어디서부터 설명을 해야 할까.”

“실례가 되지 않으신다면 처음부터 설명 부탁드립니다.”

“처음부터? 어디보자······. 너희 인간들이 알고 있는 마법이란 것이 사실 용언을 너희가 배울 수 있도록 개량한 것이라는 건 알고 있지?”

아무리 처음부터 설명해달라곤 했지만 너무 처음이 아닌가. 그래도 정보가 적은 것보다는 많은 편이 낫다. 게다가 이야기의 화자가 드래곤이 아닌가. 인간으로서는 감히 넘볼 수 없는 시간을 살아온 만큼 인간에게는 중요한 정보가 튀어나올 수도 있었다.

“예. 그런 가설도 있긴 합니다만.”

“가설이 아니라 사실이야. 뭐,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왜 그랬을까?”

“······인간이 용언을 사용할 수 없었기 때문 아닙니까?”

“맞아. 그게 인간이라는 종족의 한계였지. 그 탓에 우리가, 아니지. 벌써 수천 년 전의 일이니 나에게도 전 세대의 이야기니까.

아무튼 꽤나 고민을 많이 하셨다고 해. 피조물로서 살아남기는 해야 하는데, 날카로운 발톱도, 이빨도 없었고 힘도 약하고, 그렇다고 몸놀림이 빠른 것도 아니고. 그 당시 세계의 주역이었던 녀석들에 비하면 머리가 조금 더 똑똑하다는 것밖에는 장점이 없었거든. 고민 끝에 마력을 다루는 방법을 전수해주기로 했지. 동시에 효과적으로 마력을 활용하는 방법까지도. 그게 너희가 다루는 마법의 시초야.”

수천 년 전의 일. 인류의 거대한 첫 걸음이었던 마력의 발견에 이런 뒷이야기가 있었다니, 그 시대의 사람들이 아니고서야 그 진실을 알게 된 것은 내가 최초가 아닐까.

“너희는 너희 나름대로 발전을 해온 것 같다만 결국 아류는 아류란 말이지. 드레이크가 제아무리 강해져봤자 드레이크란 말이야.”

“마법이 아무리 발전해봤자 용언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겁니까?”

“태생이 다르다는 이야기지. 격이 다르고 급이 달라. 뭐, 언젠가는 비슷한 수준에까지 올라올 수도 있겠지. 아류라고 하여 원류를 이기지 못하라는 법은 없으니까. 다만 마법은 그런 가능성을 가지고 있더라도 인간이라는 종족에게 마법의 가능성을 한 차원 끌어올릴 수 있는 역량이 있을까?”

무척이나 흥미로운 이야기다. 그녀의 말처럼 일곱 개의 서클을 만든 마법사도 알려지지 않은 이들을 포함해도 한 손을 넘기지 않을 텐데, 그 이상으로 나아가야 한다니. 회의적인 이야기일 수밖에. 그러나 그녀가 말하고 싶은 건 마법의 가능성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었다.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지가 더 중요했다.

“그런데 네 녀석이 떡하니 나타난 거지.”

“각인······말입니까?”

“넌 그걸 각인이라고 부르나보지? 아무튼 네 수준은 인간들 사이에서는 꽤나 대단한 모양이다만 우리들이 보기에는 거기서 거기야.

그런데 그 고만고만한 녀석들 중에 어설프게나마 우리들을 따라하는 녀석이 보였단 말이지. 이건 너희에게 마력을 전수하고 수천 년 동안 유례가 없었던 최초의 발견이라고. 그런데 유례없는 대발견을 자랑하려던 자리에서 그 아재가 내 대발견을 아무것도 아니라면서 폄하를 해버렸어. 그러니 내가 열이 받아, 안 받아? 나는 보고나서 깜짝 놀랐는데, 아무것도 아니라고 하면 내가 뭐가 돼?”

“아······. 그러니까 저에게 용언을 배워야 한다고 말씀하신 이유가 그 아재라는 분에게 설욕하기 위해서?”

“그래!”

무슨 반응을 보여야 할까. 적어도 확실한 것이 하나 있다면 그녀는 아주 제멋대로의, 자기 기분대로 해야만 마음이 풀리는 변덕쟁이 폭군이라는 점. 게다가 추가로 불행한 점이 한 가지 더 있다면 나는 그 아재라는 존재와는 다르게 그녀의 변덕에 흔들리지 않아도 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이었다.

“저에게 왜 그런 말씀을 하신 지는 잘 알겠습니다.”

“좋아. 그럼 시간 끌 것 없이 오늘부터 시작하자고. 일단······.”

“하지만 원하시는 대로 따르기에는 어려울 것 같습니다.”

“······뭐? 다시 한 번 말해봐.”

“위대하신 존재께 용언을 배우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바람에 나부끼는 갈대마냥 휘둘리겠다는 말은 아니지만.

쿠오오오-

손발이 저릿저릿하다. 모든 것을 원하는 대로 해왔을 폭군에게 정면으로 반기를 들었으니 그녀가 어떻게 받아들였을지 안 봐도 뻔하다. 그러나 예상 안의 행동이다. 적어도 말을 꺼내자마자 나를 죽이지 않았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러니 입을 열어야지. 숨도 쉬기 어렵고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머릿속이 하얘질 정도지만 어리버리하자고 칼을 뽑은 건 아니니까. 상대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뻔히 보이는데 대책조차 세우지 않았다면 애초에 말을 꺼내면 안 됐지. 물론 대책을 세웠다고 하여 아무런 문제도 없으리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지만.

“제 이야기를 들어주시겠습니까?”

내 착각인가. 그녀의 뒤로 새빨간 홍염이 뿜어져 나오는 것 같다. 그녀의 붉은 머리카락과 무척이나 어울리는 광경이라 할 수 있겠지만 그걸 정면에서 마주하고 있는 나에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뜨거울 뿐이었다.

“재밌네.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그런 말을 했다는 게, 신중하게 말하는 게 좋을 거야. 내 기분이 지금 몹시 좋지 않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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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로 시간입니다. 위대하신 존재께서는 백여 년이라는 시간을 이야기하셨지만 제가 원하시는 수준까지 다다르기까지 얼마의 시간이 걸릴 지는 미지수입니다. 저와 같은 경우도, 인간에게 용언을 가르친다는 것도 처음 있는 일이니까요. 수백 년, 어쩌면 천 년이 넘게 걸릴 지도 모르지요.”

어쩌면 그보다 더 짧을 수도 있지만 그녀의 설득에 필요한 말은 아니니 접어두도록 하자.

“위대하신 존재께 백 년, 천 년의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닐지 모르겠으나 인간인 저에게는 평생에 가까운 시간입니다. 십년, 이십 년도 아니고 백 년이라는 시간은 아무리 위대하신 존재라고는 하나 타인의 욕심을 위해 내려놓기에는 너무 긴 시간입니다.”

그녀는 내 말이 끝날 때까지 잠자코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다행인 일이었다. 만약 그녀가 뭔가 행동을 했다면 기껏 머리를 열심히 굴려가며 떠올린 이유들을 말할 수 없었을 테니까.

“두 번째 이유는 용언을 다뤄야하는 이유가 저와는 전혀 상관없는 이유이기 때문입니다. 제게 세계정복과 같은 거창한 목표가 있는 것도 아니고 현재로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백 년 동안 모든 것을 쏟아 부어 용언을 다룰 수 있게 되면 뭐하겠습니까. 살아있더라도 죽음까지 한 걸음만 남겨두었을 텐데, 세 번째로는······.”

얼마나 입을 놀렸을까. 입가가 건조해질 때까지 말을 하고서야 입을 다물 수 있었다. 그리고 천만다행으로 그 때까지 내 머리와 몸은 분리되지 않은 채, 목이라는 연결을 통해 숨을 내쉬고 있었다.

“이와 같은 이유들로 위대하신 존재의 명은 받들 수가 없습니다.”

다행히, 여전히, 아직까지도 내 머리는 몸과 떨어지지 않았다. 이것이야말로 내 예상이 아직까지는 들어맞고 있다는 무엇보다도 강력한 증거였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2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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