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0화 - >
시그니 지크.
그녀는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외부 활동에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으며 외모를 가꾸는데 몰두하지 않았지만 제국에서도 미녀라는 항목을 이야기 할 때, 한 손에 꼽히는 여성이기도 했다.
외모도, 성격도, 집안까지. 무엇 하나 부족함 없는 그녀가 어째서 서른에 가까워질 때까지 결혼을 하지 않았는지는 심심하면 나오는 이야깃거리이기도 했다. 물론 그 이유를 알고 있는 건 그녀뿐이겠지만. 그런 그녀가 혼인을 기념해 제대로 꾸미고 나오자 아름다움이 차원을 달리했다.
햇빛을 받아 밝게 반짝이는 금발과 보석마냥 푸르게 빛나는 눈, 안 그래도 새하얀 피부는 순백의 드레스와 함께 함부로 건드려서는 안 될 것 같은 성스러움을 연출했다.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 그녀의 주변이 유독 밝게 빛나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내 착각일까. 결혼을 축하해주기 위해 모여든 손님들 또한 그녀의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을 보면 단순한 착각은 아닌 듯했다.
“내가 말했지? 문제가 생기는 건 네가 멍 때릴 때뿐이라고. 단단히 마음먹은 효과는 있나?”
“······조금 더 철저히 준비를 했어야 했나 봅니다.”
“으하핫! 그것 참 다행이로군. 다행이야! 앞으로도 괜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되겠어!”
그 뒤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주례를 맡은 사제가 이것저것 물어보는 질문에 대답하다보니 어느새 무대는 연회장으로 바뀌어 초대받은 손님들로부터 축하의 말을 들으며 한 잔씩 술을 받았고, 손님들의 숫자가 숫자이다보니 취하는 것도 금방이었다.
마력을 끌어올리면 취기를 날려 보내는 건 일도 아니었지만 날이 날이니만큼 마음껏 취하도록 내버려두었다. 그러나 나에게 다가오는 한 무리의 선두에 있는 사람을 확인하고서는 서둘러 마력을 끌어올려야만 했다.
“축하하네. 내가 즉위하자마자 이런 경사가 생겼으니 앞으로도 좋은 일만 가득할 것 같군.”
“친히 걸음을 옮겨주셔서 황공할 따름입니다. 열과 성을 다해 제국을 위해 힘쓰겠습니다.”
“빈 말이라도 듣기 좋은 말이군. 아, 그렇지. 연구는 잘 진행되고 있나? 필요한 것이 있으면 가감 없이 말해도 좋다고 했는데, 그 뒤로 딱히 연락이 없군.”
쫑긋-
황제가 내뱉은 그 말에 황제와 한 마디라도 더 나누기 위해 뒤를 따르던 이들의 귀가 쫑긋 세워지는 것이 보였다.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연구.
그 연구가 어떤 연구인지, 무슨 목적을 가진 연구인지는 그들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황제가 친히 관심을 갖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요청하라고까지 말한 연구라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지. 게다가 사실상 마탑의 2인자라고 할 수 있는 내가 진행 중인 연구라는 사실은 덤이었다.
잘만 하면 황제와 차기 마탑주로 유력한 나까지 동시에 호감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아닌가.
“아직까지는 별 문제 없이 진행 중입니다. 필요한 물품은 나중에 따로 자료를 올리도록 하겠습니다.”
“흠, 기대하겠네.”
나와 황제의 대화는 길지 않았다. 그러나 그 이후로 나를 찾아와 축하를 하는 이들에게서 한 마디 말을 더 들어야만 했다.
연구의 내용에 대해서, 왜 황제가 관심을 가지고 있냐, 필요한 것은 무엇이냐 등등. 물론 그들이 원하는 대답을 들려줄 수는 없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으니까. 아직까지는 수면 위로 떠오를 때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폭풍 같았던 하루가 지나고 시끌벅적했던 저택도 어둠에 물들었다. 장소가 장소이니만큼 손님들도 전부 자택으로 돌아간 상황, 막이 내린 무대의 주인공들이 하루의 마무리를 짓기 위해 같은 곳으로 향했다.
“고생 많았어요.”
“공자, 아니 당신도요.”
어색하다. 진심으로 어색했다. 물론 어제까지, 꽤나 많은 시간 동안 대화를 나누고 사이를 좁혔다. 어떤 주제를 가지고 대화를 나누는 것쯤이야 이제 와서 부담될 것도 없는 사이였지만, 오늘 이후로 나와 그녀를 묶는, 부부라는 관계가 새로 생겼기 때문일까. 별 어렵지도 않을 말 한 마디가 이렇게 어려울 수가 없었다.
“어, 음······.”
“······.”
밤이 깊었다. 남은 일은 하나뿐인데 첫 발을 내딛을 수가 없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별 감흥도 없는 한 걸음일지 몰라도 나에게는 무척이나 어렵고 위대한 한 걸음이었다.
“자, 잘 부탁드립니다.”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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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의 중앙에서 한없이 밑으로 내려가다 보면 단순히 따뜻하고 온화한 날씨가 아닌 사시사철 고온다습한 기후와 함께 끝이 보이지 않는 열대우림을 만날 수 있다. 몬스터의 대지와 함께 인류의 손길이 닿지 않는 유이한 지역. 그 곳의 사람들은 그 곳을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미로라는 뜻에서 ‘라베링토’라는 명칭으로 부르곤 했다.
오로지 강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는 그 곳, 약육강식이라는 단 하나의 명제만이 존재하는 그 곳에서는 몬스터도, 맹수도 하다못해 식물들조차 경쟁자를 죽이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그러나 그 곳에도 최상위 포식자는 있기 마련, 라베링토의 포식자가 서식하는 지역을 향해 거대한 그림자가 빠르게 다가오고 있었다.
머리부터 꼬리까지 30m 쯤은 되어 보이는 압도적인 크기, 화염을 떠올리게 하는 붉은 비늘과 쫙 뻗은 날개까지. 누구나가 넋을 잃고 쳐다볼 그 존재의 이름은 세레나. 레닐을 만난 이후 모습을 감췄던 그녀가 라베링토에 나타난 이유는 간단했다.
이 곳은 그녀의 일족 중 가장 많은 숫자가 거주하는 곳이었으니까. 동시에 그녀가 만나고자 하는 이도 이 곳에 있었으므로.
펄럭-
그녀가 땅에 내려앉기 무섭게 거대한 몸체는 사라지고 2m에 약간 부족한 사람의 몸이 나타났다. 외형에 신경 쓰지는 않았지만 만나려는 이가 존재하는 장소의 크기가 크기이니만큼 적당한 크기로 줄일 필요가 있었다.
벌컥-
“아저씨!”
열대우림 한복판에 위치한 나무로 지어진 집. 사람의 발길이 닿지 않는 곳에 집이라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이 집이야말로 라베링토의 포식자가 머무는 곳이었다.
“없나? 나이도 먹을 만큼 먹었으면서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건지, 어딜 간 거야?”
딱-
“여기 있다. 이 년아.”
그녀가 투덜거리기 무섭게 열린 문을 통해 작은 돌이 그녀의 뒤통수를 두들겼다. 어지간한 사람이었다면 그대로 머리가 터지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막대한 위력이 실린 돌이었지만 그녀에게는 뭔가가 날아왔다는 것을 느낄 수 있는 정도일 뿐이었다.
“아저씨!”
“네가 여긴 왜 온 거냐? 팔 한 짝으로는 부족했냐? 보아하니 치료는 성공적으로 한 것 같은데 다른 한 쪽도 날려줘?”
“팔 한 쪽 날렸으면 그 때 일은 잊어줘야지. 속 좁게 시리.”
뒤이어 들어온, 집주인으로 추정되는 금발의 남성은 매우 기분 나쁘다는 듯 얼굴을 구기며 주인 된 입장으로서 손놈을 맞이했다.
“이거 먹고 썩 꺼져라. 네 년 얼굴을 보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치미니까.”
“알싸하네. 약간 혀에 감각이 없어지는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보는 맛인데?”
“그래서 네 년이 여기까지 무슨 일이냐, 그냥이라고 말하지는 마라. 그 때는 동족의 숫자가 하나 줄어드는 비극이 벌어질 테니까.”
세레나와 남성은 그다지 사이가 좋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녀가 눈앞의 동족을 찾아온 이유는, 다른 동족들이 있음에도 굳이 이 곳으로 온 이유는 그가 그녀의 궁금증을 가장 정확하게 해소해줄 수 있는 인물이었기 때문이었다.
“이것 좀 봐 바.”
레닐에게서 강탈해온 - 세레나는 빌려왔다고 생각하겠지만 - 발톱이 다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명백히 이 물건이 세레나의 용건이었기에 그도 주의 깊게 살펴보았지만 이내 던지듯 그녀에게 돌려주었다.
“뭐냐, 이 쓰레기는? 네가 만든 거냐?”
“쓰레기라니!”
“그럼 이걸 쓰레기라고 안 부르고 뭐라고 부르냐? 실패작? 장난감? 자랑하려고 가져온 건 아닐 테고, 아니지. 네 수준에서는 정말로 자랑하려고 가져온 것일지도 모르지.”
굳이 평가를 내리자면 신선했다? 나쁜 의미로의 신선함이었지만. 확실히 방식은 새로웠지만 구태여 이런 방식을 취할 필요가 없었다. 위력도, 효율도, 수준까지 처참할 뿐, 잘 만들어진 검이 버젓이 있는데 칼날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손잡이로 적을 때리고 있는 격이었다. 그리 하지 말라는 법은 없었지만 그리 할 필요 또한 없는 것이 사실이었으니까.
그러나 처참하기 짝이 없는 평가에도 불구하고 세레나는 조금도 기가 죽지 않았다. 애초에 이 정도로 기가 죽을 성격이 아니기도 하거니와 그 평가를 뒤집을 수 있는 비밀을 그녀는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거 내가 만든 거 아닌데.”
“아니라고? 너를 제외하면 이런 쓰레기를 만들 녀석이 우리 동족 중에 있다고 보긴 힘든데.”
“누가 만들었는지 들으면 아저씨도 깜짝 놀랄걸?”
깜짝 놀라기야 하겠지. 안 좋은 의미로. 그러나 뒤이은 세레나의 말은 단순히 허언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건 인간이 만든 거거든.”
“인간이?”
그건 확실히 조금 놀랍다. 그가 혹평하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기준을 그와 같은 동족들로 잡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주체가 인간이라면 이야기는 달랐다. 어설프게나마 용언을 흉내라도 낸 것에 칭찬을 해야지, 수준이 떨어진다고 혹평할 수는 없었다. 걸음마를 갓 배운 아기에게 다들 잘했다고 하지, 왜 뛰지 못하냐면서 혼내지는 않잖은가. 그러나 그는 곧 짜게 식은 눈빛으로 세레나를 바라봤다.
“그게 뭐 어쨌다는 거냐.”
“아, 아니! 왜 반응이 그래? 인간이 용언을 다뤘어! 대단하지 않아?”
“용언은 무슨, 용언 비스무리한 무언가지. 게다가 용언을 다루는 게 뭐가 놀랍다고, 삼계를 통틀면 우리들 말고도 용언을 다룰 수 있는 이들은 꽤나 있어.”
“아니, 그건 이야기가 다르지. 인간이라고?”
“인간인 게 뭐 어때서? 제대로 된 용언을 다루는 거라면 모를까, 숫자도 숫자거니와 역사도 꽤나 오래 되었으니 이레귤러 하나쯤은 나와도 이상할 건 없지. 그래봤자 백 년쯤 살다 죽을 텐데, 아무튼 용건은 그게 끝이냐? 그럼······썩 꺼져!”
축객령은 단순히 말로 끝나지 않았다. 순식간에 집을 벗어나 열대우림 어딘가로 떨어지게 된 그녀의 앞에는 그녀가 자신 있게 꺼내든, 그러나 혹평만을 들으며 너부러진 [발톱]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하하, 하하······.”
애초의 목적은 동족들 중에서도 가장 똑똑하다고 알려진 그를 통해 어떻게 인간이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를 알아보려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 목적은 파도에 쓸려나가는 모래성마냥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별로 놀랍지 않다 이거지?”
삿된 말로 개무시를 당한 그녀의 머릿속을 채운 생각은 단 하나, 어떻게 해서라도 역으로 그에게 한 방 먹여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용언 비스무리한 거라 별로 놀랍지도 않다고? ······그러면 인간이 제대로 된 용언을 사용해도 아무렇지 않을 수 있나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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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비적- 휘비적-
“누가 내 얘기하나?”
그 시각, 레닐은 가려운 귀를 긁으며 충실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러나 한 번도 가본 적도, 가볼 일도 없었던 곳에서 그의 인생에 큰 영향을 끼칠 일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80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