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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79화 (79/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9화 - >

“형님! 형님! 잘못했습니다! 마음 속 깊이 뉘우치고 있습니다! 한 번만 용서해주십시오! 목숨만 살려주신다면 산 속에 들어가 조용히 살아가겠습니다! 형님!”

“시끄럽다.”

불과 일 년 전까지만 하더라도 황족으로서 만인의 부러움을 샀을 누군가의 머리가 목과 분리되어 하늘을 날았다. 단면이 드러난 목으로부터 붉은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고 누군가는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환호성을 지르며 흔치않은 볼거리를 즐겼다.

“자비는 없다. 반역자들의 삼족을 멸하고 구족을 노예로 삼아라.”

황제는 손속에 자비를 두지 않았다. 사실 자비를 바라기에는 너무 먼 곳까지 와버렸다. 황제는 이미 대관식을 치를 때, 백기항복을 한다면 죄를 묻지 않겠다고 선포한 바 있었다. 실제로 그 때,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순순히 대관식에 참석한 이들은 오늘까지도 멀쩡히 살아있었다.

물론 말 그대로 목숨만 붙어있는 꼴이었지만. 그래도 조용히만 살아간다면 어지간해서는 부족함 없이 살아갈 수 있을 테니 꽁꽁 묶인 채 자신의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과는 전혀 다른 세상이라고 불러도 무방했다.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저들에게 자비를 베푼다면 그 광경을 본 남은 이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오오, 역시 황제 폐하다우신 너그러움이다. 저 자비로움을 찬양하라!]

라고 생각할까? 아니, 인간은 그리 현명한 생물이 못 된다.

[나도 한 번 해볼까? 어차피 실패해도 반성하는 척 하면 목숨은 부지할 수 있을 텐데, 그 때는 숨겨둔 제물로 살아가면 되잖아?]

이렇게 생각하겠지. 그리고 그런 이들이 늘어난다는 건 뿌리가 튼튼할 때라면 모를까, 지금처럼 간신히 흔들림을 멈추고 안정을 찾아가려는 시점에서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읍읍!”

“꺄아악!”

“제, 제발 목숨만은, 제발!”

“억울합니다! 얼떨결에 휩쓸렸을 뿐, 황제 폐하께 거역하려는 의도는 절대 없었습니다!”

이렇게 잔혹한 칼날의 심판이 떨어지는 이들이 있다면.

“크흐흐. 이걸로 적어도 백작위는······.”

“이것도 내꺼, 저것도 내꺼!”

일찌감치 신임 황제의 편에 서 그 동안의 투자를 돌려받을 일만 남은 이들도 있었다. 주로 남부와 동부의 귀족들, 자금을 댄 상인들까지. 북부와 서부의 주인들이 형장이 이슬로 사라진 지금 그들의 욕망을 채워줄 땅과 제물은 충분했다.

“쯧쯧.”

“제물에 눈이 멀어서······.”

물론 이 광경을 못마땅하게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욕심이 과했기에, 그 욕망으로 인한 부담은 고스란히 주인을 잃은 영지의 백성들에게 주어질 것이 분명했으니까.

그러나 그들은 침묵했다. 소수일 뿐만 아니라 그들이 다른 죄도 아닌 대역죄를 저지른 죄인이기에. 대세가 넘어간 지금 굳이 척을 져 가해자의 편에 설 어리석은 사람은 없었다. 그 정도로 어리석었다면 애초에 지켜보는 입장에 서있을 수 없었을 테니까.

“이것으로 논공행상을 마치겠다.”

“황제 폐하의 은덕에 황공하며 제국의 번영과 안녕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수많은 이들이 자신이 투자한 것에 대한 배당금을 받아들였다. 그 중에는 충분히 만족하는 이들도, 적잖이 실망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확실한 점 하나는 모두에게 적잖이 많은 재물과 땅이 돌아갔다는 점이다. 조금 많이 떨어진 이들에게도 콩고물이 떨어질 정도로.

“이걸 좋아해야 할지, 싫어해야 할지.”

“글쎄, 결국은 이득이 아닐까.”

나의 결혼 문제로 인해 수도에 남아있던 형 또한 콩고물을 받아들었지만 떨떠름할 수밖에 없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으니까. 이유 없는 호의만큼 불편한 것도 없었다. 또한 주변의 시샘어린 시선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고.

이번 정변에서 나와 드라그닐 영지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찌감치 3황자를 지지했던 것도 아니며 정변에 힘을 보탠 것도 아니고 토벌군을 보낼 때도 밖으로 밀려있었다. 그러나 논공행상에서 황제는 손수 나와 영지에 상을 내렸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는 이는 없었으나 그 누구도 노골적인 질시를 대놓고 표현하지는 못했다.

황제의 총애를 받고 있다는 암묵적인 분위기 덕도 있었지만 나와 시그니 간의 혼약이 사실상 확정이라는 소문이 떠돌아다니는 덕이 컸다.

지크 영지.

가장 큰 연줄이었던 다리우스 3세가 죽으며 끈 떨어진 연 신세가 되긴 했지만 연이 하늘을 뒤덮을 만큼 크다면 이야기가 달랐다. 지크 후작은 여전히 마스터로서의 위용을 뽐내고 있었으며 수만 병력의 지휘권을 손에 쥐고 있었고, 지크 영지 또한 제국 동부에서 손에 꼽히는 규모의 대영지였다.

그런 가문의 여식과 새롭게 떠오른 신성의 결혼식. 서로에게 부족했던 조각이 맞물리는 결합인 만큼 시너지가 날 수밖에 없었으니, 다른 이들도 눈치를 보며 섣불리 시기를 표현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는 사이 많은 이들의 시선이 집중된 무대의 막이 오르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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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드디어 짝을 찾다니, 이 어미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그간 무탈하셨습니까! 형님.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고맙네. 매부.”

“드디어 오빠도 가네. 내가 먼저 가게 돼서 얼마나 마음이 불편했는지 모르지?”

“하하. 미안하다.”

“삼촌! 축하해!”

“정말 축하드려요. 도련님.”

“감사합니다. 형수님.”

오랜만에 모든 가족들이 수도로 올라왔다. 저번과 다른 점이 있다면 인원이 두 명 늘어났다는 것. 매부와 조카가 그 주인공이었다.

결혼식은 수도의 지크 가문의 저택에서 열기로 했다. 나야 지크 영지에서 하건, 수도에서 하건, 고향에서 하건 상관이 없었지만 이번 결혼은 단순히 두 남녀의 결합이 아닌 두 가문의 정치적인 결합이 주 목적인 정략이었기에, 많은 이들에게 선전이라도 하듯 규모가 클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많은 귀족들이 상주하는 수도보다 적합한 곳은 있을 수가 없었다.

그 외에도 자잘한 이유들은 여럿 존재했다. 수도를 제외하면 지크 영지와 드라그닐 영지 외에는 선택지가 없는데 각각 동쪽과 남서쪽에 위치해 거리가 떨어져 있다는 점. 마찬가지로 손님들 또한 먼 길을 와야 한다는 점 등등.

어쨌든 결혼식이 시작되려는 지금, 당사자인 나로서는 굳이 신경쓰지 않아도 되는 문제이긴 했다.

“결혼,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형님.”

“윌랜드!”

“약소하지만 제 선물입니다.”

“고맙다. 그리고 네 결혼식 때 가지 못한 건 정말 미안하게 됐다. 하필 그 때, 북쪽에 가있었던 탓에.”

“아직까지 마음에 두고 계셨습니까? 그러지 않으셔도 됩니다. 떠나기 전에 알려드리지 못한 제 잘못입니다.”

마탑에서의 결투 이후, 오랫동안 인연을 이어오고 있는 윌랜드. 이번 정변을 통해 확실히 후계자로서의 위치를 굳혔다고 들었다. 윌랜드 백작이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했을 때, 3황자를 지지해야 한다며 미래를 건 설득을 성공시킨 대가였다.

안타깝게도 그의 결혼식 때는 한창 테라 방벽 북쪽을 헤매고 있었기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오늘, 이렇게 찾아와 주었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새 신랑 얼굴이 훤하네. 긴장한 것 같지도 않고, 잠은 잘 잔 모양이야?”

윌랜드와 대화를 이어가고 있을 때, 익숙한 얼굴의 사내가 찾아왔다. 결국 참석하지 못한 지크 후작을 대신하여 저택의 주인 역할을 맡고 있는 시그루드가 바쁜 와중에 짬을 내어 찾아온 것이다.

“긴장할 게 뭐 있겠습니까. 이보다 더한 일도 많이 겪었습니다.”

“딱딱하기는.”

거짓말이다. 사실 긴장으로 잠이 잘 오지 않아 각인의 힘을 살짝 빌려야만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전생과 현생, 오십 년을 넘어 육십 년에 가까운 세월 속에서도 최초로 겪는 경험이었으니까. 비슷하게나마 경험이 있었던 지금까지와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별 문제는 없습니까?”

“신랑이 신부의 아름다운 외모를 보고 멍 때리는 일만 아니라면 문제는 없겠지. 그러지 않을 준비는 됐나?”

“이런, 형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실 정도이니 마음을 단단히 먹어야겠습니다.”

평화로운 결혼식다운 화기애애한 분위기. 그러나 갑작스레 바깥에서부터 시작된 소란스러움은 점점 규모를 키우더니 내부에까지 들릴 정도가 되었다. 황급히 바깥으로 나갔을 때, 쌍두독수리가 새겨진, 바람에 나부끼는 붉은 깃발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저 깃발은 단 한 사람을 위한, 한 사람만이 내걸 수 있는 깃발이었기에.

털썩-

“폐하!”

“폐하!”

“모두 일어나라. 새로운 출발을 축하해주고 싶었을 뿐인데 내가 괜한 걸음 한 것이 아닌가 모르겠군.”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안으로 드시지요.”

시그루드를 비롯한 고위 귀족들이 서둘러 황제를 모셔 저택 내부로 향했다. 그러나 그 이후로도 도통 소란은 잠재워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모습을 보인 시간은 짧았지만 그 누구보다도 인상적인 등장이었다.

‘무슨 생각이야?’

상식적으로 황제가 이 결혼식에 찾아올 이유는 없었다. 사람을 보내어 말을 전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이 무대의 주인공들과 특별한 인연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며 지크 영지와의 인연은 전 황제와의 인연이지, 현 황제와의 인연이 아니지 않은가.

그럼에도 황제는 친히 걸음을 옮겨 모습을 드러냈다. 이 행동에서 의도를 유추해보자면 자신의 편을 만들려는 것이 아닐까.

새로운 황제, 다리우스 4세는 결국 귀족들의 힘으로 황위에 오른 황제다. 정상적인 방법을 통해 황위를 물려받은 것이 아닌 만큼 비교적 힘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그를 따르던 귀족들은 그 어느 때보다 강한 힘을 보유한 상황.

황위에 오르기 전에는 든든하게 받쳐주는 배경이었겠지만 황위에 오른 지금, 그 누구보다도 위험한 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들을 견제하고 새롭게 자신을 지지할 세력을 모으기 위함이라면 손수 이 곳까지 온 이유로 충분하리라.

‘정치란 건 할 게 못 돼.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서로 죽고 못 살 사이였던 이들이 순식간에 등을 돌려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조심해야 한다니.’

그러는 사이에도 시간은 계속 흘러갔다. 황제의 등장으로 조금 혼란스러워지기는 했으나 오히려 그 일 때문에 식이 정상대로 열리지 못한다면 그게 더 큰 문제였다.

다행히 애당초 계획했던 대로 결혼식은 순조롭게 시작되었고 나는 그 때까지도 일말의 고민을 머릿속에 안고 있었다. 그러나 잠시 후 등장한 무대의 또 다른 주인공을 마주했을 때, 지금까지의 고민들이 머리로부터 안녕을 외치기 시작했다.

샤라라라라-

잔잔한 음악소리가 식장에 연주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재생되고 있는 것 같았다. 시그루드가 말했던, 내가 멍 때리지만 않으면 문제없다는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제는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번의 삶을 통틀어 최초의, 그리고 최후일 결혼식의 막이 열리고 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9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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