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8화 - >
“너, 정체가 뭐야?”
내 정체가 뭐냐고? 왜 그런 질문을 하는 걸까.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은 나도 알고 그녀도 아는 사실일 텐데. 갑자기 이런 질문을 할 이유라면 하나뿐이다.
[발톱]
강탈하다시피 뺏어간, 한동안 주의 깊게 들여다보며 원인모를 감탄사를 내뱉었던 원인. 정말 잠깐의 시간 만에 그녀의 시선을 바꿀만한 이유는 그것밖에는 없었다.
“이게 어디에 쓰는 물건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한 아티팩트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확실하지. 왜냐, 이 물건에 깃든 힘은 단순한 마법 따위가 아니거든. 네가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말이야.”
알고 있다. 왜 모르겠는가. 그녀야말로 알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 단순하지 않은 물건의 제작자가 바로 나인 것을. 덕분에 무척이나 위태로운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다른 의미로 가슴이 두근두근 거리고 있었다.
각인!
십 년 전, 테라 방벽으로 끌려가던 어느 날 밤에 꿈에 불현 듯 나타나 알 수 없는 기억을 안겨준, 그 뒤로 나에게 수많은 도움을 주었던 정체불명의 기술.
제국 제일의 마법사라는 스승님이 몇 년을 연구하고서도 성과가 없었던, 더불어 사용자인 나조차도 원리를 알지 못한 채 경험에 의지해 어찌저찌 사용하는 것이 전부인 지금, 그 비밀이 지금 이 순간 밝혀질지도 몰랐다. 그리고 밝혀졌다.
“이건 용언의 힘이야. 용언이라 부르기가 애매할 정도로 열화된 것 같기는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인간 따위가 다룰 수 있는 기술이 아닐 텐데.”
용언이라고?
들어본 적은 꽤나 많다. 과거에도 현재에도. 과거에는 각종 판타지 소설에서, 현재에는 각종 연구 자료 등에서. 그러나 둘이 설명하는 용언에 대한 정보는 비슷했다.
드래곤들만의 전유물, 마법의 근원이 되는 기술이자 다른 차원에 있는 무언가라고. 언어가 가지는 의미 자체를 현실화시키는 능력이라고. 그런데 각인이 용언의 열화판이라니.
“너, 이거 어디서 주웠냐? 아니, 어떤 놈이 이런 이상한 걸 만들어가지고 흘리고 다니는 거야?”
“제가 만들었습니다만.”
“뭐라고?”
“어디서 주운 게 아닙니다. 제가 손수 제작한 무기입니다.”
“무기? 이걸? 네가?”
내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나와 [발톱]을 번갈아보며 무언가를 고민하는 듯한 모습의 그녀.
“써 봐.”
“예?”
“써보라고.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으니까.”
그토록 놀라운 일일까.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의 수명을 자랑하며 놀라운 광경들도 많이 봐왔을 텐데. 그녀는 꽤나 흥미롭다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약간이나마 긴장이 풀린 나는 평소처럼 각인을 발동시켰다.
“······정말이잖아?”
“위대한 존재 앞에서 거짓말을 할 만큼 대담하진 않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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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머리의 그녀, 세레나라는 이름의 드래곤은 현 상황에 꽤나 놀라고 있었다. 티는 내고 있지 않았지만 - 그러나 레닐은 진작 눈치를 챘다. 그녀 또한 누군가의 눈치를 볼 필요가 없는 강자답게 자신의 속마음을 숨기는 것에는 그리 능숙하지 않았기에 - 눈앞의 인간이 보여준 광경은 그녀로서도 본 적이 없는 광경이었으므로.
‘확실해.’
그녀의 눈이, 감각이 잘못된 것이 아니라면 레닐이 보여준 기예는 용언이 확실했다. 물론 그녀가 활용할 수 있는 용언에 비해 조약하고 열화된, 마법이라고 하기에는 격이 다르고 용언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함이 많은, 용언에 가까운 무언가였지만 바탕이 되는 원리는 같았다.
‘제아무리 열화되었다지만 어떻게 인간 따위가······.’
열화되었다고는 하나 애초에 차원이 달랐다. 도자기가 열화된다면 토기쯤 되겠지. 그러나 개미가 토기의 제작 방법을 이해하고 만들어낼 수 있을까? 정답은 아니요다. 마찬가지로 인간 또한 용언의 원리를 이해할 수는 없었다. 그게 그녀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상식이었다. 그리고 오늘 그 상식에 반하는 존재가 나타났다.
“끝이야? 더 보여줄 게 있으면 계속 해봐.”
그리고 그건 꽤나 흥미로운 일이었다. 수백, 수천 년을 살아가다보면 제아무리 놀라운 일도 무덤덤해지기 마련이니까.
시간이 지날수록 놀라운 일들의 숫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었으니 이런 예상하지 못한 광경은 그녀 입장에서 두 손 벌려 환영할 만한 일일 수밖에 없었다. 지금 이 순간, 무시해왔던 인간 하나가 미약하게나마 자신들의 영역에 발을 들인 것이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레닐은 그런 세레나의 요구를 받아들여 최선을 다했다. 적대적이지 않은 분위기를 읽었기에. 경지가 오르면 오를수록 각인의 활용도는 높아져갔지만 동시에 그 근원에 대한 연구는 지지부진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그 근원을 파악했을 뿐만 아니라 뭔가를 더 얻어낼 수 있을 지도 몰랐다. 물론 어째서 본인에게 그런 능력이 주어졌는지는 미지수였지만, 그건 굳이 따지자면 2순위였으니까.
“신기하네. 이런 식으로 사용하는 녀석이 있었나? 인간.”
“예.”
“그거, 누가 가르쳐 준거야?”
순간 레닐의 말문이 턱 막혔다. 여기서 뭐라고 대답해야 눈앞의 드래곤을 납득시킬 수 있을까. 꿈에서 경험을 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에서 사용하고 있다고? 눈앞의 존재가 거짓말을 감지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면 모를까, 그 누가 이런 말을 쉬이 믿을까. 아니, 그런 능력이 있어도 한 번쯤은 의심해보지 않을까?
그러나 사실대로 말하지 않을 도리도 없었다. 허무맹랑한 소리로 들리겠지만 그게 사실이었으니까.
“꿈? 그걸 믿으라고?”
“하지만 사실입니다.”
아쉽게도 세레나에게는 거짓과 참을 구분하는 능력은 없었다. 그러나 괜히 그 오랜 세월을 살아온 것이 아니다. 또한 드래곤으로서 기본적으로 가지는 감각 또한 날카로웠다. 그 감각이 지금까지의 말에 거짓은 없다고 말하고 있었다.
“끙. 그러면 선조 중에 갑자기 실종된 사람은? 특별한 능력을 가졌던 사람이나.”
드래곤들 중에는 가끔 긴 수명으로 인한 따분함을 지우고자 인간으로 변신해 유희를 떠나는 경우도 있었다. 그 과정에서 레닐에게 드래곤의 피가 섞였다면? 그 피가 이런 식으로 발현된 것이라면?
절래절래-
“없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드라그닐 가문이 제국 변두리의 작은 귀족 가문으로 남아있지도 않았겠지. 내세우고 있는 가능성이 하나씩 막힘에 따라 세레나의 골치도 점점 아파지고 있었다.
‘이걸 어쩐다.’
오랜만에 발견한 재미있는 녀석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인간인 주제에 비록 열화 되었다지만 용언을 자유자재로 다루다니, 충분히 인간이라는 종족이 가진 한계를 뛰어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대로 놓치기에는 아까운데.’
오랜만에 발견한 재밌는 녀석이다. 물론 그녀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되건 간에 연연할 필요가 없었지만 ‘어떻게 인간이 용언을 사용하고 있는가.’ 라는 주제는 심심한 그녀에게 잠시나마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유희거리가 될 수 있었으니까.
평소라면 바로 납치를 해서 그녀의 레어로 데려갔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가 원하는 대로 각종 실험을 진행했을 것이다. 레닐의 생사에 상관없이, 물론 그녀의 지식욕을 모두 채우기 전까지는 목숨만큼은 살려뒀겠지만.
그러나 원인을 모르는 이상, 섣불리 손을 대기도 뭣했다. 섣불리 납치했다가 실험을 시작하려 할 때, 능력을 잃어버리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닌가. 영원히 난제로 남아 그녀를 괴롭게 하겠지.
“너, 일단 이건 내가 가져간다. 그리고 여기 가만히 있어. 내가 다시 돌아왔을 때, 여기 없으면 이 도시가 멸망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인간들도 다 죽는 거야. 알겠어?”
눈 깜짝할 사이에 [발톱]을 챙기더니 레닐의 대답은 신경도 듣지도 않은 채, 방을 떠나가는 세레나. 남은 사람은 어처구니없는 명령을 받은 레닐 뿐이었다.
#
“하아. 하아.”
드래곤이 사라진 것을 확신한 뒤,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리에 힘이 쫙 풀리는 바람에 도저히 서 있을 수가 없었기에. 동시에 바람같이 사라진 그녀가 마지막에 남긴 말이 떠올랐다.
‘여기 있는 모든 이들을 죽여 버리겠다고?’
오만한, 광오한 말이다. 그 누가 제국의 수도에서 그런 말을 내뱉을 수 있었을까. 그러나 허풍처럼 넘길 수 없는 말이기도 했다. 그녀에게는 정말로 그리할 수 있는 힘이 있었으니까. 단순히 힘의 편린만으로도 그 정도일진데 본격적으로 힘을 내보이면 어떤 광경이 펼쳐질지 상상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대항할 수 있을까?’
제국의 모든 전력을 모으면 대항할 수 있을까. 잠깐의 고민이 이어졌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나와 스승님 간에 큰 차이가 있다고 보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힘을 모아봤자 나와 비슷한 경지 네 명과 그에 미치지 못하는 이들일 텐데, 단지 존재감만으로도 움직임에 제한이 있을 정도였으니 굳이 대보지 않아도 결과는 알 수 있었다.
“······너무하잖아.”
물론 당장 납치를 해서 실험체로 쓰지 않은 것이 어디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녀가 이끄는 대로 이끌려 다닐 수밖에 없는 상황이 꽤나 짜증났다. 동시에 아무렇지도 않게 수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가겠다고 선포하는 것까지도.
몬스터의 대지에서 마주했던 녀석과는 달리 말이 통했으나 다른 의미로 완벽하게 말이 통하지 않았다.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인간이 아니라는 것을, 종족의 차이를 이토록 뼈저리게 느낄 줄이야.
“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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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의 장담처럼 그 누구도 그녀가 나를 찾아왔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심지어 나와 그리 멀리 떨어져있지 않았던 스승님조차도.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다시 한 번 의지를 불태우게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타이탄.
단순한 타이탄으로는 어림도 없으리라. 그러나 드래곤하트를 활용할 수 있다면, 스스로의 경지 또한 한 발자국 더 나아갈 수 있다면, 얼마의 시일이 걸릴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그녀에게 대항할 수 있는 힘을 얻을 수 있지 않을까? 최소한 지금처럼 무기력하게 이끌려 다니는 것만큼은 피할 수 있지 않을까?
아직 갈 길이 멀었으나 중간 목표로 삼을만한 이정표가 생긴듯한 기분이었다.
“자자, 그러면 날짜는 언제로 잡을까?”
“벌써 말입니까?”
“벌써는 무슨, 너희 둘 나이를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맺어지는 게 좋지. 게다가 둘이 좋다는데 굳이 미룰 이유가 있나?”
뒷사정이 그러했으나 이 사실을 알 리 없는 시그루드는 나와 시그니의 결혼식을 꽤나 서둘렀다. 보고 있는 내가 당황스러울 정도로.
“후작 각하께는 연락이 되신 겁니까?”
“각하라니, 이제는 장인어른이라고 하면 될 것을.”
벌써 지크 후작에게 연락이 닿고 답신이 오기에는 시간이 맞지 않았다.
“연락을 한다고 해도······. 오실 수 있으실지 모르겠군. 돌아가실 때쯤이면 겨울이 찾아왔을 텐데, 특히나 그 곳은 겨울이 위험한 때가 아닌가.”
“그래도 연락은 드려야지 않겠습니까. 사정이 있으시더라도 그 결정은 각하께서 내리시는 것이 맞는 일입니다.”
“······매부 말이 맞아. 내가 마음이 급해 해서는 안 될 일을 할 뻔했군.”
약간의 진통이 존재하기는 했으나 과정 자체에는 별 문제 없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날이 적당한 어느 날, 황제의 명을 받아 끝까지 저항하는 반역자들을 처단하기 위해 수도를 떠났던 병력들이 보무도 당당하게 수도로 복귀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는 잠시 멈춰있었던 피의 숙청이 시작된다는 뜻과도 같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8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