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6화 - >
바쁜 나날을 보냈다. 타이탄 프로젝트는 프로젝트대로 진행하며 몸은 몸대로 돌봐야 했으니까. 반쪽짜리가 되지 않기 위해서는 해야만 하는 일이었으며 각인에 대한 연구도 다시금 시작해야만 했다. 내 경지가 오를 때마다 새로운 영역을 보여준 각인이었으며 조금만 더 파고들면 새로운 뭔가를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렇게 잠도 아껴야할 만큼 바쁜 나날을 보내던 와중에 분명 배웅했던 형이 예상치 못한 인물과 함께 나를 찾아왔다.
“돌아간 거 아니었어? 연락도 없이, 아니 그보다 형이 왜 저 분이랑 같이 나를 찾아왔어?”
“잘 지낸 것 같아 다행이군. 소식은 멀리서도 듣고 있었네. 그래도 직접 얼굴을 보니 소식보다도 더 잘 지내고 있는 것 같군 그래.”
“원래는 영지로 돌아가려고 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제안을 하시는 바람에. 네 일이기도 하고, 이대로 뒀다가는 어머님께서 답답해하실 것이 눈에 훤해서 소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말머리를 돌려서 왔다.”
“내 일?”
“그래. 네 결혼이 네 일이 아니면 누구 일이겠어?”
결혼? 일언반구도 없이 갑자기 찾아와서는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인가. 아니 그보다도 이런 주제를 들고 왔으면서 지크 가문의 신임 가주, 시그루드는 왜 데리고 왔단 말인가?
“왜 이렇게 놀라해? 만나는 사람이라도 있는 것처럼. 내가 알기로는 방에 처박혀서 연구만 하느라 누굴 만날 시간이 없다고 들었는데?”
“아니, 그 뭐, 틀린 말은 아닌데.”
“그럼 됐네. 뭐가 문제야?”
“처음부터 끝까지 문제지. 이런 문제를 갑자기 들고 오는 게 어디 있어?”
한동안 형과 아옹다옹하던 나는 고개를 돌려 여유로운 표정을 지은 채, 나와 형이 벌이는 소란을 지켜보던 시그루드를 바라봤다.
어차피 이 사태의 주범은 형이 아니라 시그루드이리라. 제안을 받았다는 형의 말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형은 지크 영지와는 연이 없었다. 다짜고짜 찾아가 혼인에 관한 이야기를 꺼낼 리가 없다는 뜻. 형과 연이 없는 것은 시그루드도 똑같았지만 그는 나와는 얇게나마 연이 닿아있었으니까. 누군가 먼저 제안을 했다면 분명 시그루드겠지.
“도대체 무슨 생각이십니까? 시그루드 씨.”
“시그루드 씨가 뭔가 씨가, 형님이라 불러보게. 그리고 무슨 생각이냐니, 사돈이 말한 그대로지. 이야기를 듣자하니 만나는 사람도 없는 것 같은데, 자네도 이제 나이가 있는데 언제까지 자유롭게 살 생각인가? 아니면 내 동생이 마음에 들지 않나? 그럴 리는 없을 텐데.”
순순히 목적을 말할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뒤이은 말에는 애써 유지하려던 평정심을 깨트릴 수밖에 없었다.
“아니면 소녀가 아니면 안 되나? 흠, 내가 처남으로 생각했던 이가 그런 사람이라면 별로 좋지 않은데 말이야.”
“누가 소녀 취향입니까!”
후- 하- 후- 하-
침착하자. 동요할 필요가 없다. 그 동안 거쳐 온 위기에 비하면 목숨이 걸려있기를 하나, 가족이 걸려있기를 하나.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라는 명언이 존재하기는 하나 비유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생각해보니 이상한 일은 아니네.’
숨을 고르고 침착하게 생각하니 이상한 일까지는 아니었다. 오히려 시그루드의 입장으로 생각해보면 성사시키면 좋은 제안이었다. 그의 여동생의 허락을 맡았다는 전제 하에.
“시그니 양과는 이야기가 된 겁니까?”
“그 말은 자네는 이 제안이 괜찮다는 소리겠지?”
“······제 질문에나 대답해주시죠.”
연애결혼이 아닌 정략결혼의 목적은 하나뿐이었다. 두 가문을 하나로 묶어 더 큰 권력을 얻는 것. 그런 의미에서 나와 시그니 양의 결혼은 꽤나 괜찮은 정략이 될 수 있었다.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그러나 내려올 일만 남은 가문과 아직은 미약하지만 새롭게 떠오를 준비가 된 신진 가문의 결합. 시그루드의 생각은 위와 같겠지. 형은······아마 이걸 중요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예 염두에 두지 않았다면 영주로서 실격이겠지만 그보다는 내가 좋은 상대를 만나는 것을 더 생각했겠지.
“내 아버지께서는 말씀하셨지. 내 동생이 하고 싶은 일을 하게끔 도와주라고. 이거면 답이 됐을까.”
적어도 싫다고는 하지 않았다는 뜻인가.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적어도 나쁜 일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
‘이런 식으로 생각하게 될 줄은······.’
시그니 지크. 그녀와의 인연은 아주 오래 전, 내가 스콜피온의 시연을 위해 수도로 올라왔을 때로 돌아가야 했다. 약간의 충돌은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와의 인연은 좋은 쪽으로 시작했고 현재도 좋았다. 호와 불호만을 이야기하자면 호(好)겠지.
좋은 감정이 없었다면 제아무리 가족들의 선물을 고르기 위해 도움이 필요했다지만 먼저 말을 꺼내는 일은 없었을 테니까.
“그래서 네 답은?”
“······잠시 시간을 주시죠. 쉽게 결정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는 거, 아시지 않습니까.”
“맞는 말이야. 두 번 할 수 있는 게 아니니 신중히 결정해야지. 그래도 너무 줄 수는 없어. 남의 가족을 서른 줄에 접어들 때까지 홀로 만들 생각이 아니라면 말이야.”
자, 고민을 해보자. 나는 분명 그녀에게 좋은 감정이 있다. 그러나 결혼을 생각할 정도라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아니었다. 애초에 몇 번 만나지도 않았는데 무슨. 첫 눈에 반한다는 표현도 있지만 나는 그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렇다고 거절할 거냐고 묻는다면 그건 또 애매했다. 부모님이 걱정하는 것처럼 서른 줄에 가까운 나이 문제도 있었고 - 물론 내가 가지는 위치가 위치이니만큼 나이가 큰 문제가 되지는 않겠지만 -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사람과 미래를 공유하라는 건 꽤나 곤란한 이야기였으니까.
아마 이번 기회를 놓치면 혼인이라는 문제는 꺼내기 힘들 터였다. 내가 아는 이성이 무척이나 적기도 했고 앞으로 무척이나 바빠질 테니까. 다른 쪽으로 시선을 돌리기 어려워지겠지.
물론 무조건적으로 받아들일 필요도 없었다. 가문의 의도에 따라야하는 정략결혼에 응하는 이유는 보통 가문 덕분에 많은 것을 누렸으니 너 또한 가문을 위해 희생하라는 대의 때문인데 나는 그런 면에서 누구보다도 자유로웠으니까.
“혼자 고민해봤자 별 거 없나.”
결혼이 혼자 하는 것도 아니고 적어도 상대방과 대화는 해봐야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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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괜찮아요.”
소식을 들은 그녀의 표정은 담담했다. 하긴 시일이 지난만큼 마음의 정리를 하기에는 나름대로 충분한 시간이었으리라. 물론 너무 담담해서 남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은 느낌을 받아 당황스럽긴 했지만.
“그렇······습니까?”
“공자께서는 별로 내키지 않으신가요?”
“그런건 아닙니다만, 정말로 저로 괜찮으신가 해서 말입니다.”
“공자는 공자가 생각하시는 것 이상으로 좋은 사람이에요. 스스로를 낮추실 필요는 없어요.”
“혹시라도······.”
“아버님께서는 저에게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말씀하셨죠. 원하는 상대가 있다면 설령 아무것도 가지지 못한 평민이어도 상관없다고 하셨고요. 공자께서 걱정하시는 일은 없었으니 염려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렇게까지 말하면 제가 할 말은 없고요. 아무튼 내가 염려하던 상황은 없었다고 하니, 이 결혼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하니 다행이었다. 상대가 원치 않은 결혼의 파트너가 되는 것만큼은 사양이었으니까. 거의 매일 얼굴을 보게 될 텐데, 차라리 안 하는 게 낫지.
“그렇다면 다행입니다.”
“그걸 물으시려고 오신 건가요?”
“······조금 더 대화를 나눠보죠. 어릴 시절의 이야기나 마법에 관한 이야기도 괜찮겠죠. 뭐가 되던 괜찮을 겁니다. 서로에 대해 알아간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니까요.”
그 뒤로 나는 한동안 일에서 손을 놨다. 덕분에 아르민은 그 동안 못 잤던 잠을 잘 수 있다며 두 손을 번쩍 들며 기뻐했고, 나는 그 결과 남는 시간을 시그니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보냈다.
대화의 주된 주제는 지크 후작 그리고 마법이었다. 나는 테라 방벽에서 있었던 일들에 대해 이야기했고 그녀는 뛰어난 청취자처럼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내 이야기가 마무리될 때쯤 그녀는 관심을 가지고 있는 마법에 대해 내게 물었고 나는 성심성의껏 그 질문에 대답을 해줬다. 꽤나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래. 결정은 내렸나? 아니면 더 시간이 필요한가?”
“잘 부탁드립니다. 형님.”
“응?”
“앞으로 매부라고 불러주십시오.”
“······하하하! 앞으로 잘 부탁하지. 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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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좋은 흐름을 타기 시작했지만 당장 무언가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일단 부모님들께서 허락을 하셔야 할뿐더러 - 아버지와 어머니는 내가 하루라도 빨리 가정을 이루길 바라시기에 거의 100%의 확률로 허락하시겠지만 - 시기가 그렇게 썩 좋지는 못했다.
아직까지 항복하지 않은 반란군을 진압하기 위한 진압군이 활동하는 시기였으니까. 흘러가는 전황으로 볼 때, 진압군이 개선을 하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는 않을 테고 그 이후가 되어서야 뭐가 되었든 본격적으로 진행할 수 있을 터였다.
“나도 품절남이 되는 건가?”
전생과 현생을 합쳐 오십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여자와는 거리가 멀었었다. 남중 - 남고 - 공대 - 군대라는 환장할 테크트리를 탄 전생. 그리고 전생과 달리 기회는 있었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거리를 두었던 현생까지. 그 끝이 이럴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었다.
그러나 썩 나쁜 기분은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녀는 아름답고 똑똑했으며 착할 뿐만 아니라 나와 이야기까지 잘 통했다. 만약 전생이었다면 어떻게든 그녀와 말 한 마디를 나누기 위해 별의별 노력을 다했을 정도로. 그러니 기분이 나쁠 이유는 전혀 없었다.
“골치 아픈 일들이 몇 개 남아있기는 하지만······.”
중요한 일은 아니지만 중요한 일이었다. 성이 바뀔 수도 있는 일이었으니까. 만약 시그루드 형님이 없었다면 내 성이 바뀌며 데릴사위가 되었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고 형이 없었다면 시그니 드라그닐이 되었겠지. 하지만 둘 다 아니었으니 후계자가 있는 상황에서 데릴사위로 들어가기도 방계의 성을 따르기도 애매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뭐지?”
이렇게 전혀 중요하지 않은 일들로 잠깐 고민에 빠져있을 때, 나는 무언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이렇게까지 조용했던 적이 얼마만인가, 아니 그 전에 지금의 침묵은 단순히 조용하다는 영역에서 한 발자국 더 나아가 있었다.
스윽-
아공간을 열어 [발톱]을 꺼내들었다. 장전된 두 발의 탄환이 꽤나 든든하게 느껴졌다. 언제라도 방아쇠를 당길 수 있도록 준비된 상황에서 주변을 향해 감각을 돋우고 있을 때, 방의 문이 천천히 열리기 시작했다.
꿀꺽-
“어디서 익숙한 동족의 냄새가 나는 것 같더라니, 네 녀석에게서 풍기는 냄새로구나.”
머리에서 발끝까지, 손가락 하나조차 옴짝달싹할 수가 없었다. 그 만큼 내 눈앞에 나타난 정체불명의 존재는 어마어마한, 지금껏 느껴본 적 없는 존재감을 뿜어내고 있었다.
“누구······십니까?”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6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