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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75화 (75/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5화 - >

“자네가 레닐 드라그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나를 도와 새 시대를 열어볼 생각이 없나?”

새 시대를 열자니, 과연 새롭게 최고의 자리에 오른 젊은 지도자에게 걸맞은 첫마디가 아닐 수 없었다. 새 시대라는 명사가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는 몰라도 새롭게 만인지상의 자리에 오를 사람의 입에서 나온 만큼 만만한 것은 아니리라.

“제국의 안녕과 번영을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새 시대가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무엇 하나 확실하지 않을 때, 가장 현명한 방법은 웅크리며 눈치를 보는 거다.

최소한 하나라도 확실한 것이 있을 때까지. 이미 3황자가 대세를 잡은 상황에서 무슨 눈치를 보냐고 하겠지만 위에서 선택한 작은 결정이 아래에서는 큰 변화로 다가올 수 있었으니까. 한창 심각한 고민에 빠져있는 나로서는 당연한 선택이었으나 3황제에게 있어서는 만족스러운 대답이 아닌 모양이었다.

“그런 대답을 원한 것이 아니네.”

“신이 어리석어 전하께서 의도하신 바를 파악하지 못하였습니다.”

“하하. 재미있는 농담이군. 최연소로 마도의 이름을 얻은 마법사가 어리석다면 이 세상 그 누가 스스로를 지식인이라 자처할 수 있을까!”

아무래도 3황자는 나를 어영부영 놓아줄 생각이 없는 듯, 물 흐르듯 흘러가려는 내 앞에 댐을 쌓아버렸다. 어떻게 해서든 답을 듣겠다는 태도, 그렇다면 건드려봐야겠지. 이대로 어장 속의 물고기가 되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전하께서 생각하시는 ‘새 시대’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무엄하다! 감히 폐하의 명령에 의문을 표하다니!”

벌써부터 폐하인가, 명분이 있고 힘도 있으며 제국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수도를 장악한 이상 하늘에서 운석이 떨어져 수도를 괴멸 직전으로 만드는 것이 아닌 이상에야 예정된 미래라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렇기에 그들의 행동이 이해가지 않는 것은 아니었으나 기분까지 괜찮으냐를 묻는다면 아닐 수밖에. 똥개도 제집 마당에서는 한 수 먹고 들어간다지만 집주인과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개가 짖어대면 누구라도 기분이 나쁠 테니까.

“거기까지. 너희들에게 입을 열라 말한 적은 없다.”

“······송구스럽습니다.”

“두 번째 대답 또한 내가 원하는 대답은 아니로군.”

“그 어떤 장사치도 물건을 보지 않고 값을 치르지는 않는 법입니다.”

“동시에 자네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내 목표를 들을 자격이 있다는 것도 인정하지. 내가 생각하는 새 시대라, 제국의 황제로서 목표로 할 것은 하나뿐이지. 대륙일통!”

지금껏 그 누구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했던 대업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외치는 3황자의 모습에서 단순히 명성을 높이기 위한 욕심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눈앞의 이 젊고 야심만만한 새 황제는 진실로 대륙 전체를 향해 전쟁을 벌일 생각이었다.

대륙일통.

제국의 영토가 대륙의 절반에 가깝고 최강의 국력을 자랑한다지만 어디까지나 단일 국가로서의 이야기였다. 지금의 평화는 제국과 나머지 왕국들의 미묘한 맞물림 속에 존재하는 것.

제국이 노골적으로 대륙일통에 대한 욕심을 드러낸다면 그들 또한 가만히 앉아서 당해줄 리 없을 터, 게다가 제국은 몬스터의 대지라는, 후방에 물자 잡아먹는 하마가 있잖은가.

대륙 일통을 위한 전쟁을 벌이다가 테라 방벽이 뚫린다면 제국 북부가 초토화될 터, 그런 만큼 최후의 승자가 누구일지는 제국으로서도 장담할 수 없었다. 그리고 3황자 또한 그를 모르지 않으리라.

“쉽지 않은 일이지. 쉬웠다면 나에게까지 차례가 오진 않았을 터이니, 하지만 제국 전체가 하나로 뭉친다면 불가능한 일도 아니다.”

“그런 일이라면 저보다는 스승님을 만나보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저는 마탑에 소속된 일개 마법사일 뿐, 제국의 마법사들을 좌지우지할 힘은 없습니다.”

“물론 그대의 스승인 마탑주는 훌륭한 마법사다. 허나 그 또한 구세대의 인물. 새로운 시대를 열 주역으로는 적합하지 못하지.”

이 대화를 통해 3황자가 나에게 원하는 바가 무엇인지 확실히 알 수 있었다. 그러나 단순히 그것만으로 끝은 아니었다.

“그리고 자네와 관련해 흥미로운 이야기가 들려오더군. 타이탄 프로젝트라고 했던가?”

“······어디서 그 이야기를 들으셨습니까?”

“높은 자리에 있다 보면 별의 별 이야기가 다 들려오는 법이지. 아르민이라고 했던가, 자네 제자의 이름이.”

“딱히 제자로 삼은 것은 아닙니다.”

3황자의 앞만 아니었어도 인상을 찌푸리며 욕이라도 한 마디 내뱉었을 것이다. 입단속을 시켰으나 영원한 비밀로 남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시작도 하기 전에 3황자가 관심을 갖고 지켜볼 줄이야.

“제국을 위해 헌신하라. 그렇다면 제국 또한 너를 위할지니.”

지원을 아끼지 않을 테니 타이탄 프로젝트를 성공시키라는 속뜻, 그 내용이 무엇인지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섣불리 그러겠다고 대답할 순 없었다. 설령 새로운 황제의 말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타이탄을 개발하려는 이유는 몬스터들로부터 인류를 구하기 위해서지, 인류사이의 전쟁을 촉발시키기 위함이 아니었으니까.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허하노라.”

“전하께서 말씀하시는 대륙에 몬스터의 대지 또한 포함되는 것입니까?”

과연 이 질문에는 자신감 넘치는 3황자도 섣불리 대답하지 못했다.

타이탄 프로젝트가 되었건 뭐가 되었건 대륙일통이라는 목표를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3황자의 물음과 그 목표에 몬스터의 대지도 포함되어있냐고 물어본 나. 그 말은 곧 몬스터의 대지를 정리하지 않으면 손을 잡을 수 없다는 의도가 포함되어 있었기에.

타 왕국들과의 전쟁만큼이나 어려운 일이 몬스터들의 앞마당에서 몬스터와의 전쟁을 벌이는 일이었으니까. 그 뜻을 파악한 황자 뒤의 기사들의 표정들이 구겨졌다. 그럼에도 아까 전, 황자가 한 말이 있었기에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볼 뿐, 입을 움직이는 이들은 없었지만.

“······그 질문을 할 자격이 자네에게 있다고 생각하나?”

자격, 자격이라. 새 시대의 주역이 될 자격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즉 3황자의 대륙일통이라는 목표 안에 몬스터의 대지는 없다는 말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확실히 저 하나로는 부족할 겁니다. 하지만 대륙일통을 위한 발걸음을 시작할 때쯤에는 충분할 것도 같습니다.”

“호오?”

내 대답에 3황자가 눈을 빛냈다. 지금의 나는 부족하지만 미래의 나는 충분하리라는 말. 그 과정에 타이탄 프로젝트가 있으리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니까.

“자신 있나?”

“이론대로 되지 않는 것이 실전이라지만 가끔은 이론보다도 실전에서 더 뛰어날 때도 있는 법입니다.”

“······신병기의 실전 무대로 몬스터의 대지라면 충분하겠지. 몬스터조차 제압하지 못해서야 대륙일통을 어떻게 이루겠나?”

나쁘지 않은 대답이다. 성과를 내라. 그 성과에 따라 테라 방벽 북부 또한 제국의 영토로 삼겠다는 말이었으니까. 물론 성과의 기준이 애매한 만큼 어떤 일이 벌어질지 알 수 없었지만 하기로 한 일이라면 가능성이 한 층 더 올라간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기대가 커지면 실망도 큰 법이지. 나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지 말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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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황제가 탄생할 대관식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당연한 일이다. 새로운 황제가 즉위한다는 이야기는 지금까지의 권력 구도가 바뀐다는 뜻이며 한 번 권력을 잡은 이들은 제 손이 움켜쥐고 있는 그것이 모래알처럼 빠져나가기를 원하지 않았으니까.

특히나 지금처럼 정상적인 승계가 아닌 황자들간의 정쟁을 통해 황제가 결정 난 상황이라면 더더욱. 오늘의 대관식이 끝남과 동시에 다른 황자들의 편을 들었던 귀족들에 대한 처리가 뒤따를 테니까. 그 목록에 한 줄을 추가하고 싶지 않다면 오늘만큼은 수도로 올라와야만 했다.

그래서일까, 수도는 내가 경험한 그 어느 때보다 분주하고 떠들썩했으며 혼란스러웠다. 귀족, 기사, 마법사, 상인, 평민에 상관없이 누군가는 기뻐하고 누군가는 아쉬워했으며 걱정하는 이들도, 분노하는 이들도 적게나마 있었다.

“왔어?”

“다친 데는 없고? 큰 소란이 있었다던데.”

“나야 마탑 안에만 있었으니까. 어떤 미친놈이 마탑을 건들겠어?”

형도 아버지를 대신해 대관식에 참석하기 위해 수도로 올라왔다. 아, 대신했다는 말은 좀 그런가? 이제 드라그닐 자작은 아버지가 아닌 형이었으니까. 올 사람이 왔다는 말이 맞겠지.

“다행이네.”

해가 가장 높은 곳에 올라섰을 때, 대관식이 시작되었다. 속내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이 겉으로나마 환호를, 축하를, 기쁨을 표현하고 있었다. 물론 그 대부분에 속하지 않는 이들도 있었다. 새로운 황제의 마지막 경고에 결국 무릎을 꿇고 백기투항을 한 전(前) 황자들과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그러했다.

그럴 만도 했다. 앞으로는 지금까지의 삶과 달리 쥐 죽은 듯 살아가야 할 테니까. 황족으로서 누렸던 특권은커녕 귀족으로서의 삶조차 제대로 누리지 못할 테니까. 특히나 황제의 머리 위에 놓인 황관에 대한 욕심을 숨기지 못하는 이들의 말로가 어떨지는 굳이 말로 표현할 필요가 없으리라.

황제가 황자에 앉아 좌중을 둘러봤을 때, 재빨리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으나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황제의 눈은 얼굴에 달린 두 개 뿐만이 아닌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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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황제, 다리우스 4세가 대관식을 끝내자마자 제일 먼저 한 일은 마지막까지 저항의지를 꺾지 않은 그의 배다른 형제들에게 병력을 보내는 일이었다. 여섯 자리를 넘어가는 숫자를 제국 곳곳으로 보내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나 적어도 이번만큼은 쉬운 일이었다. 새로운 황제에게 눈도장을 찍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알아서 병력과 물자를 가져다 받쳤으니까.

물자와 병력의 차이, 게다가 머리를 스스로 갖다 바치면 팔과 다리에는 죄를 묻지 않겠다는 황제의 선언으로 인한 사기의 차이까지. 반강제로 일어난 반란을 제압하는 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으리라.

그리고 나는 그에 상관없이 타이탄 프로젝트를 위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팀원이라고는 두 명밖에 되지 않는 작은 팀. 팀장은 나, 팀원은 아르민이었다. 요즘 하는 걸로 봐서는 조만간 4서클의 벽을 뚫을 것 같았지만 뚫을 듯 말 듯한 그 애매함에서 몇 년을 보내는 이들도 있으니 장담은 못하겠다.

어쨌든 그 중 제일 중요한 건 이론을 가다듬는 일이었다. 이론과 실전은 다르다지만 이론조차 완성되지 않으면 실전은 볼 필요도 없었으니까. 완벽하지는 않아도 괜찮았다. 이론은 제아무리 완벽해도 실전에서는 허점이 보이는 법, 가능성과 현실성, 연구가 가져다줄 성과를 보여줄 수만 있으면 첫 발은 내딛었다고 봐도 되었으니까.

“젠장. 미쳤어?! 이 따위로 술식을 짰다가는 폭발이나 안하면 다행이겠다!”

“이 정도는 마법을 갓 배우기 시작한 내 조카도 떠올릴 수 있겠다. 이 따위 방법이나 떠올리라고 너를 데려온 줄 일아? 좀 더 획기적인 방법을 생각해 봐!”

“이 곳에 와서 잠만 잤냐? 테라 방벽에 있을 때와 달라진 게 없는 것 같은데.”

물론 나에게 있어 완벽하지 않음이 아르민에게까지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은 아니었다. 기준이 달랐으니까. 내가 원하는 기준을 맞추기 위해서는 밤낮에 상관없이 고생해야겠지만, 지가 원하던 일이니 불평하진 않겠지. 안 그래?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5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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