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4화 - >
검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어둠이 드리운 밤임에도 불구하고 치솟는 불길은 마치 지금이 낮인 것 마냥 수도를 밝혔고 사람들 또한 밤과 낮이 바뀐 것처럼 활발하게 움직이며 수도를 부산하게 만들고 있었다.
사람이 사람을 베고 분노와 함께 쓰러진다. 두려움에 떨며 살려 달라 외치는 음성과 그 목소리를 듣지 못한 것 마냥 검을 휘두르는 이들, 불이 살을 태우는 역겨운 냄새와 고통을 이기지 못한 채 비명을 지르는 이들까지. 그 모든 광경이 수도 중심부에 위치한 마탑, 그 상층부에서는 한 눈에 들어왔다.
꽈악-
참혹한 광경이다.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광경은. 특히나 테라 방벽에서 사람과 몬스터의 전투만을, 사람이 사람을 지키기 위해 힘을 사용하는 광경만을 지켜봐왔던 내게는 한층 더 충격적인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사람이 죽는 광경은 질릴 정도로 봐왔지만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광경은······. 단순히 과정만을 놓고 본다면 테라 방벽에서의 죽음이 몇 배는 더 참혹했을 텐데.
이런 광경이 벌어질 거라 예상하지 못한 건 아니다. 최악의 경우, 단순히 수도에서 벌어지는 정변이 아니라 제국이 여러 개로 찢어져 수만, 수십만 명이 죽어갈 내전까지도 예상하지 않았던가.
그 뿐인가, 실전을 방불케 하는 대련도 셀 수 없이 경험했으며 죽음의 위기도 몇 번이고 거쳤다. 참혹한 광경은 테라 방벽에서, 몬스터와 동물을 상대로 생체 실험을 진행하며 질리도록 보았다. 그래서 조금은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이런 광경을 보고도 별로 개의치 않을 줄 알았다.
하지만 지금 내 기분은 근래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최악이었다.
촤르륵-
커튼을 치고 무의식적으로 신체를 강화하던 마력까지 거둬들였다. 삽시간이 방 안이 어둠에 물들고 내 귀를 괴롭히던 소음도 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내 기분은 나빴다. 평소대로일 뿐인 침대조차 울퉁불퉁한 땅에 몸을 뉘인 것처럼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안(安 - 편안 안), 편(便 - 편할 편), 락(樂 - 즐길 락) 등등 이 더러운 기분을 날려 보낼 각인들이 쉴 세 없이 떠올랐지만 단 하나의 각인도 활성화하지 않았다.
똥 위에 흙을 덮어봤자 눈에만 보이지 않을 뿐, 찝찝함과 퀴퀴한 냄새는 원인을 없애지 않는 한 그대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되면 겉으로나마 산뜻해진 기분조차 금세 다운될 수밖에 없었고. 테라 방벽에서의 오랜 경험으로 그 점을 잘 알고 있는 위의 각인들은 중독성 없는 마약에 불과할 뿐이었다.
‘······.’
침대에 누워도 잠이 오지 않아 뒤척임만 계속됐다. 사실 여기서 내가 잠을 잔다고 하더라도 바깥의 소란이 마탑 내부에까지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극히 적었다. 그러나 계속해서 뒤척이는 이유는
‘하지 말아야 하나?’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에 대한 고민 때문이었다.
[타이탄 프로젝트]
초기 목표는 기사 개인의 무력을 향상시켜 부족한 인력을 대체하고 결과적으로 테라 방벽 너머를 몬스터의 영역이 아닌 인류의 영역으로 바꾸는 것. 물론 그 목표는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도 그럴까?
단언컨대 아니라고 장담할 수 있었다. 그 이유는 간단했다. 첫 번째로 결정권을 가진 이들 중 나와 같은 경험을 한 이들이 없었으니까.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료들이 몬스터의 한 끼 식사거리로 전락할 때의 그 기분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은 절대로 알 수 없었다.
두 번째로는 메리트가 없기 때문에. 정확히는 들어가는 투자비용 대비 거둬들일 수 있는 수익성이 낮기 때문이었다. 제국 북부는 대륙에서도 최북단. 일 년의 반절이 겨울이며 나머지 반절조차도 따뜻하다고 보기에는 어려운 날씨였다.
몬스터가 아니더라도 사람이 살아가기에도, 농사를 짓는 것도 불가능할 정도로 가혹한 환경. 물론 드래곤을 찾아 돌아다니며 봐둔 몇몇 광산들이 있긴 했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할 터였다.
타이탄 프로젝트가 성공적으로 안착하더라도 몬스터의 대지를 깔끔히 청소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밀려온 몬스터를 막아내는 것만으로도 제국으로서도 부담스러운 수준의 물자와 인력이 소모되는데 밀고 올라가는 것은 오죽할까.
게다가 몬스터의 대지는 넓다. 왕국 정도는 만들 수 있을 정도로. 얼마의 시간이 필요할 지도, 얼마의 예산이 필요할 지도 섣불리 예상할 수 없으며 ‘이건 아닌 것 같은데?’ 라는 생각이 들어도 중단할 수 없었다. 그나마 이 정도 피해로 막고 있는 건 테라 방벽이라는 천혜의 요새 덕분이었으니까.
‘차라리 3황자 손을 들어줄 걸 그랬나?’
지분이 없으면 배당금을 받을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 이 때, 3황자를 도왔다면 차후에 내 주장을 펼치는데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개소리지. 설령 그 때, 3황자의 제안을 받아들였어도 그 정도 배당금은 못 받아.’
10억은 큰돈이다. 1억 규모의 벤처기업에게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유치해야 할 금액이지만 1000억, 1조 규모의 기업에서도 그럴까? 유치하면 좋겠지만 투자자 앞에서 빌빌거릴 필요까지는 없는 것이다. 그 당시 나와 3황자의 관계가 그러했다.
“······쯧.”
이런 상황에서 타이탄이라는 병기의 위력이 증명되고 타이탄 프로젝트가 성공을 거뒀을 때, 타이탄을 장착한 기사들이 향하는 곳은 어디일까. 북쪽? 남쪽?
그 때쯤에는 확고한 황제가 되어있을 3황자 입장에서는 본인의 업적을 위해서라도 큰 비용과 긴 시간이 필요하나 얻어봤자 큰 쓸모도 없는 척박하고 추운 북쪽의 땅을 원할까, 보다 적은 시간과 따뜻하고 풍요로운 남쪽 땅을 원할까.
설령 새로운 황제가 될 3황자가 백성들을 가족처럼 여겨 테라 방벽의 상황을 안타깝게 여겨 결단을 내린다고 하더라도 대부분의 귀족들이 반대를 할 것이 분명했다.
물론 북쪽의 소란이 하루 이틀 된 일이라면 제국으로서도 고민이라도 해봤겠지만 테라 방벽에서의 손해는 이미 제국의 귀족들에게 깔아두고 가는 수준이었다. 손해를 손해라 생각하지 않고 더한 이득을 얻어 부족한 것을 메우는 선택을 내릴 사람들이란 이야기였다.
“답이 없네. 답이 없어.”
단지 외면하고 있었을 뿐, 이미 예상하고 있었던 일일지도 몰랐다. 일단 완성부터 시키고 보자고, 그 활용은 그 후에 논해도 늦지 않다고.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님을 알고 있었으면서.
그 날 밤, 늦게까지도 잠을 이루지 못한 나와 마치 밤이 없는 것처럼 환한 수도가 묘한 대비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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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아침, 전 날 밤의 벌어졌던 정변의 주인공이 3황자 측이라는 것은 간단하게 밝혀진 사실이었다. 해가 밝을 때, 수도에 남아있던 황제의 자식들은 3황자와 그의 친동생들 그리고 일찌감치 3황자 밑으로 들어갔던 이들밖에는 없었으니까.
황제의 장례식이 끝나기가 무섭게 수도 한 복판에서 칼을 뽑아들다니 어째서 아르센 공작가가 지크 후작이나 권터 후작, 스승님과 같이 특별한 인물을 배출하지 못했음에도 제국 제일의 귀족가문으로서 군림할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는 준비성과 과감함이었다.
그러나 썩어도 준치, 부자는 망해도 삼 년 먹을 것이 있다는 말처럼 다른 황자들도 무작정 당하고만 있지는 않았다. 몇몇 이들은 무사히 수도를 빠져나가 자신들의 영역에서 후일을 기약할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세에는 지장이 없었다. 태산과도 같은 댐이라도 작은 구멍에서부터 붕괴가 시작된다지만 제일 중요한 걸 놓치지 않는다면 작은 구멍 정도야 얼마든지 메울 기회가 있었으니까.
1황자와 2황자.
3황자에게 있어 가장 큰 걸림돌이었던 두 중요인물들. 이 두 사람에 비하면 다른 황자들은 피라미나 다름없었다. 그런 만큼 이 두 사람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에서 어제 밤에 벌어진 정변은 합격점을 주기에 충분했다.
수도를 장악한 3황자가 무난하게 대관식을 치르고 나면 힘과 명분, 두 가지를 모두 갖춘 새로운 황제에게 간신히 몸만 챙겨 허겁지겁 도망친 전(前) 황자들을 처리하는 건 시간이 조금 걸릴 뿐,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테니까.
사실상 경쟁은 끝났다.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피를 덜 흘리는 방향으로. 그리고 경쟁의 승리자가 된 3황자는 본격적으로 보상을 휩쓸기 시작했다.
“황제 폐하께서 남기신 유언장이오.”
정변이 마무리된 다음 날, 3황자와 아르센 공작은 수도의 주요 인물들을 소집했다. 1황자가 아닌 3황자를 다음 황제로 삼겠다는 내용의 유언장을 발표하기 위해서. 물론 저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이 곳에 아무도 없었다. 저런 내용의 유언장이 존재했다면 장례식동안 눈치싸움만 벌였을 리 없을 테니까.
그러나 트집을 잡는 이들 또한 없었다. 어찌 되었든 대세는 넘어갔으며 3황자에게 자격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차근차근 이루어지는 대관식 준비. 그와 동시에 3황자는 그의 배다른 형제들에게 사신을 보냈다. 대관식에 참석하라고. 황족의 자격은 박탈당하고 일반 귀족 혹은 평민이 되겠지만 목숨만은 살려주겠다고.
연합하여 새로운 황제가 될 3황자에게 대항할지, 고개를 숙이고 목숨만이라도 보전할 지는 그들의 선택이었으며 나로서는 어찌 되든 상관없는 이야기였다. 굳이 따지자면 순순히 고개를 숙이는 편이 애꿎은 피해자도 없고 좋겠지만 내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은 아니었으니까.
사실 나에게 있어 새로운 황제가 될 사람은 1황자보다는 3황자가 나았다. 능력 있고 야심 있는 신임 황제라면 자신의 이름을 드높이기 위해 새로운 업적거리를 찾아 헤맬 테니까. 1황자처럼 평범한 능력을 갖추고 현상유지에 힘쓰는 사람보다는 앞으로 있을 내 계획을 이뤄나가기에 보다 편하리라.
“내가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민을 하고 있는지······. 차라리 고향으로 내려갈까.”
여전히 앞에 위치한 길에 대한 고민은 진행 중이었지만.
똑똑-
그 때, 나를 찾아온 한 기사가 있었다.
“3황자 전하께서 드라그닐 경을 모셔오라 하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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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모셔오라지, 좋은 말로 할 때 찾아오라는 명령에 가까웠다. 거절하려면 못할 것까지는 없지만 그럴 이유도, 필요도 없었다. 게다가 나쁘지 않은 타이밍이다. 3황자가 어떤 인물인지 두 눈으로 직접 보고 싶기도 했으니까.
“잠시 몸수색이 있겠습니다. 협조 부탁드립니다.”
“그러게.”
황궁의 방비는 삼엄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당연한 일일 수밖에. 물론 마법사에게 있어 큰 의미가 있는 행동은 아니었지만.
“3황자 전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그리고 걸음을 끝마친 이 곳의 방비는 한층 더 삼엄했다. 천천히 열리는 문. 그 안에 이 엄중한 호위의 주인공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자네가 레닐 드라그닐인가?”
“그렇습니다. 전하.”
“단도직입적으로 묻지. 나를 도와 새 시대를 열어볼 생각이 없나?”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4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