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3화 - >
1황자는 말 그대로 평범했다. 천재는 아니지만 둔재도 아닌, 범재에 속하지만 특기인 영역에서라면 노력이 동반된다는 가정 하에 수재의 영역에는 들어갈 수 있는 평범한 사람.
난세에는 무능력도 죄라지만 세계의 정세는 난세와는 거리가 있었으며 황제로서의 책무를 그럭저럭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의 능력은 있었다. 성군은 될 수 없겠지만 그렇다고 폭군이 되지는 않을.
그런 만큼 다리우스 3세의 적장자인 그가 다음 대 황제가 되는 것은 큰 문제가 없는 일이었다. 다리우스 3세가 그저 그런 평범한 황제였다면 말이다.
절대 권력을 꿈꿨던 야심 넘치는 황제와 아버지의 목표를 이어나가기에는 능력도, 의지도 부족한 장남. 그런 장남이 황제에게 후계자로서 만족스러울 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른 아들들이 눈에 들어왔냐고 묻는다면 그것도 아니었다.
장남에 비하면 재능은 비교할 바가 되지 못했지만 문(文)이 아닌 무(武)에 재능을 보인 차남은 무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긴 했지만 결국 개인의 무력일 뿐이었으니 뛰어난 장군이라면 모를까, 황제의 재목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삼남은 어떨까, 능력만 보자면 황제의 눈을 만족시킬 수 있는 아들이었다. 뛰어난 머리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적인 감각도 출중했다. 다만 삼남이라는 위치에서 나오는 정치적 불안요소는 정통성의 악화, 곧 황제의 힘이 약해지는 결과로 나올 우려가 있었다. 게다가 삼남의 장인이 아르센 공작이니만큼 삼남을 지지한 대가로 얼마나 많은 것을 가져가려 하겠는가.
세 아들이 그러하니 다른 아들들은 언급할 필요조차 없었다. 그렇게 어영부영 시간이 흐르다가 황제가 쓰러졌고 황자들 간의 눈치싸움이 시작되었다. 그것이 지금까지의 상황이었는데.
“황제 폐하께서 붕어하셨습니다!”
모든 것이 새로 시작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물론 지금의 상황을 다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기에 혼란은 크지 않았다. 물론 급사를 했다거나 암살을 당한 것에 비해 비교적 덜 혼란스럽다는 것일 뿐,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던 황제가 죽었는데 혼란이 작을 리는 없었다.
물론 여전히 겉으로 드러나는 혼란은 없었다. 황제가 죽은 지 얼마나 되었다고 비어있는 후계자 자리를 논한다면 상대방에게 물어뜯을 틈을 주는 것이었으니까. 적어도 황제의 장례가 마무리되는 그 때까지는 조용하리라. 그렇기에 나 또한 바깥일에 관심을 최소화한 채, 내 몸을 돌보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었다.
‘윽.’
처음부터 끝까지 쉬운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온 몸 구석구석에 퍼져있는 회로 하나하나를 살펴야 했으니까. 갈라진 틈 사이사이로 아무런 대책 없이 덕지덕지 덧붙여 메운, 메우다 못해 바깥으로 빠져나온 것들을 긁어내어 평평하게 만드는 일이었다.
말이야 쉽지, 내가 느끼는 고통은 뼈를 긁어내는 고통이었으며 예리한 칼로 피부를 저미는 고통과 다를 바 없었다. 하루에도 수번을 기절할 뻔했고 연공을 마친 뒤에는 식은땀으로 온 몸을 적셨다. 연공을 시도할 때마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그럴 순 없었다.
기껏 레이싱카를 뽑아놓고, 8차선 도로를 만들면 뭐하겠는가. 도로가 비포장도로인데, 중간 중간 거대한 싱크홀과 솟아나있는 바위 등등. 제아무리 성능 좋은 차가 있더라도, 제아무리 도로가 널찍하더라도 그런 도로를 아무런 사고 없이 빠른 속도로 완주할 수 있는 차량이 몇 대나 있을까. 안타까운 이야기지만 내 마력회로가 딱 그 짝이었다. 조금의 과장도, 축소도 없이. 그래서 나는 이 작업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아무런 투자 없이 이득을 얻으려하면 그건 도둑놈 심보지. 하나를 얻으면 하나를 잃는 법. 이건 당연한 결과다. 레닐!’
용혈을 통해 참으로 많은 것을 얻었다. 몇 개월을 요양해야 대충 봉합할만한, 전과 같이 사용하기 위해서는 년 단위의 시간이 필요할 부상을 짧은 시간 만에 치료하다 못해 그 위의 경지에 다다를 수 있도록 도왔다.
그 뿐이랴, 보통의 마법사는 평생을 노력하도 쌓을 수 없는 수준의 마력까지 얻을 수 있었으니 그 과정에서 죽을 뻔한 고비를 넘겼고 지금도 죽는 것이 편할 정도의 고통을 느끼고 있었으나 얻은 것에 비하면 배부른 투정이라 해도 할 말은 없었다.
똑똑-
그렇게 회로의 중심이 되는 심장을 중심으로 하여 천천히 회로를 가다듬던 중 문을 두들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 시간에 약속을 잡은 사람은 없었는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강제로 문을 열려고 했다가는 그 사람의 생사를 장담할 수 없었기에 연공을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조?”
“잠깐 시간 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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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르르르-
하얀 김이 솔솔 나오는 주전자로부터 얇은 물줄기가 찻잔을 향해 낙하를 시도했다. 주전자에 물이 줄어드는 만큼 차오로는 찻잔의 물. 깨끗한 주황빛과 좋은 향이 ‘나 좋은 차요’라고 외치는 듯했다. 실제로도 좋은 차였지만.
“무슨 일이야?”
찾아오면 안 될 사람이 찾아온 건 아니었다.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던 적이 없는 것도 아니고 내 방으로 조조가 찾아온 적이 없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다만 매사에 바쁜 이들답게 대부분의 경우 그가 혹은 내가 서로에게 볼 일이 있었다.
“슬슬 돌아가려고.”
“······돌아간다니?”
“내가 돌아갈 곳이 따로 있나.”
만약 내가 차를 마시고 있었다면 그대로 뿜어냈을 만큼 당황스럽고 급작스러운 이야기였다. 확실히 잠깐 잊고 있었지만 조조의 고향은 이 곳이 아니었다. 오슬론에서 나를 만난 지도 고향에 다녀와도 이상한 일은 아닐 터, 그러나 내가 당황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었다.
‘갑자기 왜?’
고향에 돌아가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큰 이유는 누가 뭐라고 해도 고향에 있는 사람들, 가족 혹은 친구 등을 보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하지만 조조에게는 출신만 아우베스 왕국일 뿐, 그 곳에 남아있는 것이 없었다.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고향은 스승을 따라가기로 결정하며 떠나보냈으며 부모님도, 형제도 없었다. 마지막까지 그의 곁에 남아있었던 스승도 그가 제국을 향해 떠나기 전, 돌아간 상황에서 느닷없이 조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니 당황스러울 수밖에.
“갑자기 왜? 이런 말하기는 좀 뭣하지만 누가 괴롭혀? 그렇게 간 큰 사람은 없을 텐데. 아니면 장로들이 견제라도 했어?”
나로서는 합당한 의심이었다. 조조는 나만큼은 아니더라도 젊은 나이에 훌륭한 성과를 거둔 뛰어난 마법사였으며 지금까지의 마법계에 진리로서 존재했던 이론에 의문을 던진 사람이었다. 아직 완벽하진 않다지만 스승님까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연구였으니 조조에게 함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다면 앞뒤 꽉 막힌 장로들? 자부심이 하늘을 찌르는 작자들이니 조조의 존재가 불편할 만도 할 것이다. 제국이 아닌 타 왕국 출신의 마법사. 게다가 그들이 평생을 갈고닦은 방법에 대한 반론을 제시했으니까. 게다가 젊은 나이에 자신들과 같은 반열에 들 수도 있다는 것이 아니꼬웠겠지. 그러나 이 모든 의심에 대해 조조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건 아니야.”
“그러면?”
“근래에 작게나마 깨달음이 있었지. 하지만 그 뿐이었어. 그 깨달음을 온전히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볼 필요성을 느꼈을 뿐이야.”
“으음.”
딱히 거짓말을 하는 것 같지는 않았다. 게다가 이런 일로 거짓말을 할 이유도 없었고. 조조의 말이 사실이라면 축하를 해야 할 일이지, 만류할 일은 아니었다. 깨달음이란 불연 듯 찾아와 불현 듯 떠나는 법. 잡을 수 있을 때, 잡아야지 그렇지 못하면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는 것이 깨달음이었다.
“게다가 이 곳의 상황이 상황이니 말이야. 나 같은 사람은 사태가 진정될 때까지 몸을 피하는 게 최선이겠지.”
“축하를 해야 할지,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모르겠군.”
“의도치 않게 시기가 겹쳤을 뿐이야. 이번 사태가 없었어도 나는 이 곳을 떠났겠지. 너무 개의치 말게.”
“일이 마무리되면 최대한 빨리 돌아와 줬으면 좋겠군. 자네와 함께 하고 싶은 일이 있으니까 말이야.”
“기대하고 있지. 돌아왔을 때, 숟가락만 얹을 수 있기를 바라고 있을 테니까 말이야.”
며칠 뒤, 수도를 떠나 남서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제국에 올 때와 마찬가지로 오슬론을 통해 아우베스 왕국으로 향할 생각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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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조가 수도를 떠났다. 그러나 수도의 상황은 한낱 마법사의 존재유무에 영향을 받을 만큼 녹록하지 않았다. 누구의 출입에도 상관없이 황제의 장례식은 날씨가 좋은 날에도, 좋지 않은 날에도, 적당한 날에도 계속해서 이어졌다.
황자들은 자신이야말로 진심으로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음을 광고라도 하듯 서로 경쟁하듯 애도를 표했다. 그러나 제아무리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었던 황제의 장례식이라고는 하나 평생 동안 장례식을 이어갈 수는 없는 법. 시간이 지날수록 황제의 죽음보다 다음 황제는 누가 될 것인가에 대한 것으로 관심이 옮겨지고 있었다.
“3황자 전하께서는 어릴 때부터 그 능력을 입증해보이셨습니다. 이런 때야말로 3황자 전하와 같이 출중한 분께서 보위에 오르셔야 혼란스러운 정국을 가라앉힐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 폐하의 장남이신 1황자 전하께서 멀쩡히 살아계시거늘 그게 무슨 망발이오!”
“망발이라니, 황제 폐하께서 1황자 전하께 보위를 물려주고자 하셨다면 왜 일찍이 황태자의 자리를 비워두셨겠나!”
“굳이 그럴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지. 장자계승이라는 원칙을 자네들만 모른단 말인가!”
황제의 죽음으로 잠시 잦아들었던 귀족들은 다시금 편을 갈라 싸우기 시작했다. 칼만 들지 않았지, 이미 눈빛으로는 몇 번쯤은 죽고 죽이는 싸움이 벌어졌으리라. 그러나 이런 와중에 황실은 조용하기 짝이 없었다. 어른이라고 할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자연스레 두 명의 공작과 세 명의 후작들에게로 관심이 집중되었지만 아르센 공작은 3황자를 지지했으나 다른 공작은 직위만 공작일 뿐, 황제의 동생으로서 실권이 없었다. 또한 세 명의 후작들은 제 자리를 지키거나 영지에 틀어박혀 있었으니 이 사태가 쉬이 해결될 것 같지는 않았다.
‘다행이군.’
이번 사태는 내 생각 이상으로 복잡한 동시에 기묘하게 균형을 이루고 있었다. 누구 한 명이 압도적으로 치고 나갈 수 없도록. 차라리 황자들 중 한 명이 큰 공을 세웠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타이탄 프로젝트에 대해 섣불리 행동으로 옮기지 않은 건 현명한 선택이었다. 실질적인 결과물을 떠나 기묘하게 평온한 연못에 던져지는 돌멩이가 될 수도 있었으니까. 내전이 끝난 직후로 타이밍을 잡은 건 다시 한 번 생각해도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렇게 서로 기묘한 대치가 이어지던 와중 결국 누군가는 제일 먼저 칼을 뽑아들기 마련, 폭풍전야의 수도에 폭풍이 들이닥치는 때가 바로 지금이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3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