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2화 - >
“······.”
“······.”
잠시 침묵만이 흘렀다. 무슨 말을 해야 할까, 무슨 말을 해올까. 방심할 수는 없었다. 눈앞의 중년의 남성이 사람 좋은 미소를 짓고 있지만 어디까지나 외면일 뿐, 내부에는 사람 수십 명쯤은 가볍게 잡아먹은 뱀이 꽈리를 틀고 있었으니까.
이런 정치싸움에는 별로 경험이 없는 나조차도 알 수 있었다. 저 눈은 먹음직스러운 먹잇감을 바라보는 포식자의 눈빛이라고. 조금만 빈틈을 보여도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 거라고.
“그래서 왜 찾아오셨습니까? 초대하지도 않은 파티에 참여하시다니, 아르센 공작가의 이름이 그렇게 가볍다는 소리는 처음 듣습니다만.”
“내 진심을 몰라주다니 애석하군. 나는 연장자로서······.”
“말씀 돌리실 필요 없습니다. 어르신께서 단순히 축하만을 위해 찾아오지 않았다는 것은 네 살배기 제 조카도 알 수 있는 일일 테니까요.”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대놓고 치고 박는 싸움이라면 모를까, 이런 싸움에서 나는 그보다 훨씬 약자였다.
어릴 때부터 엘리트 교육을 받으며 커서는 아버지, 아르센 공작의 뒤를 쫓아 경험을 쌓았고 수많은 실전에서 단련된, 백전백승의 검투사라면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검을 잡아본, 영문도 모른 채 콜로세움으로 끌려와 상황파악조차 하지 못한 신입 검투사라 할 수 있었다.
명백한 실력의 차이. 보통의 상황이라면 승산을 논하는 것이 의미가 없으리라. 그러나 다행이라면 상대가 괴물이 아닌, 똑같이 검에 찔리면 괴로워하며 죽는 인간이라는 점. 그리고 내 손에는 무척이나 날카로운 한 자루 검이 들려있다는 점이었다.
또한 약자가 강자를 상대로 승리하는 법을 나는 알고 있었다. 강자가 예측하지 못한 무언가. 기습, 독, 전략, 각오 등등 뭐가 되었든 좋았다. 속칭 비대칭전력이라 불리는 무언가가 필요했다.
마지막으로 명심해야 할 것 하나, 위의 것을 바탕으로 우세를 점했다고 괜히 장기전으로 가는 것이 아닌 끝낼 수 있을 때 끝내는 것. 약자에게는 실수가 허용되지 않지만 강자에게는 시간만 있다면 실수를 만회할 수 있는 실력이 있으니까.
그렇기에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괜히 길게 끌고 가봤자 상대에게 유리한 전장에서 조금씩 갉아 먹힐 뿐이었다. 괜히 끌려가기 전에 빠르게 끝을 맺는 것이 옳았다.
“정말로 축하만 해주러 오신 것뿐이라면, 정말로 감사합니다. 하지만 아시다시피 오늘 저를 만나기 위해 기다리고 계신 분들이 많으니 이만 자리에서 일어나도 되겠습니까? ······라는 말이면 충분할 테지요.”
“허허. 젊은 친구가 성격도 급하군. 마탑에 틀어박혀 얼굴 한 번 내비치지 않기에 바깥일에는 관심조차 없는 줄 알았더니 그건 아닌 모양이로군.”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듯 움직이는 나를 보고서도 안색하나 변하지 않는다. 내 행동쯤이야 이미 예상 내에 있다는 혹은 돌발적인 변수가 등장하더라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으리라는 절대적인 실력에 대한 자신감.
이 느낌, 낯설지 않다. 지금까지 내가 만났던 사람들 중 단 두 명에게서 이런 느낌을 받을 수 있었으니까.
지크문드 지크 후작과 가델 프리드 탑주.
분야는 다르지만 그 둘에게서 느낄 수 있었던 느낌이 마커드에게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괜찮아. 결국 주도권은 내게 있다.’
욕심만 부리지 않으면 된다. 손에 쥐고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더 큰 것을 쥐고 싶다는 욕심에, 내 손을 피게 만들려는 감언이설에 넘어가 손을 피지만 않는다면 그가 내 손 안에 있는 것을 건들 방법은 없었다. 가족들이 권력에 욕심이 있다면 모를까, 아버지와 형에게는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였으니까.
“가족들을 꽤나 소중히 여기나보군. 차남으로서 그러기 쉽지 않았을 텐데 말이야.”
“순리에 따를 뿐입니다.”
“좋군. 좋아. 내 아들들도 자네 형제들처럼 우애가 있다면 좋을 텐데 말이야. 드라그닐 자작께서 자식 복은 제국 제일이시군.”
불편했다. 주제도 주제거니와 대화라는 행동 자체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왜, 목적을 두고 잘해주는 건 부담스러울 뿐이라고 하지 않던가.
서로 목적을 뻔히 아는 상황에서 얼굴에 가면을 쓴 채, 구밀복검하는 것은 나에게 맞지 않았다. 차라리 가설을 두고 하나의 이론으로서 받아들일 것이냐 마느냐를 둔 격렬한 찬반토론을 하는 편이 훨씬 적성에 맞았지. 최소한 서로 뒤통수칠 생각은 안 할 테니까.
물론 이 이야기의 결말이 서로가 윈윈하는 결말일지도 모른다. 3황자는 나를 통해 마법계의 지지를 얻고 나는 차후 막대한 지원을 받는 결말. 그렇게 될 확률도 높으면 높았지 결코 낮지 않았다.
맏이가 아니었기에 명분상에서는 1황자에게 밀릴지 몰라도 황제가 후계자를 정한 것이 아닌 이상 결정타는 되지 못했고 - 역대 황제들 중에서도 장자가 아닌 이들이 존재했다 - 3황자의 영향력이 강한 제국 남부는 제국 제일의 부를 자랑하는 지역이었으니까. 설사 내전이 벌어지더라도 마탑을 등에 업을 수 있다면 최후의 승자가 될 확률이 가장 높은 건 3황자이리라.
그러나 결국 이 모든 것은 확률의 문제다. 제 아무리 높은 확률도 100%는 될 수 없었고 1%라도 실패할 확률이 있는 이상 도박일 뿐이었다. 마지막으로 나는 나와 가족들의 안위를 판돈으로 올릴 생각이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자작께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최대의 효도를 해 볼 생각은 없나?”
“무슨 말씀이 하고 싶으신 겁니까?”
“드라그닐 백작가 그리고 자네가 영지를 받게 된다면 드라그닐이라는 성을 쓸 수는 없을 터이니 자네의 새로운 성을 딴 후작가. 두 아들이 힘을 합쳐 서부를 대표하는 가문이 된다면 자작께서도 기뻐하시지 않으시겠나?”
후작가와 백작가. 그 자리에 걸맞은 영지가 주어진다면 혈연으로 이루어진 두 가문은 마커드의 말처럼 서부를 대표하는 가문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었다. 더군다나 서부 지역의 귀족들은 3황자보다는 1황자를 지지하고 있었으니 계획대로 3황자가 황위에 오른다면 그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이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주인의 명을 충실하게 이행했으니 그 대가를 기다리고 있는 사냥개들에게 던져줄 고기는 충분하다 못해 넘치겠지. 굴러온 돌 정도는 웃으며 넘길 수 있을 정도로. 그러나
“기뻐하지 않으실 겁니다.”
내 답이 변할 일은 없었다.
“어르신.”
“일말의 고민조차 하지 않는군.”
“확실히 저는 어르신에 비하면 애송이일지도 모릅니다. 어르신의 눈에 저는 힘만 강한 어린아이로 보여도 이상하진 않겠지요. 그러나 이런 저도 거래의 기본이 무엇인지는 알고 있습니다.”
여전히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다. 그러나 상관없다. 반응을 보기 위한 말이 아니었으니. 지금의 말로 내 결정이 바뀔 일이 없다는 것을 그에게 재차 확인해줄 수 있으면 충분했으니.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내줘야 한다는 것.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주고 내게 필요한 것을 얻어낸다. 그것이 거래의 기본일진데 어찌 어르신께서는 필요하지 않은 것을 내어주며 필요한 것을 가져가려하십니까.”
거래란 상호간에 필요한 것이 있을 때 성립된다. 한 쪽이 일방적으로 원해서야 협박 혹은 구걸이 될 뿐, 그런 의미에서 나와 마커드 간에는 거래가 성립될 수 없었다. 마커드는 내게 원하는 것이 있지만 나는 그에게 원하는 것이 없었으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자네는 상인을 해도 되겠군. 크게 성장시키지는 못해도 괜한 헛짓거리로 상회를 말아먹지는 않겠어.”
“감사합니다.”
“자네 뜻이 그리도 확고하다면 어쩔 수 없지. 말을 물가에 데리고 갈 순 있어도 억지로 물을 먹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자네 뜻이 앞으로도 변칠 않길 바라지.”
그 말을 끝으로 마커드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대화가 끝나고 응접실을 나가는 그의 등을 바라보고 있을 때, 문이 채 닫히기 전 그 마지막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기억해두게. 하나를 얻기 위해서는 하나를 내어주어야 한다. 틀린 말은 아니나 결국 중수의 거래법이지. 고수의 거래는 아무것도 내어주지 않고 모든 것을 가져오는 법. 위에 선 자의 거래란 그런 것이라네.”
탁-
그 말을 끝으로 문이 닫혔지만 나는 한동안 문으로부터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날 설득할 생각도 없었으면서 말은.”
생각이 없진 않았을 것이다. 단지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수준이었을 뿐. 정말로 날 설득할 생각이었다면 이런 말도 안 되는 거래를 들고 오진 않았을 테니까.
#
‘혹시나 해서 찔러봤지만······.’
레닐의 예상처럼 마커드는 그다지 낭패한 얼굴이 아니었다. 그의 얼굴에 남아있는 것은 작은 아쉬움 뿐. 당연한 일이다. 그 누구도 혹시나 해서 구매한 복권이 당첨되지 않았다고 하여 낭패감을 느끼지 않는다. 초기 투자금이 적었던 만큼 실패했을 때의 리스크 또한 적었으니까.
‘그래도 여기까지 온 보람은 있었군.’
애초에 그는 레닐을 설득할 생각으로 필사적이진 않았다. 지금껏 말해왔던 것처럼 되면 좋고, 안 되면 말고. 그 이유는 간단했다. 레닐의 말처럼 거래가 성립하지 않으니까.
물론 그가 지금까지 하나를 주면 하나를 받는 식의 정당한 거래만을 해왔다면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형태의 거래가 가능한 때가 있고 가능한 사람이 있는 법.
막다른 동굴로 숨어든 고블린들이 바깥에 자신들이 연기를 참지 못하고 빠져나오는 걸 기다리고 있는 적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연기를 피해 밖으로 빠져나오는 건 그렇지 않으면 가만히 앉아서 죽을 거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굴 내에 출구가 있다면, 숨구멍이 있다면 적들이 기다리는 곳으로 빠져나오겠는가. 레닐의 상황이 그러했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면 제 풀에 지쳐 물러날 텐데 구태여 몸을 일으킬 이유가 없었다.
아쉽지 않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으나 어디로 튈지 모르는 공이 그 어디로도 튀지 않고 땅에 박혀있으리라는 것을 확인한 것만으로도 이번 걸음은 충분히 가치가 있었다.
‘차라리 누가 공을 건드려줬으면 좋겠군. 박힌 공을 빼내는 건 어렵지만 한 번 튀어 오른 공의 방향을 유도하는 것쯤은 어렵지 않으니.’
#
마커드가 응접실을 빠져나간 이후 나는 수많은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상대해야만 했다. 그건 형과 아버지도 마찬가지. 그러나 우리 부자는 수많은 불청객을 마주하면서도 단 한 번도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고 그들은 아쉬움을 삼키고 돌아가야만 했다.
그들 또한 감정이 상하지 않은 것은 아니겠으나 나와 척지는 행동을 하는 것은 경쟁자들을 도와주는 일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아군이 아니면 적이 되는 상황이 아니기도 했고.
“어찌저찌 넘긴 건가.”
은퇴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찾는 사람이 많았던 아버지도, 드라그닐 영지의 영주로서 책무를 다해야했던 형도, 이번 일의 원인이나 다름없는 나도 짧은 시간에 고생을 많이 했다. 그나마 그 고생들이 소용없는 짓이 아니었다는 것이 다행인 일이었다.
“고생하셨습니다.”
“후우. 그래. 네가 고생이 많다. 이제부터 어찌할 셈이냐?”
“준비가 되는대로 수도로 올라가겠습니다.”
“괜찮겠느냐? 차라리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영지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
“저들이 원하는 건 접니다. 제가 영지에 있다면 영지가 혼란스러워질 뿐이겠지요. 차라리 사건의 중심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할 겁니다.”
황제라고 하더라도 섣불리 마탑을 건드릴 순 없었다. 하물며 황태자도 되지 못한 황자들이 무엇을 할 수 있을까. 태풍의 눈이라고, 어설프게 피하려는 것보다는 사건의 중심에 있는 편이 더 안전하리라.
“네 선택이니 틀림없겠지. 하지만 너를 노리는 이들이 많으니 반드시 한 번 더 생각하고 움직이거라.”
내가 고향을 떠나 다시 수도로 올라오던 그 시각
“황제 폐하께서, 황제 폐하께서!”
“폐하께서 뭐 어찌되었다는 말이냐!”
수도의 상황도 지지부진한 눈치싸움을 끝낼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2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