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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71화 (71/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1화 - >

“다녀왔습니다!”

“도대체 네 녀석은 말도 없이 무슨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게냐!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녀석이 왜 그렇게 철이 없어!”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은 여전했다. 시간을 들여 자세히 바라본다면 바뀐 것이 없을 수가 없었지만 훑어보는 것만으로는 변화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또한 부모님도 내 생각보다 훨씬 정정하신 것 같아 다행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키지 못한 내 등에 시뻘건 자국이 생길 리 없었으니까.

“그래도 위험한 일은 얼추 끝냈습니다. 앞으로는 말없이 사라지는 일은 없을 거예요.”

“얼추?”

“그건 조금 있다가 다시 말씀드릴게요. 형님은요? 결혼식 준비로 바쁜가?”

저택은 곧 큰 행사가 있을 거라는 것을 광고라도 하듯 무척이나 분주했다. 사정을 모르는 이들도 하녀들이 쉴 틈 없이 돌아다니는 것을 보면 뭔가 일이 벌어질 예정이라고 느낄 정도로.

“영지를 책임지는 이가 되었으니 바쁘게 움직여야지. 위가 고생하면 아래가 편한 법이다.”

“······물려주셨어요?”

“그래. 늙은 내가 언제까지고 위에 있을 순 없는 노릇 아니냐. 이제는 아침에 일어나면 관절이 쑤시지 않는 날이 없을 정도니, 때 마침 네 동생의 결혼식 때문에 가문의 일원들이 모이는 만큼 정식으로 세습을 공표하기로 했다.”

별로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기도 했고. 인원이 적고 많음에 상관없이 누군가를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큰 스트레스를 유발하니까. 형님이 능력이 없다면 모를까, 이미 몇 년 동안이나 아버지의 업무를 보조하며, 대신하며 경험을 쌓아왔으니 큰 혼란은 없을 터. 아버지의 말씀처럼 건강을 위해서라도 옳은 판단이었다.

“······너에게는 미안하다는 말밖에 할 수가 없구나. 네가 참 많은 일을 했는데, 물려줄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서.”

“무슨 말씀이세요. 그 동안 제가 귀족으로서 권리를 누렸으니 응당 의무를 행했을 뿐인데, 그동안 누린 것들로 성공했으니 제 걱정은 마세요.”

괜히 장남을 제외한 차남, 삼남들이 기사나 마법사 등 전문직으로 빠지는 것이 아니다. 먹고 살 길은 스스로 찾아야 했으니까. 장자계승이라는 이름하에 장남이 아닌 자식들은 신분이 높을 뿐인 평민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서 나도 갑작스럽게 테라 방벽 행이 결정되기 이전에는 뭘 해야 할까라는 생각으로 방황을 했었으니까.

“그리고 이거 받으세요.”

“이게 무어냐?”

“열어보세요.”

포장된 상자로부터 구체에 가까운 진주가 포인트인 목걸이가 빛을 발했다. 사치라는 이유로 그 흔한 반지, 귀걸이 하나를 몸에 걸치시지 않으셨던 아버지이니만큼 꽤나 비싼 모습의 목걸이에 눈살을 찌푸리셨지만 이어진 설명으로 괜한 사치를 부렸다는 타박은 피할 수 있었다.

“그 동안 모은 돈으로 구입한 거니 걱정 마세요. 첫 선물이기도 하고, 돈이 고여 있기만 해서는 오히려 해가 되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건강에 도움이 되는 마법을 내장해두었으니 웬만해서는 몸에서 떨어트리지 마시고요. 어머니는 어디 계세요? 어머니한테 드릴 것도 있는데.”

폭풍같이 쏟아지는 말들. 동시에 자연스럽게 자리를 이탈했다. 말이 끝나면 괜히 한 마디 정도 하실 것 같아서. 돌아오자마자 듣는 말이, 꽤나 고심해서 고르고 노력해서 만든 선물에 대한 첫 마디가 타박뿐이라면 아쉽지 않겠는가.

그러나 점점 멀어지는 아버지가 등 뒤로 하신 말씀은 아쉬움을 털어내기에 충분했다.

“고맙구나. 소중히 간직하마.”

“별말씀을요.”

#

선물을 받으신 어머니는 무척이나 기뻐하셨다. 그러나 값진 선물에도 불구하고 잔소리만큼은 피할 수 없었다.

“이제 너만 가정을 이루면 소원이 없을 것 같구나.”

“좋은 관계를 이어가고 있는 사람은 없는 거니?”

“네 앞으로 중매쟁이들이 얼마나 많이 오는지, 관심 있는 여성이 있다면 어미에게만 살짝 귀띔해 보거라. 어떻게든 자리를 만들어 볼 테니.”

“이제 네 나이도 곧 서른이다. 언제까지고 이십 대의 팔팔한 청년일거라 생각하지 말거라.”

어머니는 마치 나의 결혼이 인생에 남은 마지막 숙원이라도 된 듯 달려드셨다. 어머니의 눈에는 모자랄 것 없는 아들이 네 살 차이나 나는 동생이 결혼을 할 때까지 깜깜무소식이라니. 외견에 문제가 있다면 모를까, 그런 것도 아니었으니까.

나는 생각하고 있다, 처리해야 할 일이 끝낸 만큼 노력해보겠다는 말에도 불구하고 꽤나 긴 시간동안 잔소리에 시달리고나 서야 자리를 벗어날 수 있었다. 이 곳에 올 때부터 어느 정도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언제나 그렇듯 실전은 혹독한 법이었다.

“왔냐?”

“바빠 보이는데 조금 있다가 올까?”

“얼추 끝났어. 거기 앉아서 조금만 기다려.”

하나의 영지를 책임지는 자리다. 수십만 명의 사람들을 책임지는 자리고. 그 자리에 앉아있는 사람에게 주어진 책무가 결코 가벼울 리 없었다.

그러나 보리스 드라그닐, 드라그닐 영지의 새로운 영주는 수월하게 업무를 해치우고 있었다. 수 년 간 쌓아온 경험 덕분일지, 오랜만에 마주하는 동생에게, 영지를 벗어나 제국에 이름을 떨친 동생에게 형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어서일지 혹은 다른 이유일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겠지만.

“부모님께서 걱정 많이 하셨다. 물론 나도 그랬고 이리엘도 마찬가지고.”

“해야만 하는 일이었어. 이전에도 말했잖아. 언제고 다시 테라 방벽으로 향할 거라고.”

“떠나기 전에 한 번 더 말했어야지. 그건 소식을 네 입이 아닌 오가는 상인들에게 듣는 게 말이 되는 소리야?”

대화는 간단한 타박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나를 걱정했다는 느낌을 받았으니까. 어디에서는 형제들끼리 서로 죽이네 살리네하는 판국에 서로를 걱정하는 정도의 우애라면 충분하지 않은가. 한 마디 사과로 짧은 타박을 마무리한 뒤, 이내 궁금했던 점을 묻기 시작했다.

“그런데 손님들은? 가문의 일원을 제외하고는 보질 못했는데.”

“안 불렀어. 일가친척들만 불러 모아 작게 열기로 했다.”

“역시 그것 때문에?”

“반쯤은 너 때문이기도 하고.”

“어쩌다보니 민폐만 끼치네.”

날짜도 미뤄버리고 축하를 해줄 손님까지 막아버렸다. 차라리 오지 않는 게 나았나 싶었지만 내가 없더라도 결정은 달라지지 않았을 터였다. 형은 반쯤은 나 때문에 내린 결정이라고 말했지만 역으로 내 덕분에 내릴 수 있었던 결정이기도 했으니까.

힘없는 자의 중립은 공허할 뿐, 중립이라는 단어를 외치기 위해서 힘은 필수였다. 그리고 나라는 존재는 드라그닐 영지가 중립을 외치기에 충분한 힘이었다. 동시에 그 힘을 얻기 위해 달려드는 이들도 있었지만 섣불리 움직이지 못하게 만드는 억지력만으로도 그걸 만회하기에는 충분했다.

아마 내가 없었다면 둘 중 하나였을 것이다. 결혼식이 아예 열리지 않았거나 정작 주인공들이 주목받지 못하거나.

그런 의미에서 이 작은 결혼식은 두 가지 의미가 있었다. 순수하게 주인공들을 축하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섣불리 다른 이들과 접촉하지 않겠다는 것.

나로서는 다행인 일이었다. 아무래도 가족들이 연관되기 시작하면 중립을 지키며 흘러가는 상황을 바라보겠다는 목표를 이루기 어려웠을 테니까.

“매제 될 사람은 누구야? 혹여나······.”

“그런 건 아니야. 아버지와 내가 충분히 심사숙고한 끝에 허락한 사람이니까.”

고향이, 가족들이 괜한 분란에 휘말리지 않았다는 것을, 않겠다는 의지를 확인한 나는 슬슬 외부로 보내던 시선을 내부로 돌렸다. 동생의 결혼은 축하할만한 일이지만 불안함이 없지는 않았기에.

평범한 시골 영지였던 드라그닐 남작가는 더 이상 없다. 내가 고향을 떠났던 때로부터 십 년이 지난 지금 마정석을 통해 적지 않은 돈을 벌어들이며 차기 마탑주로서 유력한 후보를 배출한, 떠오르는 해와도 같은 드라그닐 자작가가 있을 뿐이었다.

어머니께서는 나를 향해 중매가 수도 없이 들어왔다고 말씀하셨지만 나를 향해서만 들어올 리가 없었다. 다행히 형은 좋은 사람과 결혼했지만 이리엘도 그럴지는 모르는 일. 맑은 물에 미꾸라지 한 마리 들어오는 것이 아닌가라는 걱정이 있었지만 아버지와 형이 좋은 평가를 내렸다면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러고 있을 게 아니라 너도 한 번 만나보는 게 어떠냐? 나와 아버지가 보지 못했던 걸 너라면 볼 수도 있을 테니.”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제 와서 뭔가를 바꾸긴 힘들겠지만, 형님 될 사람으로서 매제의 얼굴 정도는 봐둬야겠지.”

다행히 매제 될 청년은 평범했다. 가문을 오랫동안 섬겨온 기사의 딸과 결혼한 형과 비슷하게 매제 또한 드라그닐 영지에서 성장한 기사였다. 몇 대를 이어 드라그닐 영지에서 살아왔으니 수상한 점도 없었고 외모와 성격 모두 모난 점 없이 괜찮았다.

물론 사람의 진면목을 보려면 권력을 줘보라는 말처럼 한낱 유망한 기사에서 영주의 매제가 되었으니 성실하고 순수한 청년이 어떻게 변할지는 지켜봐야겠지만 그런 사람들을 수도 없이 만난 사람이 아버지와 형이었다. 하나뿐인 딸의, 여동생의 반려자가 될 사람을 평가하는 일을 허투루 하지는 않았으리라.

그렇게 별 일 없이 시간이 흘러 내일, 내일이면 내가 고향으로 내려온 목적을 달성할 수 있었다. 부디 내일까지만 아무 일 없이 무사히 지나가기를 원했지만 어딜 가나 눈치 없는 이들은 있기 마련이었다.

“정말 축하드립니다. 아주 잘 어울리는 한 쌍이로군요.”

초대하지 않은 손님들이 파티에 들이닥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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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가 우려했던, 형이 우려했고 내가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도대체 어디서 소식을 주워듣고 초대하지도 않은 파티에 참석을 했는지, 그러나 그들을 돌려보낼 수는 없었다.

제아무리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고는 하나 축하를 하기 위해 먼 길을 온 손님을 돌려보냈다가는 좋은 소리를 듣기 힘들었으니까. 그들이 정말 축하를 위해서, 초대도 받지 않은 주제에 손님이라는 칭호로 불릴 수 있는 지는 둘째치고서라도.

게다가 드라그닐 자작가가 새벽에 떠오르는 태양이라면 그들 한 명 한 명은 이미 정오에 가장 높이 떠오른 태양. 물론 이번 사건이 끝나면 대부분은 빛을 잃을 테지만 현재로서는 그들이 제국의 중추라는 사실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런 이들을 푸대접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생각인지까지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식 자체는 성공적으로 끝을 맺었다. 예상보다 조금 더 분주하고 정신없었으며 산만했지만 적어도 주인공이 뒤바뀌지는 않았으니까. 그 과정에서 나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모든 일정이 끝난 지금, 나는 초대받지 않은 손님들을 마주하고 있었다. 평소라면 무슨 핑계를 대서라도 만남을 거절했겠지만 지금만큼은 어쩔 수 없었다. 적당히 잘 넘어갈 수밖에. 물론 일평생을 가면을 쓰고 복마전에서 살아온 이들을 상대하는 일이 쉽지는 않겠지만.

“초대하지도 않았는데 이리 먼 곳까지 오셔서 축하를 해주시다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많은 사람들의 축복과 함께 새로운 출발을 할 수 있게 되었으니 동생도 무척이나 기뻐할 겁니다.”

“하하. 아르센 가의 일원으로서 남부 귀족의 행사에 참여하는 건 당연한 일이지.”

웃기는 소리다. 드라그닐 영지가 제국의 남서쪽에 위치해있다지만 굳이 따지자면 서부라고 말하는 것이 옳았으니까. 게다가 영주의 결혼식이라면 모를까, 한낱 방계의 결혼식에 참석할 만큼 아르센이라는 성의 무게는 가볍지 않았다.

마커드 아르센.

이제는 일선에서 한 발자국 물러난 아르센 공작을 대신하여 아르센 가를 이끌고 있는 이가 내가 처음으로 맞이한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1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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