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0화 - >
하나뿐인 여동생의 한 번뿐인 결혼식. 축복만이 있어야할 결혼식을 나로 인해 의도치 않게 미뤄버린 이상, 그에 대한 책임은 확실하게 질 생각이었다.
‘뭐가 좋을까.’
가장 무난한 건 역시 장신구겠지. 기본적으로 선물이라는 목적에 부합하며 조금만 손을 보면 이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선물로 재탄생시킬 수 있으니까.
반지는 어떨까. 별로 좋은 선택은 아닌 것 같다. 제 아무리 화려한 반지라도 열 손가락에 끼운다면 거추장스럽고 졸부처럼 보일 뿐, 왼손에 끼울 반지 정도는 매제 될 사람이 어련히 잘 구해놨겠지.
그렇다면 목걸이는 어떨까. 나쁘진 않을 것이다. 물론 여러 개를 착용하면 졸부처럼 보이는 건 똑같지만 무언가 의미가 담겨있어 하나만 착용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같은 맥락에서 귀걸이도 나쁘진 않겠지.
“하지만 이제 와서 주문을 할 수는 없으니······.”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외형마저도 하나뿐인 선물을 줄 수는 없다는 점. 지금부터 출발해도 여유가 없는 마당에 물건이 완성되기를 기다릴 시간이 있을 리 만무했다.
정 마음에 드는 물건이 없다면 다른 방법을 강구해야겠지만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이 곳은 제국의 수도. 제국의 중심이자 화려함과 찬란함으로 치장된 도시다. 고작해야 마법사 한 명의 심미안을 만족시키지 못 할 리가 없었다. 물론 선물을 받는 사람은 내가 아닌 동생이니만큼 무턱대고 골라서는 안 되겠지만.
‘그래도 싫어하진 않겠지. 선물은 정성이 제일 중요하다는 말도 있고······.’
그렇게 마탑을 빠져나가 장인들이 존재하는 거리로 향하려던 그 때, 낯익은 얼굴임과 동시에 이번 일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은 사람을 마주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영애. 저를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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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그니 지크.
그녀와 마지막으로 얼굴을 마주했던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그녀에게 황제를 설득하라고 조언을 했던 것이 마지막이었던가? 그렇다면 근 칠 년은 더 된 것 같다.
사실 그녀를 찾아갈 기회는 몇 번이고 있었다. 한 번쯤 찾아와달라는 말을 들었으니 명분도 있었고. 대표적으로 조조와 여행을 다닐 때, 제국 동부에서 여행을 끝마치고 수도로 되돌아가는 과정에서 지크 영지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이미 다 들킨 정체를 숨겨보겠다고 일부로 지크 영지를 우회하는 바람에 기회는 허무하게 사라지고 말았지만.
“······레닐 공자?”
“예. 건강하신 것 같아 다행이군요.”
그녀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내 이름을 불렀다. 그녀와 헤어진 뒤, 고생을 심하게 하긴 했으니까. 이십대 초반이면 한참 성장할 시기 아니겠는가. 단번에 떠올리지 못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무려 몇 년 만에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지 않는가.
그나저나 스물여덟이나 되어서 공자 소리를 듣다니 어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 곳의 사람들은 대부분 대제자라는 호칭으로 나를 불렀으니까. 아직까지 그녀의 머릿속에서 이십대 초반의, 대제자가 되기 이전의 내가 남아있다는 증거이리라.
“아니, 이제는 대제자님이라고 불러들여야 할까요?”
“편하신 대로 하십시오. 호칭이야 알아들을 수만 있으면 되는 일 아니겠습니까.”
눈앞에 마주한 그녀는 내 기억속보다 조금 더 성숙했고 차분했으며 아름다웠다. 물론 이전에도 그러했으나 비교적 그렇다는 이야기. 그럼에도 분위기만큼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이 곳에는 무슨 일이십니까? 아니, 시간이 괜찮으시다면 잠시 자리를 옮겨도 되겠습니까?”
이야기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사람들의 시선이 하나둘씩 집중되기 시작했다. 나는 마탑주의 제자로서 최소한 마탑 내에서라면 어딜 가더라도 시선을 끌 수밖에 없었고 그녀의 얼굴은 이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미모가 아니었으니.
여성 마법사들 중에서도 그녀보다는 덜하더라도 아름다운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제 아무리 아름다운 미모도 삼일밤낮으로 철야를 계속하고 골치 아픈 일로 스트레스를 받다보면 빛이 바라는 법이다.
마력을 다루니만큼 보통 사람들보다 피로의 상한선과 회복 속도는 빠르지만 또 대부분의 마법사들이 체력 단련은 게을리하는 만큼 빨리 지치곤 했다.
물론 마법사답게 조금만 신경 쓴다면 청결 정도는 유지할 수 있고 육체적인 피로도 어느 정도는 해결할 수 있지만 정신적인 피로는 마법으로도 해결이 어려웠으니까. 애초에 마법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마력과 함께 정신력도 필요한 만큼 마법으로 정신력을 회복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안내를 부탁드릴게요.”
그녀도 집중되는 시선이 썩 반갑지만은 않았는지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고 우리는 남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작은 응접실에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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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그렇게 된 일이었군요.”
그녀와의 대화는 짧았지만 궁금증을 해결하기에는 충분했다. 왜 지크 영지를 떠나 수도에 와있는지, 수도에서도 마탑에서 나와 마주했는지.
“테라 방벽에서 돌아오신지 얼마 되지 않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예. 테라 방벽을 떠나 곧바로 수도로 돌아왔으니까요.”
“아버님께서는 괜찮으시던가요? 편지로는 쓸데없는 걱정하지 말라고 하셨지만······.”
그녀가 걱정스럽다는 듯 물었다. 황제는 지크 후작에게 평생을 믿고 따랐던 주군이자 신뢰할 수 있는 동료, 하나뿐인 동반자라고도 할 수 있는 존재였으니까. 그런 황제가 의식을 잃고 쓰러져 죽을 날만을 기다리고 있는 지금, 제 아무리 지크 후작이라고는 하나 아무렇지 않을 수는 없겠지.
“괜찮······으셨던 것 같습니다. 적어도 제가 느끼기에는 나름대로 마음의 준비를 마치신 것 같았습니다만.”
“그런가요.”
그나마 다행이라는 듯 시그니가 작게 안도 섞인 한숨을 내쉬었다. 그 날 이후, 이전과는 다르게 안부를 묻는 편지는 자주 오가는 것 같았지만 얼굴을 보는 것은 여전히 힘든 일이었기에. 직접 마주한 이로부터 괜찮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으니 보다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지크 후작가라고 해서 권력으로부터 초월한 것은 아니니까.’
지금의 제국은 한 마디로 과도기였다. 무슨 일이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지크 후작가 또한 큰 성세를 자랑했으나 어디까지나 현 황제인 다리우스 3세 시대의 이야기. 다음 황제 때는 어떤 일이 벌어져도 이상할 건 없었다. 물론 지크 후작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어지간한 명분으로는 어림도 없는 일이겠지만.
그렇기에 그녀가 이 곳에 있었다. 복마전과도 같은 이 곳의 상황을 빠르게 파악하고 알려주기 위해서. 그러는 김에 평소에 관심 있었던 마법에 조금 더 몰두했고 자료를 찾기 위해 마탑에 방문했을 때, 나와 마주했다는 이야기였다.
‘아마 아직까지는 누구의 손도 들어주지 않았겠지.’
지크 후작은 철저한 황제의 편이었다. 그런 황제가 후계자를 직접 지명하지 않은 지금,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시구르드가 지크 후작으로부터 영지를 이어받았다지만 지크 후작의 뜻을 거역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일 테니까.
‘괜한 분란에 휘말리지 않기를.’
이대로 황제가 죽는다면 아무런 문제도 없을 것이다. 물론 실제로는 꽤나 심각한 상황이었고 최악의 경우에는 제국이 쪼개져 내전에 접어들 수도 있겠지만 나와 같이 힘을 가지고 중립을 유지하는 이들은 비교적 평온하게 이 진흙탕에서 벗어날 수 있으리라.
다른 선택지가 많이 남아있는 상황에서 괜한 강요를 했다가 다른 사람의 편에 붙는다면 낭패도 그런 낭패가 없을 테니까.
그러나 황제가 잠깐이라도 일어나 후계자를 지목한다면 지크 후작은 그에 따르리라. 후계자가 누구이던 간에, 설령 패배가 불 보듯 뻔하더라도. 황제의 명령이었으니까. 그것이 지금까지 지크 후작이 살아온 방식이었다.
‘내가 어찌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그 뒤로 나와 영애는 시시콜콜한 이야기들로 대화를 이어나갔다. 의도적으로 무거운 이야기는 피하면서. 그렇게 이야기가 종막을 향해 달려갈 때쯤, 나는 본격적인 본론을 꺼내들었다.
“혹시 이후에 따로 예정이 있으십니까?”
“그런 건 아닙니다만······.”
“혹시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저를 도와주실 수 있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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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은 각각 의미를 가지고 있어요. 선물이라면 물건을 고르실 때, 참고하셔야 할 거예요.”
“결혼식 선물이라면 에메랄드 쪽이 더 좋을 거예요. 본인의 결혼식이라면 가넷이나 루비도 좋겠지만 가족으로서 행복을 빌어주는 거니까요.”
“건강을 기원한다면 이건 어떤가요? 예로부터 진주는 건강, 장수를 의미했으니까요. 마음에 들지 않으신다면 아쿠아마린도 괜찮겠죠.”
선뜻 내 부탁을 들어준 그녀의 도움에 힘입어 여동생의 선물할 목걸이를 구매할 수 있었다. 추가로 가족들에게 선물할 장신구까지. 아버지께서는 괜한 사치일 뿐이라며 한 마디 정도는 하시겠지만 오랜만에 만나는 아들의 선물을 거절하진 않으실 것이다.
“감사합니다. 저 혼자 왔다면 꽤나 고생했을 겁니다.”
“별 말씀을요.”
그런 티를 거의 내진 않았지만 그녀는 제국에서도 손꼽히는 가문의 영애였다. 물론 여타 귀족들과 달리 사치를 부리는 성격은 아니었지만 눈 자체가 낮을 리는 없었다.
“여동생 분께도 결혼 정말 축하드린다고 전해주세요. 마음 같아서는 직접 축하드리고 싶지만 장기간 움직일 수 있는 몸이 아니라서······.”
“꼭 전해드리겠습니다. 나중에 도움이 필요하신 일이 있으시면 저를 찾아와주십시오.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반드시 돕겠습니다.”
“말씀만으로도 감사하네요.”
잠깐의 동행이 끝나고 저택까지 그녀를 에스코트한 뒤, 다시 마탑으로 돌아왔다. 준비된 도구를 챙겨 다시 마탑을 빠져나온 나는 마찬가지로 준비되어있던 마차에 탑승했다.
시간이 있다면 이 곳에서 제작을 하던지 도착한 뒤에 제작을 하겠지만 안타깝게도 그 정도 여유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기에 이동하는 시간을 활용할 계획이었다. 복잡한 마법을 새겨 넣을 것은 아니었기에 굳이 각을 잡고 작업에 몰두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 가장 큰 이유였지만.
‘무슨 효과를 넣을까.’
부모님께 드릴 장신구에 새겨 넣을 각인과 마법은 정해두었다. 부모님의 나이도 이제 결코 적지 않으셨으니까. 지금의 황제처럼 언제 쓰러지셔도 이상하지 않으셨다.
무병(無病), 장수(長壽).
그런 만큼 건강하면 떠오르는 의미를 새겨 넣었다. 더불어 보석에 용혈을 머금게 함으로서 반영구적인 동력과 삿된 기운이 침범하지 못하게끔 했다.
형님에게는 피로회복과 정신안정에 관한 마법이 좋을 것이다. 영지의 일을 해결하다보면 스트레스 받을 일이 많을 테니까. 형수님은 조금 더 고민을 해봐야겠고 조카는 한참 성장할 시기이니 그에 관련된 효과를 넣으면 좋겠지. 마지막으로 동생과 매제에게는 어떤 효과가 가장 어울릴까.
다그닥- 다그닥-
그렇게 생각에 휩싸여 고민하는 와중에도 마차를 이끄는 말들은 계속해서 발을 굴렸고 마차는 앞으로 나아갔다. 조금씩 고향에 가까워지고 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70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