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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69화 (69/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9화 - >

“그리고 오늘부터 네가 할 일들을 말해줄 테니 두 귀 활짝 열고 들을 수 있도록.”

그 후로 잠시 시간을 끌었다. 내가 무슨 말을 할지, 앞으로 자신이 무슨 일을 하게 될지 동시에 위대한 진보의 첫걸음은 과연 무엇일지, 아르민은 기대와 긴장으로 몸을 굳힌 채 벌어질 내 입에 시선을 집중했다. 그러나 내가 이어서 할 말은 아르민이 기대하고 있는 것과는 사뭇 다를 터였다.

“앞으로 네가 해야 할 건 공부다.”

“공부······입니까?”

“이 곳에 풋내기는 없다. 그런 만큼 네가 이 곳에서 연구를 이어가고자 한다면 최소한 풋내기 티는 벗어야겠지. 안 그래?”

현재의 아르민은 마탑의 마법사들에 비해 많은 면에서 부족했다. 마법사들 중 엘리트 혹은 엘리트가 될 재능이 있는 이들이 모여 앞서나간 엘리트들에게 교육을 받는 만큼 어쩔 수 없는 차이였으나 아르민이 마탑에 들어온 이상 어쩔 수 없다고 넘어갈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작게는 아르민이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것에서부터 크게는 스승님의 얼굴에 먹칠을 하는 일이었으니까. 더불어 앞으로의 미래를 위해서도 아르민 개인의 성장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처음부터 뭔가 대단한 일이라도 맡게 될 줄 알았는지 공부를 하라는 나의 말에 아르민은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래서 헛된 꿈을 꾸는 아르민에게 현실을 가르쳐주고자 했다.

“재차 말하지만 네 타이탄 프로젝트에는 허점이 많아. 그렇다고 해결책이 있는 것도 아니지. 다른 이들이 본다면 망상과 공상의 집합체라고 폄하해도 이상한 일은 아닐 거다.”

“대제자님께서 보완을 해주신다면······.”

“그렇다면 너를 여기에 데리고 오지도 않았겠지.”

움찔-

차가워진 목소리에 아르민이 움찔했다. 말 그대로다. 아르민의 말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연구를 진행할 것이라면 뭐 하러 아르민을 데려오겠는가.

내가 그를 데리고 온 이유는 남들이 NO라고 외칠 때, YES라고 외칠 수 있는 용기와 한 번 걷기 시작한 길을 주변에서 아니라고 말해도 계속해서 걸어가는 추진력, 남들이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시야가 아르민에게 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재에 안주하길 원한다면 그를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제아무리 넓은 시야와 추진력을 가지고 있어도 기본적인 체급이 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었으니까. 남들은 생각해보지 못한 방법, 시도하지 않을 방법과 열정으로 200%의 효율을 낼 수 있으면 뭣하겠는가, 앞서나간 이들은 기본적으로 200, 300%의 일을 하고 있는데.

“그 따위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을 거라면 당장 테라 방벽으로 돌아가. 네가 없어도 타이탄을 연구하는 데는 아무런 문제도 없으니까.”

“아,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언제부터, 어디로 찾아뵈면 되겠습니까?”

“언제부터, 어디로 찾아뵙냐니. 그건 이제부터 네가 선택해야지.”

“예?”

대화를 이어가다보니 어떤 이유인지 대화가 평행선을 달리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동시에 그 이유까지도.

“너 설마 내가 직접 너를 가르쳐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니겠지.”

“아니었습니까?!”

내 말에 어떻게 그럴 수 있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경악에 가까운 말을 내뱉는 아르민. 그제야 나는 왜 지금까지 아르민이 그런 태도를 보였는지, 쉼터에서 귀족들을 상대로 그런 태도를 보일 수 있었는지를 알 수 있었다.

나는 그를 연구원으로서 데려왔지만 그는 내가 자신을 반쯤은 제자로 데려왔다고 생각했기에. 그렇기에 지금까지 헛된 망상이라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고집해온 것과 달리 화를 참지 못했고 내가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말에 실망을 감추지 못하는 것일 터.

“당연히 아니지. 몇 번이나 말했을 텐데? 네 재능은 특별하지 않다고. 타이탄 프로젝트의 가치를 높게 평가했을 뿐이라고.”

물론 내가 그를 가르칠 수도 있었다. 어린 나이에 높은 경지를 이뤘다고 하여 기본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한 때는 바닥에 있었던 만큼 태생부터 천재들보다 더 잘 가르칠 자신도 있었다.

‘하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제자가 특별하다면 스승도 특별해야 한다. 그러는 편이 제자에게도 스승에게도 이로우니까. 그러나 스승이 특별한데 제자가 평범하면 가르침을 이해하지 못하며 스승이 평범한데 제자가 특별하면 금방 바닥이 드러난다. 물론 평범하면 평범한 대로, 특별하면 특별한대로 잘 가르칠 자신이 있었지만.

‘효율이 안 좋으니까.’

아르민을 가르칠 사람이 없다거나 내가 할 일이 없다면 모를까, 마탑에는 젊은 마법사를 가르치는 교수들도 있었고 내 손길을 기다리는 일들도 산더미처럼 쌓여있었다. 굳이 내가 아르민을 맡아서 가르칠 이유가 없었다.

“또한 내가 허락할 때까지 타이탄 프로젝트에 대해 언급하는 걸 금한다. 내 말이 무슨 뜻인지는 잘 알거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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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오십시오. 형님.”

“형님이라니 말씀을 낮춰주십시오. 황자 전하께서는 장차 이 나라의 지존이 되실 분이 아니십니까.”

황위를 노리는 수많은 황자들. 그들 모두가 제각각 희망을 가지고 있었지만 객관적으로, 현실적으로 봤을 때 나머지 황자들은 세 명의 황자들을 넘어서기 힘들었다. 같은 어머니를 둔 동생이거나 외가의 힘이 비교적 약하거나, 본인에게 별다른 영향력이 없거나.

다양한 이유들이 있었지만 각각 1황자, 2황자, 3황자. 서로 다른 어머니를 둔 세 명의 황자들이야말로 이 경쟁의 선두주자들이자 서로에게 가장 큰 위협이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앞서 나가있는 주자는 장자계승이라는 시대의 흐름을 순풍으로 받아들이는 1황자였으나 그를 맹렬하게 추격하고 있는 혹은 앞서 나가있다고 평가받는 이가 있었으니 바로 3황자였다.

황제의 세 번째 처. 그녀에게는 장남이라고 하나 전체로 보자면 황제의 세 번째 아들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런 3황자가 1황자를 넘어서 유력 후보로 꼽히는 이유는 그의 장인이 남부의 대귀족, 아르센 공작이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그의 외가가 제국 동부에서 힘깨나 쓴다는 가문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다른 황자들의 배경 또한 만만치는 않다지만 3황자에 비할 바는 되지 못했다.

“제 위로 형님이 두 분이나 계시고 아버지께서도 금방 일어나실 텐데, 어찌 제가 함부로 황위를 입에 올리겠습니까.”

“그렇군요. 제 실언이었습니다.”

그러나 3황자도 알고 마커드 아르센도 알았으며 이 자리에는 없더라도 소문 좀 들었다싶은 귀족들이라면 모두가 알고 있었다. 황제는 두 번 다시 일어나지 못할 것이며 그의 아들들은 황제보다 황제가 앉아있던 자리에 더 관심이 많았고 그의 신하들 또한 황제가 쾌차하는 것보다 죽은 이후의 일에 더 신경 쓰고 있다는 것을.

“그건 그렇고 무슨 일입니까?”

“알려드릴 소식이 있습니다. 알 수 없는 이유로 북부로 떠났던 마탑주의 대제자가 돌아왔다고 합니다.”

“······대제자라면 레닐 드라그닐?”

“예.”

최근 십 년 간 가장 위상이 크게 변한 사람을 한 명만 꼽으라면 단연 레닐이었다. 십 년 전에는 배경이 별 볼일 없어 모두가 기피하는 테라 방벽으로 끌려갔던,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고 역사서에 단 한 줄의 글귀도 적히지 못할 마법사였으나 십 년이 지난 지금은 사정이 달랐다.

서른이 되기도 전에 마도의 칭호를 단 마법사임과 동시에 현 마탑주의 유일한 제자였다. 또한 그 뒤를 이을 가장 유력한 마법사임과 동시에 차세대를 대표하는 마법사였으니 제국의 그 누구도 함부로 레닐을 대할 수는 없었다.

그 이름이 마커드의 입에서 흘러나오자 3황자 또한 가벼이 흘러 넘길 수 없었다. 존재 자체만으로도 이번 경쟁에 변수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변수라는 것은 득이 될지 실이 될지 쉬이 예측할 수 없기에 변수. 그 영향력이 크면 클수록 조심할 수밖에 없었다.

“오자마자 홀로 마탑주를 만났다고 합니다. 그 뒤로 마탑주의 부관에게 찾아갔다고하니 필시 수도의 상황에 대해 이야기가 오갔을 겁니다.”

“마탑주는 이번 일에 중립을 지키기로 하지 않았습니까. 마탑주와 제자 사이가 꽤나 좋다고 들었는데, 제자에게도 똑같은 행동을 취하라하지 않았겠습니까? 지금까지 몇 번이고 접촉을 하려 했지만 마탑주와 제자 모두 연구를 핑계로 접촉을 피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만.”

“황자 전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그들이 굳이 이 진흙탕과도 같은 판에 끼어들 이유는 없지요. 하지만 만약이란 언제 어디서 튀어나와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만약의 상황이 벌어지는 것을 잠자코 지켜보기에는 리스크가 너무 크지요.”

3황자 세력만의 이야기는 아니었다. 황위에 욕심을 내고 있는 모든 이들이 마탑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변수였기에.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은 이후로, 누구 한 명을 후계자로 지명하지 않은 뒤로 많은 이들이 황자들을 중심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지금에 와서는 제국에 존재하는 거의 대부분의 귀족들의 세력이 갈렸을 정도로. 그렇기에 아직까지도 중립을 고수하고 있는 마탑주, 가델에게 시선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마탑. 단순히 이야기하자면 제국의 마법사들이 소속된 단체, 협회에 지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에게 돈을 주고 기회를 주는 것은 영주들이었으니까. 이 점에서는 기사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러나 조금만 더 자세히 파고들면 큰 차이가 있었다.

기사들에게 영주가 주군이라면 마법사들에게는 고용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그들에게는 소속 영주의 움직임보다 마탑주의 의향이 더 중요하다는 것. 최악의 경우 내전까지도 각오해야 하는 이들에게 마법사들이 등을 돌린다는 건 상상만으로도 끔찍한 일임에는 분명했다.

“방법이 있습니까? 지금까지 만나고 싶지 않아서 못 만난 것은 아닐 텐데요.”

사정이 그렇다보니 많은 이들이 레닐과 만나 말 한 마디를 나누기를 원했다. 지금 시점에서 유일하게 남은, 현재의 판도를 뒤흔들 수 있는 변수였으니까. 그 변수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든다면 최고의 상수가, 경쟁자들에게는 최악의 하수가 될 테니까.

“듣자하니 그의 여동생이 결혼을 앞두고 있다고 합니다. 그의 행방을 알 수 없어 미루었다지만 그가 돌아온 이상 더 미루지는 않을 테고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라고 하더라도 축하를 하러 온 손님을 문전박대하지도 않을 겁니다.”

물론 비슷한 대화를 이 둘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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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또 한 소리 듣겠는데.”

아르민은 내 말을 듣고서는 실망을 한 것인지, 현실을 깨달은 것인지 조용히 공부에 집중했다. 그게 자신을 위한 최고의 선택이라는 걸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을 것이다. 동시에 나도 내 등을 지킬 최고의 선택지를 생각해야 했다. 내 손에는 하루빨리 고향으로 되돌아오라는 부모님의 편지가 들려있었으니까.

“하기야 좀 많이 싸돌아다니긴 했지.”

최근 십 년 간 고향에서 보낸 시간은 몇 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별다른 설명도 없이 테라 방벽, 그 너머의 사지로 향했으니 가족들이 얼마나 걱정을 했을 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게다가 나 때문에 하나뿐인 여동생의 한 번뿐인 결혼식을 미뤄왔으니 원망을 듣기 싫다면 제대로 된 선물 하나 정도는 마련해야 할 듯싶었다.

“형은 옛적에 갔고 동생도 곧 가고······. 어쩌다보니 나만 남았군.”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9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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