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8화 - >
에반.
그와의 인연은 마정석 광산을 채굴하기 위해 그가 테라 방벽으로 왔을 때, 시작되었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여러 사정들로 인해 서로의 행선지가 뒤바뀌며 마탑주의 제자와 부관이라는 관계 치고는 두터운 인연은 아니었으나 그 말이 서로에게 악감정이 있다는 뜻은 아니었다.
“먼저 벽을 뛰어넘으신 것, 축하드립니다. 너무 인사가 늦은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하하, 감사합니다.”
오히려 그 반대에 가까웠다. 서로에게 크기에 상관없이 은을 느끼고 있었기에, 나의 경우에는 아직 내가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마법사였던 시절, 가문이 엮여있던 마정석의 분배에 관한 갈등을 평화롭게 잘 해결한 것에 대한 감사함을.
에반의 경우에는.
“평생 이 벽을 넘지 못할 줄 알았는데, 마도의 칭호를 받게 된 건 대제자 덕분이 컸습니다.”
“제가 뭐 한 것이 있겠습니까. 부관께서 노력하신 덕분이지요.”
“그것도 없잖아 있겠지마는, 제가 한 말은 결코 빈말이 아닙니다.”
평생의 숙원이었던 6서클이라는 경지에 오르는 것에 도움을 받았기에.
“사실 저는 한계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몇 년이 지났음에도 단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으니까요. 아마 특별한 계기가 없었다면 지금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었을 겁니다. 제가 한 노력들도 잘못된 노력에 불과했겠지요.”
과정과 결과. 마법사들 중 대부분은 결과보다는 과정을 더 중시했다. 단순히 결과를 얻어내는 것이 아니라 결과까지 나아가는 과정을 통해 본인의 성장을 이루어내는 것이 목적이기 때문에.
그러나 때론 과정보다 결과가 더 중요할 때가 있는 법. 우연의 일치로 결과를 얻어냈다고 하더라도 한 번이라도 성공했다면 우연으로 이루어진 과정을 체계적으로 다듬는 것이 가능할 테니까. 에반의 경우가 그러했다.
“테라 방벽에서 알게 됐습니다. 그 동안의 노력이 헛된 것은 아니었으나 잘못된 노력이었다고. 나아가기 위한 노력이 아닌 물러서지 않기 위한 발악이었다는 것을요.
그 때, 저에게 필요했던 건 획기적인 발상이나 높은 수준의 연구가 아니었습니다. 온 몸의 마력을 쥐어짜는 수준의 혹독한 전투의 연속. 예. 마법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수련을 등한시 했으니 퇴보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었지요.”
“부관 역할에 충실하셨으니까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만약 대제자께서 마정석 광산을 찾아내지 못했다면 제가 테라 방벽으로 향할 일도 없었을 겁니다. 동시에 뭐가 잘못됐는지도 모른 채, 보답 받지 못하는 노력 속에서 좌절했겠지요. 제 한계는 여기까지라고, 이 이상은 저에게 허락되지 않은 경지라고. 물론 대제자께서 의도하신 바는 아니겠지만 도움을 받은 사람으로서 감사 인사를 꼭 드리고 싶었습니다.”
“부관께서 제 얼굴에 금칠을 하시는군요.”
덕분에 분위기는 화기애애했다. 서로에게 호의를 가지고 있으니 분위기가 나쁠 일이 없었지만. 그러나 본격적인 이야기가 시작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말이 오가기 시작했다.
“우선 황제 폐하께서 의식을 잃으셨다는 건 알고 계실 겁니다.”
“예. 문제는 후계자를 정해놓지 않으셨다는 것.”
“그렇습니다. 덕분에 자리는 하나인데 노리는 사람은 많은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졌습니다. 제각각 경쟁자들의 눈치를 보며 겉으로는 황제 폐하를 걱정하는 척 안으로는 최대한 세력을 늘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 마탑이라고 하여 예외는 아닙니다. 오히려 강하게 영향을 받고 있습니다.”
이런 말이 있다. 칼을 찬 이들은 정치에 관련해서는 안 된다고. 그러나 어디 그게 물과 기름처럼 나뉘기 쉬울까. 마법이란 고급 학문이고 필연적으로 귀족들과 연계될 수밖에는 없는데. 제 팔은 안으로 굽을 수밖에 없는 법이었다.
“탑주님을 뵙고자하는 이들도 많았습니다만 탑주님께서는 관여하지 않겠다며 모두 물리치셨습니다. 그 이후로 딱히 방침을 내리시지 않으셨던 터라 아래로는 학생들부터 위로는 장로들까지. 제각각 지지하는 황자들의 소속끼리 모여 다른 세력을 견제하고 있으니······. 골치가 아플 따름입니다.”
“부관께서는?”
“저야 탑주님의 명을 따를 뿐이지요. 대제자께서도 처신에 주의하십시오. 제가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정치에 깊게 관여해서 좋은 꼴 본 사람을 본 적이 없습니다.”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마탑주인 스승님도, 부관으로서 스승님을 대신해 마탑의 궂은일을 담당한 에반도 내게 어느 쪽으로 치우치지 말고 중립을 유지할 것을 당부했다.
‘윤곽이 드러날 때까지 숨죽이고 있으라는 건가.’
두 사람의 말처럼 이번 정쟁에 관여할 필요는 없었다. 내 위치는 더 이상 가볍지 않았고 나를 포섭하려는 이들에게있어 끌어들일 수 있다면 좋지만 실패했다고 하여 상대편의 손만 들어주지 않는다면 적대할 이유도 없었으니까.
그 뒤에 정쟁이 끝난 뒤 최후의 승자가 정해진다고 하더라도 중립을 지킨 이상 피해를 보지도 않을 테니까. 최후의 승자라고 하더라도 정쟁을 거친 이상 지지기반은 약할 수밖에 없었고 건들지만 않는다면 얌전히 자신의 품 안으로 들어올 이들을 내치려는 행동을 하진 않을 것이다.
그것조차 생각하지 못할 만큼 어리석다면 애초에 이 정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고.
‘한동안은 몸을 추스르는데 집중해야겠군. 어차피 길어봤자 몇 년이다. 황제가 깨어나서 후계자를 지목하면 더 빨리 끝날 수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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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반과의 긴 대화를 마치고 아래층으로 향했다. 그 뒤로 현 정세에 대한 대화도 오갔지만 세 황자가 가장 유력한 후보로서 활발하게 움직이고 있다는 것, 그들 밑으로 몇몇 황자들이 자진해서 들어갔으나 더 많은 숫자의 황자들이 제왕의 자리에 욕심을 내고 있으며 아직까지는 누가 승자가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는 것까지.
차라리 누구 한 명이 압도적이었다면 그를 도와 빠르게 끝내는 편이 나를 위해서나,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나, 제국을 위해서나 여러모로 좋았을 텐데.
“투덜거려봤자 바뀌는 건 없나.”
드래곤의 피를 이용해 황제를 치료해볼까라는 생각도 해봤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드래곤의 피가 영약인 것은 틀림없으나 불로불사의 영약은 결단코 아니었다. 또한 취급에 주의하지 않으면 독으로 작용해도 이상하지 않았다. 나의 경우만 봐도 죽을 뻔하지 않았던가.
어차피 황제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언젠가는 터질 문제였으니, 나 혼자서 해야 할 일이 있는 지금 터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으리라.
웅성웅성-
그렇게 아래층에 도착하여 아르민이 대기하고 있을 쉼터에 도착했을 때, 어지간해서는 소란스러울 일이 없는 쉼터가 여러 명의 목소리로 시끌벅적했다. 순간적으로 스쳐지나가는 귀찮은 기운, 그리고 온갖 실전에서 다져진 감각은 내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건방지게 어디서 소리를 질러?”
“꿈도 크다. 오르지 못할 나무는 쳐다보지도 말라는 말, 못 들어봤냐?”
“당장 여기서 나가. 이 곳은 네 녀석 따위가 들어올 곳이 아니야!”
남녀 몇 명이 모여 한 사람을 둘러싼 채, 폭언을 내뱉으며 겁박하고 있는 모습. 그 주변의 사람들도 흥미롭게 쳐다볼 뿐, 말릴 생각은 없어보였다. 다만 모든 이들의 시선을 받고 있는 한 사람이 낯익은 얼굴이라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내외로 혼란스럽다더니, 이런 데서까지······.’
미간에 주름이 잡힌다. 어려운 일은 아니며 위험한 일도 아니다. 다만 외부의 일로 골치 아픈데 이렇게 자잘한 일에서까지 문제가 생기니 조금 짜증이 날 뿐.
“대제자님의 이름을 내세우면 우리가 알겠습니다하고 물러날 줄 알았나? 어디서 감히······!”
“내 이름이 거론된 거 같은데, 무슨 일이지?”
“누가······대제자님!”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주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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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닐이 쉼터를 떠나간 이후, 아르민은 얌전히 자리에 앉아 레닐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몸과 달리 마음은 금방이라도 소리를 지를 것만 같았다.
‘여기가 바로 마탑······!’
제국의 마법사들에게 성지나 다름없는 곳. 첫 방문은 아니었지만 그 경험은 고작해야 테라 방벽으로 떠나기 전, 인원 확인을 위한 잠깐의 시간이었을 뿐이었다. 지금과는 느낌이 사뭇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제부터 내 화려한 날갯짓이 시작되는 거야!’
그러나 그 상상은 오래가지 못했다. 얌전히 앉아있는 낯선 얼굴의 이방인을 수상쩍게 여기는 이들이 있었으니까.
마탑은 상당히 폐쇄적인 공간이다. 마법사들이라고 하더라도 방문 사유가 확실하지 않으면 들여보내 주지 않는 곳이었으니 마주치는 얼굴들은 거기서 거기라는 뜻이었다. 그런데 처음 보는 낯선 얼굴이 쉼터에 있었으니 관심이 갈 수밖에.
그렇게 마탑의 마법사들은 아르민에게 호구조사를 했고 그 과정에서 아르민은 레닐이 일러준 대로 레닐을 따라 마탑으로 오게 되었다고 답했다. 아르민은 레닐이 말한 대로 이들이 물러날 것이라 생각했지만 레닐이 생각하지 못했던 것이 있다면 마탑에서 레닐의 위상은 높으면 높았지, 간신히 초보딱지를 뗀 마법사의 입에서 거론될 만큼 낮지 않다는 점이었다.
레닐이 아르민과 같이 테라 방벽에 종군하였으나 일단은 귀족이었으며 마탑주의 첫 제자이자 서른이 되기도 전에 마도의 칭호를 단 마도사였다.
또한 마탑에서 머무는 동안 수많은 연구를 성공하여 이름을 알렸던 만큼 젊은 마법사들이 레닐에게 가지는 감정은 동경에 가까웠다. 그런데 처음 보는 삼류 마법사가 자신의 연구를 레닐이 가능성이 있다는 말과 함께 데려왔다니, 순순히 받아들일 리가.
“같잖은 소리하고 있네. 대제자님이 어떤 분인데 네 연구 따위에 감탄을 해? 개소리도 정도껏 해야지.”
그 노골적인 모욕에 평생의 연구가 무시당한 아르민도 화가 나서 목소리를 높였고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진 것이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하아.”
“죄송합니다. 정말로 대제자님께서 데려온 사람일지는 몰랐습니다.”
대단찮은 일이었다. 오해와 오해가 겹쳤을 뿐이니까. 기본적인 잘못은 상대방에게 있었으나 아르민과 이들의 격차를 생각한다면 아르민이 사리는 것이 맞았다.
‘나도 이 곳에서 오래 살긴 했나보군. 자연스럽게 신분에 맞춰서 잘잘못을 따지는 것을 보면.’
내 나이가 스물여덟이다. 이제는 전생보다 현생이 더 긴 만큼 제 아무리 전생의 뿌리가 단단히 박혀있다고는 하나 영향이 없을 수가 없었다.
“미안하군. 내가 좀 더 확실해 했으면 이런 오해는 없었을 텐데.”
“아, 아닙니다! 대제자님이 연관되었으니 몇 번이라도 확인을 했어야 했는데, 저희가 성급했던 탓입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렇게 작은 소란을 좋게 끝내고 아르민을 데리고 쉼터를 빠져나왔다. 졸지에 거짓말쟁이로 몰렸던 아르민은 지금의 마무리가 썩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지만 곧 깨닫게 될 것이다. 결코 장밋빛 미래가 기다리고 있지 않다는 것을.
“오늘부터 여기가 네 방이다.”
특별할 것 없는, 마탑에 상주하는 마법사들 대부분이 머물고 있는 평범한 방으로 아르민을 이끌었다. 타이탄 프로젝트가 성과를 내 전용 연구소라도 세워지지 않는 한 혹은 테라 방벽으로 돌아가게 되지 않는 한 녀석의 집은 이 곳이었다.
“그리고 오늘부터 네가 할 일들을 말해줄 테니 두 귀 활짝 열고 들을 수 있도록.”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8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