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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67화 (67/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7화 - >

“사람 한 명을 데려 가고 싶습니다.”

“사람을?”

항상 일관적인 표정을 유지하는 지크 후작이다. 그런 만큼 그의 표정 변화를 보는 것은 쉽지 않은 일. 그러나 나는 오늘 그의 놀란 표정을 눈에 담았다. 내 부탁이 그로서도 꽤나 예상 외였던 모양이지.

“예. 전투보다는 연구 쪽으로 재능이 있어 보이는 녀석이 한 명 있더군요. 자세히 살펴보니 잘만 이끈다면 제대로 된 성과를 낼 수 있을 것 같아 제 곁에 두고 연구를 진행해볼까 합니다.”

“이름은?”

“아르민이라고 합니다.”

“아르민이라.”

아르민을 아는 듯한 눈치는 아니다. 당연한 일이다. 그의 밑에만 수만 명의 병사들이 있었고 직속 부하라 할 수 있는 기사단의 숫자만 하더라도 수백 명에 육박한다.

그들의 이름을 외우는 것만으로도 만만치 않은 상황에서 관리하는 이가 따로 있는, 영역이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의 이름까지 외우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더욱이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은 3년차 마법사라면.

“무리한 부탁은 아니로군.”

“그랬다면 처음부터 부탁을 드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좋아. 더 큰 일에 공헌할 수 있다는데, 받아들이지 않을 이유가 없군. 이제 와서 마법사 한 명 빠진다고 틈이 생기지도 않을 테고. 자네가 원하는 대로 하도록.”

“감사합니다. 후작 각하.”

거절할 가능성은 높게 잡아도 1% 정도로 잡았다. 이 곳에서 마법사 한 명의 존재란 당장 오늘 벌어질지도 모르는 전투에서 사라질 수도 있는, 언제 사라져도 이상하지 않은 정도였으니까. 그나마도 다른 이들의 부탁이었다면 지크 후작의 성격상 단칼에 거절했을 확률이 높았지만, 그 동안 충분한 성과를 내보였으니 이 정도 부탁은 괜찮으리라 생각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오늘 바로 출발할 거다. 정오 전까지 준비를 끝내고 내 방으로 올 수 있도록.”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내 말을 들은 아르민은 뛸 듯이 기뻐했다. 무리도 아니었다. 내가 보기에 아르민은 이론이라면 모를까, 전투에 대한 재능은 없었다. 이 곳에서 이 년 넘도록 사지 멀쩡히 살아남은 것만으로도 천운이 따랐다고 봐도 무방한데, 팔 년에 가까운 시간을 단축하여 테라 방벽을 떠날 수 있게 되었으니까.

그 뿐이랴, 제국 마법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마탑에서 자신이 공을 들여 쌓아온 연구를 전폭적인 지원 속에서 진행할 수 있을 테니 기뻐하지 않는 것이 이상한 일이리라. 물론 곧바로 찬 물을 쏟았지만.

“너무 들뜨진 마라. 어디까지나 네 연구에서 가능성을 보았을 뿐이니, 그리고 가능성은 언제나 리스크를 동반하지. 연구에 실패해도 좋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니까. 그러나 이 곳을 빠져나왔다는 것에 만족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순간, 너는 꿈을 꾼 것처럼 이 곳에서 눈을 뜨게 될 거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반드시 성과를 내보이겠습니다!”

물론 앞으로 밝은 미래만이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환상에 빠진 아르민에게는 찬물조차 소용없었던 모양이지만. 뭐, 상관없나. ‘타이탄 프로젝트’가 아르민이 없으면 불가능한 연구도 아니고 내 우려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지금의 말을 지키면 될 뿐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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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오에 다시 만난 아르민의 등에는 과하다 싶을 정도의 가방이 들려있었다. 뭔 그리 짐이 많은지는 모르겠지만 도저히 먼 길을 가야하는 여행자의 모습이라 할 수 없어 아공간을 열어 던져놓았다. 진기한 것을 보았다는 듯한 눈빛은 덤이었고. 그러나 그런 눈빛 하나하나에 신경을 써줄 만큼 한가하지가 않았다.

‘황제가 의식을 잃었다니.’

놀라운 일은 아니었다. 물론 가볍다는 뜻은 아니었지만, 황제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었으니까. 언젠가 벌어질 일이었기에, 많은 이들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기회가 되려나, 아니면 위기가 되려나.’

타이탄 프로젝트는 성공만 한다면, 아니 가능성만 보이더라도 역사의 분기점이 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한 계획이었다. 누누이 강조했듯 국가 단위의 지원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였고. 그를 위해 내가 생각했던 방법은 두 가지였다.

경쟁자들끼리 경쟁을 붙여서 더 많은 지원을 받아내던가, 보다 앞서나가는 일인자에게 날개를 붙여주어 추후 지원을 약속받던가.

두 가지 중 내가 원하는 방향이 있다면 단연 후자였다. 그 편이 훨씬 안정적일 테니까. 또한 정치에 깊숙이 발을 담구는 건 여러모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특히나 나 같은 경우는 더더욱.

내 개인의 행동이 나 하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가족과 영지까지 끌어들이기 때문에. 나 개인의 욕심을 위해 아무 상관없는 가족들에게 위험을 무릅써 달라고 할 수는 없었다. 타이탄 프로젝트를 성공하지 못한 미래에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모든 것이 끝날 때까지 조용히 기다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겠지.’

마탑의 지원만 받더라도 혹은 고향으로 돌아가 연구를 진행할 수도 있었다. 어쩔 수 없이 연구의 폭은 좁아지겠지만 시간은 많았다. 경쟁자가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 급하게 매달릴 이유 또한 없었고.

‘일단 수도에 돌아가서 눈치를 봐야겠어.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선택지가 얼마나 있는지, 그 중 가장 좋은 선택지는 무엇인지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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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은 혼란에 빠져있었다. 황제가 쓰러졌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아직까지도 의식을 차리지 못한 황제는 사실상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는 뒷방 늙은이나 다름없었고 지금껏 황제가 앉아있었던 그 자리를 차지하기 위한 눈치싸움이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다.

“도대체 어느 쪽에 붙어야 하는 거야?”

“신중하게 생각해야 해. 한순간의 선택으로 가문이 통째로 박살날 수도 있다고.”

“하지만 역으로 날아오를 수도 있겠지.”

의자는 하나인데 앉고자 하는 이들은 많았다. 가장 유력한 후보는 세 처에게서 얻은, 각 처의 장남들이라 할 수 있는 배다른 황자 세 명이었으나 가장 가까이에 있을 뿐, 그 세 명에게만 기회가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아버지는 다름 아닌 황제다. 당연히 어머니들의 신분 또한 평범할 리 없었다. 물론 제각각 차이는 있겠지만 모든 것을 걸어야 하는 이 도박에 올릴 판돈 정도는 충분한 배경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최후의 승자가 될 확률은 높지 않고 리스크로 모든 것을 잃겠지만 역으로 승자가 된다면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 승부사라면 한 번쯤은 해볼 만한 모험이지 않은가. 그리고 이 모든 것은 현 황제, 다리우스 3세의 잘못이기도 했다.

“도대체 황제 폐하께서는 무슨 생각으로 책봉을 머뭇거리셨던 건지.”

“쉿! 누가 들으면 어쩌려고 그래?”

“이 정도 가지고 뭘. 그 탓에 빠진 내 머리카락만 생각하면 더한 말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모든 것은 순전히 황제의 잘못이었다. 빠르면 수십 년도 더 전에, 최소한 몇 년 전에는 이루어졌어야 할 황태자의 책봉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황제의 잘못이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었다. 무슨 생각으로 그리 한 것인지는 오직 황제만이 알고 있겠지만 대강이나마 유추해볼 수는 있었다.

첫 째로 분란을 피하기 위함이었을 지도 모른다. 황제라고는 하나 그 실상은 제국에서 가장 강력한 힘을 가진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물론 일 등과 이 등의 격차가 꽤나 극심하기는 했지만 절대 권력을 휘두르는 전제 군주가 아니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렇기에 다리우스 3세는 수많은 아내를 들였다. 제국 전체를 이끌어나가기 위해서. 그런 상황에서 섣불리 황태자를 임명하는 것은 황제 스스로의 힘을 깎아먹는 일이 될 수도 있었다. 황제로부터 외면당한 이들이 이전처럼 순순히 명령을 들으려 하지 않을 테니까.

두 번째로는 황제 본인에게 야망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강력한 황권을 보유하는 것. 그렇기에 야망을 이루고 난 뒤, 누구를 황태자로 책봉해도 군소리가 나오지 않는 상황에서 후계자를 선택하고 싶었을 지도 모른다.

그 외에도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모든 이유를 감안하더라도 지금의 이 상황은 황제가 한 일 중 가장 큰 실수임과 동시에 그가 그토록 원했던 황권의 신장과는 오히려 거리가 멀어지는 결과를 낳을 터였다. 귀족들의 도움을 받은 이상 이후에도 그들의 눈치를 볼 수밖에 없을 테니까.

하지만 아직까지는 모두들 수면 밑에서 조용히 눈치만을 살피고 있었다. 황제가 뒷방 늙은이가 되었다고는 하나 살아있는 황제였다. 섣불리 움직였다가는 호시탐탐 틈을 노리고 있는 경쟁자들에게 틈을 보여줄 수도 있었으니까.

그리고 언제 요동쳐도 이상하지 않은 잔잔한 수면과도 같은 수도에 작은 돌덩이가 떨어지려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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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이 곳이 바로 마탑······.”

“괜한 호기심에 이것저것 건들 생각하지 말고 나만 따라와라. 자칫 잘못하면 너 하나쯤은 골로 보낼 장치들이 곳곳에 숨겨져 있으니까.”

“명심하겠습니다!”

일 년 반 만에 돌아온 수도는 빈말로도 분위기가 좋다고 할 수는 없었다. 일반 백성들이야 큰 차이를 느끼지 못할지 몰라도 당장 이 곳, 마탑만 하더라도 평소보다 어수선한 것이 단번에 체감되었다. 다른 곳이라면 모를까, 마탑에 상주하는 마법사들은 개개인이 귀족과 강하게 연결되어 있기에 영향을 강하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기다리도록. 누가 시비를 걸어오면 내 이름을 대고, 그럼 일방적인 시비는 걸지 못할 거다.”

“알겠습니다!”

외부인을 위한 휴식터에 아르민을 남겨두고 마탑의 꼭대기로 향했다. 수많은 마법사들 중 오직 한 명을 위한 장소, 거주자의 허락 없이는 그 누구도 발을 들여놓아서는 안 되는 장소에 가기 위해서.

굳게 닫힌 문. 노크를 하려 했을 때, 한 발 앞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레닐이냐, 들어오거라.”

“실례하겠습니다.”

“혹시나 했더니 역시나였구나.”

오랜만에 얼굴을 뵌 스승님이다. 그러나 오늘은 어쩐지 분위기가 조금 달랐다.

“네가 수도에 돌아왔을 때 느꼈다. 나조차도 방심할 수 없을 만큼 강대한 마력을. 도대체 누구인가 했는데, 레닐. 너였구나. 도대체 그동안 무슨 일을 겪었던 것이냐.”

그건 명백한 질투심이었다. 스승님 본인은 무슨 감정인지 모르시는 듯 했지만, 당연한 일이었다. 평생 누군가에게 재능으로 뒤쳐진다고 생각하지 않으셨을 테니까. 따라서 질투심을 느끼는 것도 처음일 수밖에 없었다.

한참이나 어린 제자가 벌써 자신이 서있는 곳까지 따라온 것을 알았을 때, 인간이라면 느낄 수밖에 없는 감정이었으나 완성된 스승이라면 청출어람에 기뻐하겠지만 스승님에게 나는 첫 제자였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천천히 설명 드리겠습니다.”

나는 그 동안 있었던 일을 적당히 각색하여 스승님께 전했다. 약간의 거짓을 첨가해서.

명백한 목적을 가진 출발은 수련의 일종으로, 녀석을 찾아 나선 노력은 우연으로 바뀌었다. 녀석에게 거둔 승리는 분투한 패퇴로, 근 팔 년 전에 겪었던 일은 얼마 전의 일로 뒤바뀌었다.

“······그렇게 된 겁니다.”

“드래곤이라니, 네 말이 아니었다면 헛소리라고 치부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성장을 보여주니 믿을 수밖에 없군. 그래서 드래곤은 어디로 갔는지 봤느냐?”

“상황이 워낙 급박해서, 몸 하나 건사하는 게 고작이었습니다.”

“······당장 북쪽으로 올라가봐야겠다.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겠어.”

스승님께서는 꽤나 조급해보였다. 하긴 인생의 절반 가까이 8서클의 벽을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 벽을 뛰어넘을 기회가 있다는데 눈이 돌아가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나를 제자로 받아들이며 각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하신 것도 그 일환이었고. 결국 한참동안의 설득이 동반되어서야 당장이라도 테라 방벽을 향해 출발할 것 같았던 스승님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

“미안하구나. 너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텐데, 내가 듣고 싶은 말만 하게 만들었어.”

“아닙니다. 저도 말씀드리려고 했던 이야기입니다, 그보다 그 동안 수도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겁니까?”

“······자세한 건 에반에게 듣도록 해라. 다만 스승으로서 한 마디 해주자면, 한동안은 마탑 밖으로 나가지 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스승님은 긴 말을 하지 않았다. 다만 조용히 숨죽이고 있으라는 말을 하셨을 뿐. 대신해서 에반을 찾아갔다. 오랫동안 부관의 일을 맡으며 대외적인 일을 맡은 에반이니만큼 누구보다도 정보에 능했으니까.

“오랜만입니다. 에반 씨.”

“황제 폐하께서 쓰러지신 일 때문입니까?”

“그렇습니다. 그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세히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꽤 긴 이야기가 될 것 같군요.”

에반의 말처럼 곧 이어 시작된 이야기는 결코 짧지 않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7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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