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6화 - >
“대단한 걸.”
크기에 비해 무겁지는 않아 들고 있는 것이 부담스럽지는 않았지만 사람의 머리 몇 개는 합쳐놓은 크기였다. 그 내부의 잠들어있는 마력은 그야말로 압권이었고. 하긴 이 정도 되는 심장이니 그 거대한 몸에 혈액을 보내고 압도적인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것이겠지.
“이런 걸 몸에 품고 있었으면서 간단한 마법조차 쓰지 못했다고?”
녀석은 결코 본능만으로 움직이는 녀석이 아니었다. 의사소통이 가능했으며 - 목적이 목숨이니만큼 의미는 없었지만 - 충분한 지성을 가지고 있는 인격체였다.
만약 녀석이 마력에 걸맞은 마법만 사용할 수 있었어도 전투의 승자와 패자는 뒤바뀌었을 것이다. 그건 만약이 아닌 확신의 수준이었다. 그러나 녀석은 그 막대한 마력을 신체의 활성화와 브레스로 밖에는 활용하지 못했다.
“덕분에 살아남았으니 나로선 다행인 일이었지만······.”
물론 녀석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함은 나에게 천운이 따른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한 편으로는 아쉬웠다. 이만한 마력의 소유자는 마법으로 어떤 광경을 보여줄 수 있을지 기대가 되었던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그 뒤에는 죽음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 정도로 심장에서 느껴지는 마력은 단 한 번도, 비슷한 느낌조차 받지 못했을 정도로 압도적이었다.
“이건 우선 넣어두고.”
이 정도의 마력을 품고 있는 아이템을 단순한 마력 창고로 쓰기에는 아깝다. 조금 더 심층적인 연구와 고민이 뒤따라야겠지만 최고의 효율을 자랑하는 쓰임새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들뜬 마음을 접어두고 도축 작업을 계속했다. 경험이 없어서 꽤나 고전하기는 했으나 내가 원하는 건 부위별로 나누는 것이 아닌 뼈와 고기, 가죽을 나누는 것에 불과했으니 큰 문제로 번질 가능성은 없었다. 매우 귀찮고 손이 많이 필요했으며 어려운 일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었지만.
덩치가 워낙 컸기에 완전히 분리가 끝날 때까지 며칠이라는 시간이 걸렸다. 그 동안 먹은 것은 드래곤의 고기요 마신 것은 드래곤의 피였으니 하루 종일 작업에 매진해도 피로를 느끼지 못했다.
“이제 돌아갈까.”
더 이상 이 곳에 머무를 이유가 없다. 작은 산과도 같았던 드래곤은 깔끔하게 분리되어 아공간 한 켠에 쌓여있었으며 이동할 수 없는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갑옷의 일부가 망가졌고 [발톱]또한 사용이 불가능했지만 [이빨]도 남아있었고 탄환도 충분했다. 그리고 각인을 활용한 무기들이 아니더라도 현재의 나라면 마법만으로도 충분히 몬스터의 대지를 돌파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던 것보다도 훨씬 빠르게 몬스터의 대지를 빠져나갈 수 있었으니 아무리 잘 숨어 이동하더라도 하루에 몇 번은 마주하는 몬스터들이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우어어어-
내가 다가가자 맞서 싸울 생각을 하기는커녕 등을 돌려 도망치기 바빴다. 한두 번이라면, 자잘한 몬스터들이라면 모를까. 매번 그것도 어지간한 상위종들이 전부 그런 행동을 보이니 당황스러울 뿐이었다. 그러나 곧 이유 몇 개를 떠올릴 수 있었다.
‘나에게서 드래곤의 모습을 떠올리는 건가?’
가능성은 충분했다. 일단 내가 죽인 드래곤은 일대의 지배자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오래 전, 녀석을 처음 마주했던 로랑의 증언이 있지 않는가. 일대의 몬스터들이 녀석의 말에 복종했다고.
게다가 나는 단순히 녀석을 죽인 것뿐만 아니라 녀석의 피로 온 몸을 담갔고 녀석의 고기를 먹었다. 이미 깨끗하게 씻었기에 냄새를 맡을 수는 없겠지만 본능적인 감각이 훨씬 뛰어난 몬스터들이라면 사람이 맡지 못하는 냄새를 맡고 혹은 본능적으로 나를 피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애매한걸. 이걸 좋은 거라고 봐야 하나?’
어디까지, 언제까지 영향력을 미칠지 알 수 없었다. 숫자가 많아지면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달려들지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하루라도 빨리 테라 방벽을 떠나야 할지도 몰랐다.
나의 존재로 인해 침공해오지 않던 몬스터들이 쌓이고 쌓이다가 내가 테라 방벽을 떠나고 난 뒤, 폭발해버릴지도 모를 일이었으니까. 테라 방벽으로 향하는 발걸음이 조금 더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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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 년 만인가. 멀쩡해 보이는군.”
“별로 놀라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봄에 떠나 여름에 돌아왔다. 준비 기간도 아닌 몬스터 한 마리를 잡는데 일 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으니 미친 짓이라고 해도 할 말은 없었다. 그러나 단 한 번의 연락도 없이 일 년 만에 얼굴을 비쳤음에도 지크 후작은 딱히 놀란 듯한 표정이 아니었다. 내가 무슨 목적을 가지고 몬스터의 대지로 향했는지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놀랄 게 뭐 있겠나. 둘 중 하나인 것을. 실패했어도 살아 돌아올 가능성은 있겠지만 그런 표정을 짓고 당당하게 나를 찾아오진 않았겠지. 아닌가?”
“······그렇습니다.”
“게다가 자네, 짧은 시간에 많이도 성장했군. 이제는 나와 같은 선에 섰어. 오직 성공만이 그런 폭발적인 성장을 이끌어낼 수 있는 법이지.”
“과찬이십니다. 아직 각하에 비하면 많은 면이 부족합니다.”
지크 후작은 내게 그 동안에 있었던 일에 대해 묻지 않았다. 제국 전체가 뒤흔들릴지도 모를 일임에도 불구하고. 나를 믿거나 이미 끝난 일이만큼 더 이상 상관하지 않겠다는 것일까.
다행이었다. 사건의 전말을 대충이나마 알고 있는 지크 후작이라고 하더라도 그 전리품을 내가 취했다는 사실을 누군가에게 말한다는 것은 꽤나 부담스러운 일이었으니. 지크 후작이 결코 입이 가볍지 않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고 하더라도.
“아무튼 고생했네. 이걸로 제국의 걱정거리가 또 하나 사라졌군. 나를 제외하곤 누구도 모르는, 알아서도 안 될 공이라지만 정말로 수고했네.”
“감사합니다.”
“돌아가서 원하는 만큼 쉬도록 하게. 오랜 시간 밖에 나가있었으니 안 그런 척 해도 몸이 휴식을 원하고 있을 테니 말이야. 아, 그러고보니 마지막으로 하나 묻고 싶군.”
“무엇을 말입니까?”
“그 날 이후, 자네의 목표는 복수라고 했었지. 그렇다면 목표를 이룬 지금, 자네는 무엇을 할 생각인가?”
그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가 없었다. 무엇을 할 거냐고? 그러게. 앞으로 뭘 해야지?
결국 질문에 대한 명쾌한 대답을 내리지 못한 채, 지크 후작으로부터 도망치듯 빠져나왔다. 그럴 필요까지는 없었는데. 뜨거운 물이 담긴 욕조에 몸을 담구고 노곤하게 풀리는 몸을 보며 마법의 한계를 다시 한 번 체감했다. 제아무리 인위적으로 피로를 풀더라도 진짜 휴식의 효과에는 미치지 못한다는 것을.
‘무엇을 해야 하나.’
사실 할 거야 많았다. 내 몸 속에 엉망진창으로 봉합되어 있는 회로를 처음부터 싹 다 뜯어고쳐야 하기도 했고 테라 방벽을 출발하기 전, 아르민을 만남으로서 생각하게 된 계획도 조금 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었다. 당장 일 년 사이에 황도의 상황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것뿐이랴, 이제야 모든 것이 끝났다고 제대로 인사로 해야 했으며 돌아가면 부모님도 성화이실 테니 가정을 꾸리는 것도 생각을 해봐야겠지. 그러나 지크 후작의 질문에 선뜻 대답할 수 없었던 건 이 모든 것이 잔가지는 될 수 있을지 몰라도 기둥이 될 수는 없었으니까. 큰 틀을 잡아줄 대목표로는 손색이 있었다.
“후우.”
욕조로부터 나와 몸의 수분을 날리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은 뒤 침대에 누울 때까지,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온 나를 향한 지크 후작의 조언이 생각났다.
[자네는 이 곳에 온 뒤로 계속해서 목표를 향해 달렸지. 처음에는 생존이라는 목표를, 다음에는 테라 방벽의 빌어먹을 연쇄를 끊겠다는 목표를, 마지막으로 동료들의 향한 복수까지.
오랜 기간 끊임없이 달려왔어. 그런 만큼 지금의 공허함이 익숙하지 않을 수도 있겠지. 푹 쉬면서 생각해보게. 또 다른 목표를 잡는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닐 게야. 어쩌면 그대로 주저앉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으면 좋겠군. 내가 볼 때, 아직 자네는 할 일이 많이 남아있으니까 말이야.]
말 그대로다. 이대로 종막을 맞이하기에는 나는 젊었으니까. 내가 해야만 하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분명 나타날 터, 그러나 조급하게 생각하지는 말자. 그동안 끊임없이 달려왔으니 잠시만, 잠시만 쉬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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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며칠이고 푹 쉬어봤다. 물론 테라 방벽이 휴식을 취하기에 적합한 장소는 아니라고 하더라도 외부에 신경을 쓰지 않고자 한다면 못할 바도 아니었다. 물론 오랫동안 자리를 비웠던 만큼 스콜피온의 제작과 수리에는 한손 보태야 했지만, 떠나기 전 과하다싶을 만큼 미리 만들어두었기에 급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이만 돌아가 볼까 합니다.”
“······새로운 목표를 찾았나보군. 들려줄 수 있겠나?”
“이 곳의 연쇄, 아직 완벽하게 끊어진 것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고리를 끊을 가위를 만들어볼까 합니다.”
스콜피온이 훌륭한 병기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역사에 한 획을 그을 병기까지는 아니었다. 뛰어난 장점만큼이나 단점 또한 명확했기에.
부족한 내구도와 처참하기까지한 기동성, 그로 인해 적들의 표적이 되기 쉽다는 것까지. 거점 방어용으로는 어떤 병기와도 비교해도 한 수 위의 성능이었지만 단지 그 뿐이기도 했다.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죽인 몬스터들의 숫자는, 자잘한 놈들을 제외해도 수백 마리는 가볍게 넘을 겁니다. 그러나 스콜피온이 자리 잡은 후 죽인 상위종은 그 몇십 배는 될 겁니다. 그런 의미에서 이 곳에서 몬스터를 죽이는 것에 힘쓰는 것보다는 스콜피온과 같은 새로운 병기를 연구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더 도움이 될 겁니다.”
“몬스터의 대지를 없애버리겠다라, 쉬운 목표는 아니로군. 평생을 노력해도 이루지 못할 가능성이 높겠지.”
“그렇기에 목표로 삼을 만 하지 않습니까.”
개인의 힘으로는 할 수 있는 일의 한계가 명확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결국 개인은 개인일 뿐이었으니까. 그러나 집단의 힘은 다르다. 좋은 시스템과 기반만 갖춰진다면 작은 변화로도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것이 바로 집단이었으니까.
“내가 말릴 순 없겠지. 자네가 이 곳에 남고 싶어 한다면 모를까, 어느 쪽으로 보아도 이 곳에 남는 것보다는 황도로 돌아가 연구하는 것이 더 이득일 테니 말이야.”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이것 받으십시오.”
“이건······?”
“건강에 좋은 겁니다.”
작은 병에 담겨있는 붉은색 액체. 그 정체를 궁금해 하는 지크 후작의 질문에 두루뭉술한 대답으로 넘겼다. 그러나 내 행적을 대충이라도 알고 있는 지크 후작이었기에 유리병에 담겨있는 액체가 무엇인지 대충은 눈치 챈 듯 했다.
“이별선물로 너무 거창한 걸 주는군. 고맙게 받지.”
“그런 김에 부탁 하나만 드려도 되겠습니까?”
“선물인줄 알았더니 뇌물이었던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들어보시고 안 되겠다 싶으시면 들어주지 않으셔도 괜찮습니다.”
“다른 이들이었다면 경을 쳤겠지만, 자네가 허튼 이야기를 하지 않을 것이라 믿네.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하는군.”
“걱정하지 마십시오. 각하를 실망시키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드래곤의 피에 비하면 정말 작은 부탁일 뿐이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더 큰 이득을 위한 일이니만큼 지크 후작이 거절할 것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제국을 위한 일이었으니까.
“사람 한 명을 데려 가고 싶습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6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