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5화 - >
혈액에 머리부터 발끝까지 담갔을 때, 그 느낌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액체로 이루어진 마력에 몸을 담구는 듯한 느낌. 온 몸이 마력으로 변한 듯한 충족감. 그야말로 황홀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지금만큼은 부러진 갈비뼈로부터 느껴지는 욱신거림도, 조금만 무리하면 찢겨버릴 듯 너덜거리는 회로가 주는 불편함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러나 곧 상황이 이상하게 흘러간다는 것을 직감했다.
‘!’
마력 과포화 현상.
과도한 마력의 집중으로 한계 이상의 마력에 노출되었을 때, 회로가 과부하 되는 것을 넘어서 회로 자체가 마력과 동질화되는 현상. 나로서도 본 적도, 경험해 본 적 없이 오직 이론만으로 알고 있는 현상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과포화 현상을 경험한 이는 두 번 다시 마력을 느낄 수 없게 되니까.
예를 들자면 신체의 마력은 깨끗한 물이 흐르는 강이다. 외부의 마력은 더러운 물이 흐르는 강이고. 당연히 수량은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그러나 서로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것은 두 강이 분리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후자의 강이 수량에 걸맞은 크기를 자랑하기 때문이었다.
체내의 마력을 늘리는 행위는 정화 장치를 통해 더러운 물을 정화하여 깨끗한 강으로 옮기는 작업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러나 마력 과포화 현상이 일어나면 이야기가 달랐다.
말 그대로 홍수가 발생하는 것이다. 두 강을 갈라놓던 작은 경계는 사라지고 전자 후자 상관없이 더러운 강으로 합쳐진다. 그렇게 된 이후에는 홍수가 잦아들더라도 깨끗한 강은 홍수 이전의 강으로 되돌아갈 수 없게 된다. 예전처럼 이용할 수 없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끄으읍!’
이런 멍청한, 바보 같은, 머저리 같은 행동이었다.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임에도 불구하고 들떠서 뒤를 생각하지 않았다.
온전히 내 실수로부터 벌어진 일이었으니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수도 없는, 그러나 멍청함을 탓하기보다 이 상황을 어떻게 수습하는지가 지금으로서는 훨씬 중요한 일이었다. 이 상황을 수습하지 못하면 지금까지 이루어놓은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감은 물론이거니와 생존조차 불투명해질 테니까.
여섯 개의 정화장치가 쉴 틈 없이 가동했다. 회로 곳곳에 자리 잡은 코어들도 힘을 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해일처럼 몰려오는 물을 정화하기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어쩔 수 없었다. 그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으니까.
‘······.’
나는 금세 무아지경에 빠져들었다. 아니, 내 의지에 앞서 몸이 나를 무아지경으로 이끌었다는 표현이 옳은 표현이리라. 신체가 주인의 위기를 깨닫고는 최대한의 도움을 주고 있었다.
“끄흡!”
보글보글-
그러나 사람 한 명이 한계를 뛰어넘는 힘을 보여준다고 자연을 이길 수 있을까? 단언컨대 NO라고 말할 수 있었다. 즉 내가 무아지경에 빠지건 몰아일체가 되건 간에 결과가 바뀔 확률은 극히 희박했다.
몸이라도 멀쩡했으면 모를까, 현재의 내 마력회로는 너덜너덜하여 걸레짝이 따로 없는 수준. 원래대로라면 지금 이 순간 하고 있는 행동조차 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저 무리를 해서 회로가 찢기나 이대로 가만히 있다가 회로가 사라지나 결과적으로는 다를 바 없었기에 발버둥이라도 쳐보는 거지.
‘아, 안 되겠다.’
그러나 발버둥도 오래 칠 수 없었다.
고통.
지금껏 경험해 본 적 없는, 인간의 수준에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 내 몸을 덮쳐왔기에. 몸의 세포 단위에서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고통. 맨 정신으로는 견뎌내기 힘든 고통이었지만 다량의 마력으로 인해 과도할 정도로 활성화된 몸은 내게 기절이라는 선택지조차 앗아갔다.
그렇게 끝없는 고통 속에서 두 강은 하나로 합쳐졌고 나도 손을 놔버렸다. 별 수 있나, 그나마 다행인 점은 생명에는 이상이 없을 거라는 점. 몬스터의 대지 한 복판에서 무능력한 인간이 된 것을 다행이라고 할 수 있는 지는 둘째치고서라도. 그러나 제아무리 벼랑 끝, 세상이 험하더라도 죽으라는 법은 없나보다.
우우웅-
‘······?!’
회로 또한 마력으로 이루어져있다. 보통의 마력보다 밀도가 훨씬 높고 고정되어 있기에 연공을 하거나 마력을 뽑아 쓰는 와중에도 회로가 된 마력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물밀듯이 흘러들어온 물들이 부서지고 찢겨진 회로 곳곳으로 스며들어가고 있었다.
‘기회다!’
직감했다. 천운이라고. 두 번 다시 오지 않을 기회가 찾아왔다고. 사막에 고립되어 목마른 이가 오아시스를 찾은 것처럼, 나무 위에서 동아줄만을 기다리던 남매에게 굵고 튼튼한 동아줄이 내려온 것처럼 지금의 이 현상이 내겐 오아시스요 동아줄이었다.
제어 불가능한 막대한 양의 물. 그걸 회로에 억지로 밀어 넣었다. 엄청난 고통이 뒤따르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지만 지금은 오히려 고마웠다. 어차피 고통으로 인한 기절은 하지 않는 상황에서 그 어느 때보다 정신을 날카롭게 가다듬을 수 있었으니까.
‘미친 짓이지. 하지만 지금은 미친 짓이라도 해야 해!’
억지로 마력의 밀도를 높여서 회로를 확장하겠다니, 평소라면 생각하지도, 실행에 옮기지도 않았을 미친 짓이다. 틀에 맞추어 차근차근 철근을 박고 콘크리트를 쌓는 것이 보통이라면 지금 내가 하려는 행동은 부서진 수로에 무작정 콘크리트를 들이붓는 행위였으니까.
그러나 미친 짓이라 하더라도 감지덕지하며 실행에 옮겨야 했다. 방법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지금 상황에서는 다행이었으니까. 또 현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서는 그런 ‘미친 짓’이 필요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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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학! 크학! 칵칵!”
붉은 액체로 가득한 구덩이에서 사람 손이 빠져나왔다. 땅을 짚으며 힘을 주더니 이내 머리부터 시작해 사람 한 명이 붉은 액체를 뒤집어쓴 채 구덩이로부터 빠져나왔다.
“헉. 헉. 사, 살았다.”
진이 다 빠졌다. 정신적인 피로도만 따지자면 드래곤과 전투를 벌였을 때보다도 더 고달팠다. 정신과 달리 몸은 그 어느 때보다 쌩쌩해서 괴리만 심해졌지만.
정말로 위험했다. 만약 마력 과포화 현상이 조금만 더 알려져 있는 현상이었다면, 기대감과 피로로 인해 내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았다면 한번쯤은 망설였을 텐데. 그럼에도 행운의 여신은 한 번 더 내 손을 들어줬다. 언제까지 손을 잡아줄 지는 모르니 조심해야겠지.
또한 위기를 돌파한 것은 단순히 빠져나온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위기는 곧 기회라 했던가, 말 그대로 위기를 돌파하니 난이도에 상응하는 기회가 내려왔다. 나는 그 기회를 붙잡았고. 심장에 만들어진 일곱 개의 고리가 그것을 증명했다.
전화위복.
지금의 나는 단순히 마력의 양만으로 따지자면 스승님조차도 능가하리라. 일곱 개의 서클뿐만 아니라 회로 곳곳에 위치한 코어들의 숫자도 비약적으로 늘어났다. 물론 좋은 점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폭발적인 성장은 말 그대로 억지였다. 굳게 닫혀있는 문을 내 스스로의 힘이 아닌 외부의 힘을 빌려 어거지로 열어재낀, 그런 탓에 문을 여는 과정에서 얻어야 할 것들을 얻지 못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일부분이 파손되기까지 한, 말 그대로 억지를 부린 행동.
덕분에 막대한 마력을 얻었음에도 무늬만 7서클이었고 이걸 수습하기 위해서는 시간과 함께 그에 걸맞은 깨달음이 필요할 터였다. 일단 한 번 열어젖힌 만큼 닫힌 상태에서 시작하는 것보다는 훨씬 수월하겠지만.
“쉽게 말해 6.5서클이라고 말하면 되려나.”
뿌드득- 아드득-
관절을 이리저리 돌리며 몸 상태를 확인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는 모르겠지만 고밀도의 마력으로 인해 신체가 강제로 활성화되었기 때문일까, 내가 입은 부상은 하루 이틀 내로 치유 가능한 부상이 아니었음에도 몸을 움직이는데, 마력을 운용하는데 어떠한 부담도 느껴지지 않았다.
부욱-
그러나 가볍게 그었음에도 손바닥에서 피가 흐르는 것을 보면 전설상의 영웅이 그러했던 것처럼 불사의 능력을 주지는 않은 모양이었다. 물론 지금까지 얻은 것만으로도 충분히 값지긴 하다만.
“다행이야. 최소 몇 개월은 지하에서 머물러야 할 줄 알았는데, 바로 복귀해도 되겠어.”
약간의 마력을 끌어올리는 것만으로도 부담을 느꼈던 몸이었다. 그런 만큼 마법의 힘을 빌리기 어려웠고 신체의 부상을 치료하는데도 적지 않은 시간이 걸렸을 것이다.
게다가 몬스터의 대지를 빠져나가야 하는 만큼 마력을 자유자재로 운용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 회로를 원상태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빨라야 겨울이 오기 전, 불운이 겹친다면 겨울 내내 축축한 지하에서 명상에 힘써야 했겠지. 그런 만큼 오늘의 기연은 내게 단기적으로는 수개월의 시간을, 길게는 몇 십 년의 시간을 단축시켜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 전에.”
시선을 돌리자 아직까지도 뜨거운 피를 흘리고 있는 드래곤의 시체가 보였다. 죽어서도 전설상의 존재라는 것일까, 아니면 단순히 날씨가 추워서였을까. 녀석은 금방이라도 살아날 것만 같은 모습이었다.
“끝났습니다. 여러분. 다 끝났다고요.”
힘겹고 어려운 길이었다. 홀로 살아남아 복수를 다짐했고 십 년 가까이를 복수에만 매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끝을 맞이했다. 엎드려서 하염없이 울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지만 지금만큼은 멈추고 싶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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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은 조의를 표하고 본격적인 작업에 들어갔다. 드래곤의 시체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버릴 것이 없었다. 녀석의 몸 상부를 뒤덮고 있는 비늘은 그 어떤 금속보다도 단단한 재료였으며 피의 효능은 직접 경험하지 않았던가. 뿔과 발톱, 힘줄, 고기 등등 놓칠 것이 없었다. 그러나 내 관심은 다른 곳에 있었다.
이 모든 것을 챙기지 못하더라도 단 하나만 챙길 수 있다면 지금까지의 고난은 충분히 감수할 만한 고난이었으니까.
드래곤 하트.
단순히 이야기로만 전해 내려오는 것이 아니었다. 지난번의 전투에서 실제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으니까. 드래곤 하트는 단순히 피를 돌리는 심장이 아닌 마법사들과 같이 모든 마력을 통제하고 쌓아가는 하나의 저장고였다.
녀석이 브레스를 뿜어낼 때, 입가에 모인 마력의 태반은 드래곤 하트로부터 나왔다. 대기의 마력을 끌어다 사용하긴 했지만 그 정도 양의 마력을 제어할 수 있는 기반이 심장이라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인 만큼 마법사로서 절대 놓칠 수 없는 전리품이었다.
“크. 더럽게 단단하군.”
남는 미스릴과 강철로 만든 명검에 예리(銳利)의 각인을 새겼다. 각인을 활성화함과 동시에 마력을 밀어 넣어 오러로 덮었다. 효율이 무척이나 나빴으나 길게 사용하지 않을 테니 괜찮겠지.
팅- 팅-
“힘들겠는걸.”
뛰어난 기사들도 흠집을 내는 것에 만족해야 했을 만큼 베기에 있어서만큼은 최강의 강도를 가진 비늘이었다. 각인의 힘을 빌린다 하더라도 가능성이 낮을 것은 예상하고 있던 바.
‘밑에서부터 벗겨내야겠군.’
오러로 뒤덮인 명검으로도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애초에 마법사인 내가 오러를 뿜어내봤자 기사들보다 뛰어날 리 없었으니까. 그저 넘치는 마력으로 비효율적인 수고를 들일 뿐. 그럼에도 가죽 정도는 충분했다.
그렇게 몇 시간이 흘렀을까. 마침내 내 손아귀에 녀석의 심장이 들어왔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5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