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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64화 (64/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4화 - >

브레스.

드래곤에게 주어진 가장 강력한 무기. 모든 것을 불태우고 잿더미로 만드는, 목표가 된 대상에게는 죽음 외의 선택지를 주지 않는다는 압도적인 위력.

‘이건······차원이 다르잖아.’

브레스를 처음 마주하는 것은 아니었다. 드래곤의 아종으로 분류되는 몬스터들이라면 비장의 한 수로 가지고 있는 것이 브레스였으니까. 그러나 지금까지 마주했던 몬스터들의 브레스와 눈앞에서 보이는 광경의 괴리는 너무나 컸다.

가장 대표적인 아종이라고 불리는 드레이크가 수십 마리, 아니 수백 마리는 모여야 흉내라도 낼 수 있을까. 막아내거나 흘려보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압도적인 마력에 머리가 하얘졌다. 감안은 하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이야. 그리고 녀석의 입가로 마력이 모여드는 것이 끝났을 때, 퍼뜩 정신을 차렸다.

콰아아-

“미친.”

들이치는 브레스에 황급히 몸을 움직이고서야 내가 있던 자리를 쳐다볼 수가 있었다. 꽤나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언제까지고 그 곳에서 자리를 지킬 것만 같았던 대지가 열기를 이기지 못하고 녹아내리는 모습은.

자글자글-

전의를 상실했다는 수준까지는 아니었으나 지금 당장은 무슨 수를 써도 대처할 수 없다는 것은, 피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러는 사이 녀석은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순간적인 이동을 통해 녀석의 시야에서 몸을 감출 수는 있어도 그에 따르는 마력 반응까지 숨길 수는 없었으니까. 계속해서 몸을 이동했지만 놓치지 않겠다는 듯 따라붙는 브레스는 모든 것을 휩쓸어버리는 천재지변이나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 어떤 천재지변도 영원히 지속되지는 않았다.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양의 마력도 결코 무한은 아니었으니, 작렬하던 브레스도 끝은 있었다.

‘몇 번 안 남았어.’

심장이 조여드는 듯한 이 느낌. 짧은 시간에 다량의 마력을 운용했을 때의 느낌이었다. 단번에 수백 미터를, 한 번도 아니고 몇 번씩이나 이동했으니 마정석으로부터 대부분의 마력을 빌렸다하더라도 회로 자체에 무리가 따를 수밖에 없었다. 더 무서운 것은 그 파격적인 이동을 따라오는 브레스이긴 했지만.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마력의 폭풍이나 다름없는 브레스로부터 살아남았다. 미리 준비해놨던 안배가 칠 할 이상 날아가 버리긴 했지만, 일방적으로 때린 것 치고는 오히려 내가 더 지쳐버렸다는 사실이 아이러니했지만 어쨌든 다음 기회가 있다는 것이 중요했다.

‘체급 차이가······. 어마어마하긴 하군.’

나는 수십 번을 때려도 티가 안 나는데 상대는 단 한 번의 공격으로 나를 궁지로 몰아넣었다. 정타로 맞은 것도 아닌 여파만으로. 그야말로 압도적인 체급 차이라고 밖에 할 수 없었다.

‘이대로 가면 내 패배다.’

직감했다. 지금까지 해왔던 대로 소모전을 계속한다면 결말은 내 패배로 이어진다고. 아직 준비해놓은 재고에는 여유가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는 큰 의미가 없으리라는 것을. 조금 더 위험을 무릅쓰더라도 녀석의 급소를 파고들어야 한다고.

달칵-

쾅- 쾅- 쾅-

마정석을 활용한 폭발(爆發)물이 녀석의 눈앞에서 터졌다. 화력은 물론이거니와 시야를 가리는 검은 연기는 덤. 그리고 그 검은 연기를 뚫고 앞으로 나아가자 마주하는 녀석의 눈.

투둥-

곧바로 [발톱]을 쏘았지만 녀석도 똑같은 방법으로 두 번 당하지는 않겠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돌렸기에 원하는 목적을 이루지는 못했다. 게다가 [발톱]은 [이빨]보다 관통력이 부족할 수밖에 없었기에 입사각이 좋지 못했던 탄환들은 두꺼운 비늘을 뚫지 못하고 튕겨져 나갔다.

‘괜찮아. 할 만해. 아직 할 만하다고.’

그 동안의 훈련이 빛을 발휘했다. 지크 후작의 말처럼 녀석 또한 피와 살로 이루어진 생명체. 결국 관절이 허락하는 범위 내에서밖에는 움직일 수 없었다.

거대한 덩치 덕분에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꽤나 불편했지만 지금은 오히려 큰 덩치 덕분에 움직임을 파악하는 것이 쉬웠다. 녀석 딴에는 섬세한 움직임을 보인다고 하더라도 내 입장에서는 눈에 확 띌 수밖에 없었으니까.

타다닥-

녀석의 목을 타고 오르며 벌어진 입 사이로 특제 폭탄을 까 넣었다. 방금 전에는 시야를 가리는 것만으로 만족을 해야 했지만 단단한 비늘과 가죽으로 뒤덮인 겉면이 아닌 비교적 약한 부위인 입 내부인 만큼 연기만을 남기지는 않으리라.

쿵-

그러나 효과가 있는 지는 불확실했다. 이빨 사이사이로 검은 연기가 뿜어져 나오기는 했지만, 녀석이 고개를 휘젓기는 했지만 그 행동이 머리 위로 올라가려는 나를 견제하기 위함인지, 폭탄으로 인한 충격을 해소하기 위함인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에 개의치 않고 머리 위로 올라가려는 나를 떨어뜨려내려는 듯 이리저리 움직이는 녀석. 그러나 그 짧은 다리로는 제대로 견제를 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리고 단순히 몸을 뒤흔드는 정도로 균형을 잃고 떨어질 정도로 감각이 없지는 않았다.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았다. 단 한 번도 사람의 발길을 허용하지 않은 곳에 발을 디딘 기분은. 무엇보다도 모든 생명체의 약점이라고 할 수 있는 머리. 그 약점을 내게 대놓고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꽤나 만족스러운 것이었다.

철컥-

몸은 녀석의 움직임에 따라 휘청거리면서도 두 다리는 녀석의 머리에 뿌리를 내린 듯 일말의 요동도 없었다. [이빨]의 총구를 녀석의 머리 바로 위에 대고 방아쇠를 당겼다.

한 발 한 발, 탄환을 발사할 때마다 녀석의 몸부림이 거세졌다. 그러나 그에 휘말리지 않고 탄환이 장전되는 대로, 똑같은 위치로 쏘아냈다. 몇 번이나 방아쇠를 당겼을까, 제로거리에서 쏘아지는 연발 사격까지 재생력으로 버틸 수는 없었는지 지금껏 어떤 상황보다 발광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것도 지금 뿐이다. 두개골을 뚫고 뇌에 탄환이 닿는 순간, 상황은 종료될 테니. 설마 뇌까지 근육질이지는 않겠지. 그러나 그 소망은 잠시 후로 미뤄두어야만 했다.

“커헉!”

우당탕탕-

예상하지 못한 막대한 충격이 몸을 덮쳐왔다. 무슨 상황이 벌어진 것인지 파악하기 전에 내 몸부터 간수를 해야 했다. 몸이 욱신거리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제대로 숨을 쉬기가 어려웠으니까. 갑옷에 새겨진 각인이 일차적인 보호를 해주었음에도 이 정도 충격이라면 맨 몸으로 받았을 때, 그대로 몸이 터졌어도 이상하지 않았으리라.

“허억. 허억.”

간신히 몸을 추스르고 나서야 충격의 원인을 파악할 수 있었다.

휘잉- 휘잉-

하나 남은 눈으로 나를 죽일 듯이 쳐다보는 녀석. 그리고 그 뒤로 거센 바람과 함께 공간을 찢을 듯 휘둘러지는 꼬리. 녀석의 머리 위에 있던 나를 파리마냥 휘둘러 친 파리채는 분명 저 꼬리이리라.

‘죽을 뻔했군. 그대로 요단강을 건널 뻔 했어.’

움직일 때마다 늑골이 뻐근하다. 갈비뼈라도 부러진 모양이지. 그래도 괜찮다. 잠깐 주의를 잃어버린 대가가 갈비뼈 몇 개 부러진 정도라면 싼 값 아니겠는가. 무엇보다 회복(回復)의 각인이 마력을 빨아들이며 실시간으로 몸을 치료하고 있었다. 물론 뼈가 부러진 만큼 하루 이틀의 시간은 걸리겠지만 전투를 이어갈 수 있는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손에서 놓쳐버린, 그리 멀지 않은 곳에 방치되어 있던 [이빨]을 다시 집어 들었다. 아직 전투는 끝나지 않았으니까. 복수의 대상이 입에서 불길을 내뿜으며 나를 노려보고 있었으니까. 마지막으로 아직 나는 싸울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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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아. 하아.”

등을 기대고 있던 물체로부터 서서히 미끄러져 내려온다. 텅텅 빈 벌판에 기댈 것이 어딨냐고? 여기 있잖은가. 방금 전까지 최후의 발악을 하겠다는 듯 브레스를 내뿜으며 평야를 지옥으로 만들던 드래곤이. 덕분에 주변에는 발 디딜 틈 없이 후끈후끈했지만 적어도 자기 묏자리까지 엉망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나보다.

“그나저나 꼴이 이래서야······. 누가 오기라도 하면 꼼짝없이 죽겠군.”

끝났다. 녀석은 턱 밑에서부터 정수리까지 뚫린 끝에 뇌가 박살나며 죽었다. 드래곤도 장기까지 단련할 수는 없었던 모양이지.

물론 나라고 멀쩡한 것은 아니었다. 갈비뼈는 몇 개 더 부러진 듯했고 왼팔도 들어 올릴 수가 없었다. 오른발목이 부러진 것은 덤. 그 뿐이랴, 체내의 마력을 전부 끌어내 쓴 것뿐만 아니라 외부의 마력까지 한계 이상으로 쓴 탓에 회로뿐만 아니라 서클도 부서질 듯 흔들렸다. 치료에만 집중하더라도 한동안은 마력을 운용하는 행위 자체를 금해야만 하리라.

‘그래도 살아남은 건 나다. 그게 중요한 거다.’

다행이 전투가 격렬했기 때문일까, 주변의 몬스터들은 겁이라도 먹은 것인지 코빼기도 보이지 않았다.

“하하, 하하하!”

웃을 때마다 부러진 갈비뼈 부근에 쿡쿡 찔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웃음을 참을 수 없었다. 기쁘지 아니한가. 전설상의 존재와 맞닥뜨린 것도, 승리를 거둔 것도. 단순히 그 뿐만이 아니었다. 오러로도 흠집밖에 낼 수 없었던 비늘도, 뒤집어쓰는 것만으로도 재능을 몇 단계나 올려주었던 피도 모두 내 것이었으니.

“아.”

그 때였다.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시선이 흔들거리는 것은. 점점 감겨오는 눈꺼풀에 차마 저항하지 못하고 잠에 빠져들었다. 마지막으로 다시 눈을 떴을 때, 등 뒤의 시체가 그대로 있기를 바라며.

#

“끝났어! 끝났다고!”

다음 날, 일어났을 때 당연한 말이지만 드래곤의 시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그리고 그제야 제대로 된 실감이 났다. 자그마치 십 년 가까이를 끌고 온 복수가 끝이 났다고. 이제 돌아가기만 하면 된다고.

“크하, 으하하하, 하하하하!”

웃을 때마다 몸이 욱신거린다. 고작 반나절로 회복될 만한 상처가 아니었기에. 마정석의 마력을 끌어다 쓰는 것도 부담되어 내 목숨을 구해준 갑옷조차 움직임을 거슬리게 만드는 족쇄에 불과했다.

“끄응.”

철커덩- 철컹-

움직임에 방해가 될 뿐인 갑옷을 가까스로 벗어 던지고서 살짝 마력을 끌어올려 구멍을 파냈다. 겉면이 돌로 이루어진, 사람 한 명 들어갈 만한 크기의 구멍을. 고작 이 정도 마법을 구사하는데 손이 벌벌 떨리는 것을 보고 있자니 내가 얼마나 약해져있는가 실감이 되었지만 괜찮았다. 주변에 적은 없었으니까. 아마 한동안은 없을 터였다.

지성이 있는 인간이라면 갑자기 조용해진 것에 의문을 품고 찾아오겠지만 생존의 본능이 앞서는 몬스터들이 굳이 위험을 무릅쓰고 찾아오지는 않을 테니까.

부욱-

녀석의 피를 구멍에 받아냈다. 워낙 덩치가 컸기에 조금의 노력만으로도 구멍을 가득 채울 정도의 피가 금세 모였다.

“후.”

약간의 피를 뒤집어쓴 것만으로도 진화에 가까운 성장을 하게 해주었다. 그렇다면 머리부터 발끝까지 피에 몸을 담그면 어떻게 될까.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이야기 중 이와 비슷한 행동을 한 영웅이 있었다.

북유럽 신화의 대영웅, 지크프리트.

사룡 파프니르를 죽이고 피를 뒤집어 써 불사신의 반열에 오른 인간. 그 최후는 보잘 것 없었지만 그가 남긴 행적만으로도 대영웅이라 불리기 충분한 사람이었으니, 선구자의 길을 따라 가볼 생각이었다.

첨벙-

발가락부터 시작해 발목, 허벅지, 엉덩이, 배와 어깨, 이내 머리까지. 드래곤의 피로 이루어진 웅덩이에 전신을 맡기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4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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