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3화 - >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으며 적을 모르고 나만 안다면 그 중에 반절을, 적을 모르고 나까지 모른다면 싸울 때마다 위험에 빠질 것이다. 그러나 정말로 백 번 싸워 백 번 이기고 싶다면 알고 있어야 하는 것이 하나 더 있었다.
적에게도 나에게도 속하지 않은, 양 측 모두에게 영향력을 끼치는 중립적인 요소, 지형. 때론 적을 아는 것보다 지형을 파악하는 것이 더 중요할 정도로 전투에 있어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딱히 몸을 숨길만 한 곳은 없나.’
어떠한 굴곡도 없는 평야. 중간 중간 나무가 솟아있고 거친 풀이 자라고 있었지만 몸을 숨길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 차라리 숲 혹은 절벽처럼 시야를 가리거나 움직임을 구속할 수 있는 지형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그러나 주변에 그런 지형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녀석이 그 쪽으로 움직일 동안 기다릴 수도 없었다.
불만은 조금 있었지만 평야도 내게 있어 나쁜 지형은 아니었다. 이점은 없지만 단점도 없다. 녀석의 움직임에 제약이 없는 만큼 나 또한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었고 예상치 못한 변수가 등장하지 않으리라는 점에서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중간이라고 할 수 있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나의 입장에서는 아쉬움이 남을 수밖에 없긴 했지만.
나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다. 그렇다면 저 녀석에 대해서는 어떨까. 겉을 두르고 있는 검붉은 빛의 비늘은 강철보다도 단단했다. 오러가 둘린 검으로도 흠집조차 내지 못했으니 강도에 대해서는 두말할 필요가 없었다.
힘은 덩치에 걸맞게 강력했으며 무엇이든 찢어발길 수 있는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도 있었다. 그 위력은 코앞에서 마주한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뿐이라면 승산은 있었다.
나에게도 비늘을 뚫을 수 있는, 녀석 못지않게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이 있었으니까. 또한 비늘이 모든 부위를 감싸고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족보행일 때, 땅과 마주하는 대부분의 부위는 비늘이 아닌 가죽으로 되어 있는 만큼 충분히 공략할 수 있었다. 가죽이라고 해서 약하고 연한 것이 아닌 단단하고 질겼지만 비늘에 비할 수는 없었으니까.
‘문제는 단순히 그게 끝이 아닐 거라는 건데······.’
녀석과의 전투는 딱 한 번, 그것도 압도적인 차이 끝에 패배했다. 그 과정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녀석의 압도적인 신체 능력. 그러나 그것뿐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사용하지 않는 건지, 사용하지 못하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내 생각은 사용하지 않는 쪽의 손을 들어주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피를 뒤집어쓴 것만으로도 마법사로서의 재능을 몇 단계는 뛰어넘었다. 그야말로 기연 중의 기연. 그런 피를 몸속에서 돌리고 있는 녀석이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웃긴 이야기 아니겠는가.
차라리 그 당시의 우리들에게는 마법을 사용할 필요조차 없었다고 보는 것이 훨씬 가능성 높은 판단일 것이다.
“마법만이 아니라 브레스도 있고, 위기에 처하면 동료를 부를 수도 있고······.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막막하기 짝이 없군.”
나에게 있어 변수. 녀석에겐 상수. 그나마 다행인 건 예측 불가능한 변수는 아니라는 것. 물론 변수에 대처할 수 있느냐 없느냐는 전혀 다른 이야기이기는 하지만.
다행이 녀석은 식사를 마치고 부른 배가 꽤나 만족스럽다는 듯 눈을 감은 채, 수면을 취하고 있었다. 장소로 보나 그 전까지의 행동으로보나 길게 잠든 것이 아니라 짧은 낮잠 수준에 불과하겠지만 그것만으로도 사전준비를 끝내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쿡- 쿡- 쿡-
“자, 그럼 시작해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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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과 나의 거리는 대략 1.5km. 20m에 가까운 크기를 자랑하는 녀석이 손톱보다도 작게 보일만큼 압도적인 거리. 그조차도 내가 상공 수십 미터에 떠있기 때문이지, 발을 땅에 딛고 있었다면 한낱 점에 불과했을 것이다. 아니, 보이기는 했을까 의문스럽다.
그러나 지금 내 시야에는 녀석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비늘 한 점 한 점이 생생히 보일 정도는 아니었지만 녀석의 움직임을 확인할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멀리 볼 견)을 활용한 스코프 덕분에, 또한 마력이 존재하는 한 중력의 영향을 받지 않도록 조절도 해두었기에 제대로 조준만 이루어진다면 빗나갈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았다.
두근두근
침착해야 하는데 가슴이 요동친다. 어쩔 수 없다. 내가 살아온 인생이 길지는 않지만 짧지도 않다. 그 중 삼 할 동안이나 걸어왔던 길이 길어야 하루면 결말을 볼 수 있었다. 그 누가 달아오르지 않을까.
철컥-
한 발, 두 발, 세 발, 네 발, 다섯 발, 여섯 발.
지금껏 제작한 탄환들 한 발 한 발이 모두 심혈을 기울여 만든 것들이지만 이 여섯 발은 한층 더 특별했다. 녀석과의 전투의 시작을 알릴 축포였으니까. 그와 동시에 내가 일방적으로 녀석에게 공격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고. 두 번 다시 찾아오지 않을 기회를 허투루 날릴 수는 없었으니까.
후우웅-
상공 수십 미터에서 내려다보는 광경은 참으로 아찔했다. 세찬 바람이 귓가를 스치고 지나가며 총구 또한 바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가 없었다. 만약 총구뿐만 아니라 총알까지도 영향을 받았다면 이런 장거리 저격은 시도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리고 보다 빨리 녀석에게 들켰겠지.
퉁-
그리고 이제는 들키는 걸 피할 수 없다. 제 아무리 거리가 방패가 되어 나를 숨겨준다고 하더라도 녀석이 바보가 아닌 이상 여섯 발을 전부 발사할 때까지 기다려주지는 않을 테니까.
철컥-
아니나 다를까. 두 번째 탄환을 발사하기 위해 준비 과정을 걸치는 사이, 단잠을 깨운 방해꾼을 가만 놔두지 않겠다는 듯 울부짖는 녀석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나 내 위치를 파악하지는 못했는지 주변을 휩쓸기만 할 뿐이었다.
두 번째까지는, 운이 좋다면 세 번째까지는 위치를 들키지 않을 수 있으리라. 그래봤자 네 번째 혹은 다섯 번째 탄환을 발사할 때쯤이면 무슨 수를 쓰더라도 내 눈앞에 녀석이 들이닥치겠지만 이미 대책을 세워놓았으니 괜찮다.
퉁-
철컥-
퉁-
운이 좋았다. 세 번째 탄환까지 발사가 끝났을 때서야 녀석은 내 위치를 파악했는지 날개를 펼치며 날아오르기 시작했으니까. 최소한 네 번째 탄환까지는, 최대로 잡으면 다섯 번째 탄환까지는 쏠 수 있으리라.
철컥-
퉁-
철컥-
퉁-
워낙에 덩치가 컸기에, 탄환의 속도에 더해 녀석이 달려드는 속도까지 더하자 탄환은 스펀지에 손가락을 집어넣는 것처럼 너무나 수월하게 비늘을 뚫고 녀석의 몸 안으로 파고들었다. 물론 데미지를 입은 듯한 모습은 아니었지만.
‘아직까지는 예상 내다.’
한 발만 남은 것도, 녀석에게 그럴 듯한 데미지가 없는 것도, 녀석의 이빨에 낀 때가 보일 정도로 나에게 접근한 것까지. 예상보다 좋았으면 좋았지, 나쁜 것은 없었다.
‘그래도 이제는 움직이지 않으면 위험하겠군.’
순식간에 시야가 반전한다. 땅과는 거리가 멀었던 내 다리는 어느새 땅과 맞닿아 있었고 비늘 하나하나가 보일 정도로 접근했던 녀석과는 또 다시 상당한 거리가 벌어져 있었다. 한 발 정도는 충분히 쏠 수 있을 정도로.
녀석 또한 갑자기 사라진 내 모습에 어리둥절히는 것도 잠시, 그새 내 위치를 파악하여 달려들었다. 한 쪽밖에 남지 않은 눈으로 내 모습을 확인했다기보다는 몸을 이동시키는 과정에서 발생한 마력 반응에 반응한 것이라고 봐야할 터.
퉁-
마지막 한 발을 쏘고는 또 다시 자리를 이동했다.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기 위해서. 사전 준비를 한 보람이 있다. 이 조금의 시간을 벌기 위해 다량의 마정석이 투입되었지만 그 값은 충분히 하고 있었다.
‘과연 통할까?’
숫자 6.
예부터 불길한 숫자로 꼽히며 많은 사람들로부터 기피된 숫자. 재밌는 건 이런 사람들의 인식이 실제로 마법을 사용함에 있어서 영향을 준다는 점이었다. 행운이 필요한 때, 7에 관련된 숫자를 최대한 많이 부여하는 것처럼.
6발의 탄환, 6개의 마법, 육망성의 구조까지.
석화, 빙결, 마비, 혼란, 맹독, 실명의 일차적인 각인뿐만 아니라 666이라는 의미 위에 쌓아올린 저주는 결코 가볍게 무시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상대는 드래곤. 스승님으로부터 조건만 제대로 맞춰진다면 그 어떤 녀석도 저주의 영향을 피해갈 수 없을 거라며 박수갈채까지 받았지만 방심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이어진 녀석의 모습에 나는 드디어 이번 승부에 대한 자신감을 얻을 수 있었다.
‘통한다!’
아주 조금이었다. 왼쪽 뒷발에서 석화가, 오른쪽 앞발에서는 빙결이, 또한 하나 남은 눈동자는 초점을 잡지 못한 듯 이리저리 흔들렸다. 내 마법이 녀석에게 통한다는 것, 지금까지 쉬지 않고 달려온 것이 결코 무의미하지 않았다는 것.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촤르르륵-
아공간으로부터 미리 준비된 탄환들이 나열되어 나온다. 특수한 목적을 가진 탄환이 아닌 오직 살상에 목적을 둔 탄환들. 꺼내어 혁대에 매달고서는 다시 공중으로 뛰어올랐다.
동시에 내가 있었던 자리를 녀석의 앞발이 내려찍으며 파편이 튀었다. 이곳저곳에서 얼음 조각들이 눈에 뜨였지만 아직까지 유의미한 효과를 보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에테르 윙을 통해 날아다니며, 때때로 신발에 각인된 도약(跳躍)의 효과를 톡톡히 보며 거리가 벌어지면 [이빨]을, 녀석을 스치고 지나갈 땐 [발톱]을 쏘아내며 공중전을 펼쳤다. 단 한 시도 시야가 고정되지 않고 180도 회전하는 극한의 상황 속에서 멀미가 날 법도 했지만 이런 상황이 벌어질 것이라 예측했었던 만큼 연습과 마법의 힘으로 무마할 수 있었다.
투둥- 퉁-
전투는 의외로 단순하게 흘러갔다. 녀석은 입, 발, 꼬리 혹은 그 거대한 덩치를 이용해 나를 압살하려 했고 나는 교묘하게 빠져나가며 녀석의 몸에 탄환을 박아 넣었다. 중간에 다른 마법들도 섞어봤지만 단단한 비늘 앞에서는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오히려 공격은 [이빨]과 [발톱]에 맞기고 마법은 유틸에 집중하는 것이 효율이 좋았다.
물론 탄환이라고 하여 사정이 좋은 것은 아니었지만. 일단 파고든 다음 남은 마력을 활용하는 만큼 일반 마법보다는 확실하게 데미지를 줄 수 있었지만 워낙 덩치가 크기 때문인지 혹은 재생력이 데미지를 앞서는 것인지 지금까지 수십여 발을 박아 넣었음에도 큰 타격을 입은 것 같지는 않았다.
쩌적-
그럼에도 희망적인 요소는 있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저주의 잠식이 빨라지며 녀석이 불편해하고 있다는 것이 한 눈에 보이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왜 가만히 있지?’
물론 정말로 가만히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치지도 않는지 긴 꼬리와 날개 등 몸의 모든 부위를 활용하며 잠시도 방심할 수 없게 만들었으니. 그러나 그것뿐이었다. 내가 사전에 경계했었던 변수는 지금까지도 숨을 죽이고 있을 뿐, 나타날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아니면 사용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못하는 건가?!’
큰 영향은 아니다. 그러나 가만히 두고 볼만큼 가볍지도 않았다. 잠시 움직임을 멈춘다하여 큰 위기가 다가오는 것도 아닐 텐데, 내가 아무리 심혈을 기울였어도 마법의 종주라 불리는 드래곤이라면 어렵지 않게 파훼가 가능할 텐데.
‘설마.’
마법의 종주라 불리며 전설상의 존재로 추앙받는 드래곤이 사실은 마법을 사용하지 못한다니, 꽤나 재미있는 사실 아닌가. 전 세계의 동화 속 내용을 모조리 갈아엎어야 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때, 녀석의 입이 열렸다.
지금까지와 같이 나를 물어뜯으려 하는 행동인 줄 알았다. 그러나 곧 평범한 물어뜯기가 아님을 깨달았다. 녀석의 입 주변으로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막대한 양의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으니까.
내 예상이 틀리지 않는다면 이건 분명
‘브레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3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