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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62화 (62/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2화 - >

테라 방벽을 떠나는 나의 손은 가벼웠다. 적어도 몇 개월에서 길게는 년 단위의 시간을 인간의 흔적을 찾아볼 수 없는 몬스터의 대지에서 보내야 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미치지 않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내 계획 그 어디를 찾아봐도 갈증으로, 허기짐으로 탈진해서 쓰러진다는 계획은 없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준비를 했으며 그것들은 내 손이 아닌 아공간에 차곡차곡 정리되어 있었다.

식량, 물, 옷, 신발, 마정석과 탄약 등등, 아공간이 그리 작지 않은 공간임에도 불구하고 빈 공간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어차피 아공간 내부에 존재하는 이상 시간이 흐른다고 하여 부패하거나 닳아 없어지는 것이 아닌 만큼 과도하다싶을 정도로 채워 넣은 것은 부정할 수 없었지만.

과유불급.

정도를 지나치면 미치지 못한 것과 같다는 사자성어.

다다익선.

많으면 많을수록 좋다는 사자성어.

하지만 부족한 것이 더 좋다는 사자성어는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부족한 것보다는 과한 것이 차라리 낫지 않겠는가. 최소한 더 최악의 상황은 피할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이내 곧 정신을 차렸다.

“쓸 데 없는 생각 그만하고 집중하자.”

이 곳은 테라 방벽 내부가 아니다. 대륙에 존재하는 금지들 중에서도 한 손가락에 꼽히는 금지, 몬스터의 대지다. 내가 아닌 그 누가 오더라도 여유는 부릴 수 있을지언정 방심은 할 수 없는 곳. 그렇다면 나도 그 품격에 걸맞은 태도를 보여줘야겠지.

목표는 현재 위치로부터 서북쪽. 오래 전, 드래곤이라고 불리는 전설상의 존재를 내 눈으로 확인했던 이름 없는 산. 내 발걸음이 빨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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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와 시야에 의지해 방향을 잡았다. 테라 방벽은 넓었기에, 그리고 그 넓은 대지가 대부분 평야로 이루어져 있었기에 조금만 정신 줄을 놓았다가는 방향을 잃기 십상이었다.

지도 또한 절대적인 방향이 아닌 내가 바라보고 있는 방향을 기준으로 탐색을 시작하기에 꽤나 곤란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내가 일직선으로 가고 있다는 감각조차 애매한데 매번 지도를 활성화상태로 유지할 수는 없었으니까.

그럼에도 서북쪽이라는 대전제를 유지한 상태로 중간 중간 맞부딪치는 몬스터를 상대하며 꾸준히 북상했다. 때론 쥐죽은 듯 숨어 지내기도, 피하기도, 처리하기도 했으나 단 하루도 몬스터를 만나지 않은 날이 없었다.

그렇게 해가 떠오르고 지고를 반복하며 시간은 흘러갔고 나는 도착했다. 내 인생에 있어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내가 죽는 그 날까지 결코 잊을 수 없는 추억을 안겨준 그 장소에. 그러나 나는 곧 내 눈을 의심했다.

추억의 장소에 돌아왔건만 정작 추억을 안겨주었던 놈이 없었으니까.

“젠장!”

지도는 아무런 문제없이 작동하고 있건만, 지도가 보여주는 것은 마력 반응과 지형 뿐, 산 속에서 마력 반응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대단치는 않은 반응들. 녀석의 반절의 반절에도 미치지 못하는 반응들뿐이었다.

“안일했다.”

산을 이 잡듯이 뒤졌다. 내가 아무리 기억력이 좋다고 하더라도 칠 년이 지난 지금, 동굴의 위치를 기억하고 있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기에 지도의 도움을 받았다. 애초에 크기 자체가 그리 크지 않은 산이었기에 동굴의 입구를 찾는 일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진 않았다.

그리고 나는 인정해야만 했다. 내가 안일했다는 것을. 그 때, 녀석이 이 곳에 있었다고 지금도 이 곳에 머무를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었는데, 멍청하게도 아직도 이 곳에 있을 거라 지레짐작했다는 것을.

“멍청하기는. 헛배웠다. 헛배웠어.”

아예 생각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드래곤에게는 레어라고 불리는 자신의 보금자리를 떠나지 않는다고 알고 있었기에. 사람이 집을 떠나지 않는 것처럼. 그리 생각하는 건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직 놔버리기엔 이르다. 서둘러 동굴 내부를 탐색했다. 지금 이 장소에 녀석이 없다지만 아예 떠난 것이 아닐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다면 흔적이 남아있을 테니까. 그리고 그 판단은 반절은 맞고 반절은 틀렸다. 흔적은 남아있었지만 원치 않는 쪽으로 결론을 내리게 만드는 흔적들이었으니까.

부패할 대로 부패하여 원래의 형상을 알아볼 수조차 없게 변한 몬스터의 시체와 각종 부산물들. 여름이 되어도 다른 곳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시원하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꽤나 오랜 시간동안 방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삐끗-

첫 발부터 삐끗한 것이다. 혹시나 모를 희망을 가지고 며칠 동안 주변에서 잠복하며 녀석이 오기를 기다렸지만 녀석의 비늘 한 조각조차도 마주할 수 없었다. 결국 목마른 자가 우물을 파는 법. 녀석의 행방을 찾기 위해서 직접 발품을 파는 수밖에는 없었다. 그러나 쉬운 일일리가 없었다.

첫째로 몬스터의 대지는 너무 넓었다. 사람 한 명의 존재는 모래사장의 알갱이 하나에 불과할 정도로. 녀석 또한 다른 상위종들 몇 마리를 합쳐놓은 크기를 자랑했지만 그래봤자 모래보다 조금 더 큰 바늘 정도일 뿐, 결국 모래사장에서 바늘을 찾는 것처럼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둘째로는 지도(地圖)는 만능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나를 중심으로 지도는 정확히 반경을 탐색한다. 마력을 집중하면 송곳처럼 일정한 부분만, 더 긴 영역을 탐색할 수도 있었지만 효율이 좋지 않았다. 추가로 볼 수 있는 영역도 좁았고.

물론 지금은 효율 같은 것을 따질 때가 아니라는 것은 명명백백한 사실이다. 녀석의 꼬리를 한 번 찾을 수만 있다면 얼마의 시간이 걸리든 따라가는 것쯤은 어렵지 않으니. 그러나 이건 효율 이전에 한계치의 문제였다.

각인은 만능이 아니다. 만능처럼 보이지만 절대로 만능이 아니었다. 각인을 제대로 활용하기 위해서는 바탕이 되어줄 밑재료가 필요했고 지도의 재료는 종이였다. 평범한 종이가 아닌 마력을 최대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제작된 양피지이긴 했지만.

그리고 양피지가 받아들일 수 있는 마력의 한계, 나를 중심으로 반경 5km의 반응. 그것이 곧 지도의 한계였다.

결국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일정 거리를 이동한 뒤, 지도를 통해 녀석의 존재를 확인하는 것. 진실 된 의미로서의 발품일 수밖에 없었고 극악의 효율을 자랑할 수밖에 없었다. 한 번 탐색한 지역이라고 하여 녀석이 지나치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었으니까. 최악의 경우 몬스터의 대지 전역을 탐색했음에도 녀석을 발견하지 못할 수도 있었다.

‘그럴 수는 없지.’

몇 년이 걸릴지 알 수 없는 일인데, 심지어는 그 시간이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시간낭비가 될 수도 있다니. 최악을 상정한 일이기는 했지만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 일인 만큼 대책이 필요했다.

다행인 점이라면 재료는 충분하다는 점. 허점을 메울 방식만 결정한다면 아공간 내에 보관되어 있는 재료들과 현지 조달을 통해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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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은 깊었지만 결정은 빨랐다. 먼 거리에서도 녀석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는 가장 효율적인 방법을 생각한 뒤, 그에 필요한 장비를 만들어냈다.

방법은 간단했다. 녀석의 위치를 파악할 신호기를 만드는 것. 그리고 일정 거리마다 신호기를 배치해놓음으로서 녀석의 존재가 확인되면 멀리 떨어져 있는 내게 신호를 보내는 것. 정확한 위치를 모르더라도 주변에만 위치한다면 지도를 통해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있기에 이 정도면 충분했다.

많은 마력이 필요하지도 않았으며 정밀함이 아닌 양이 중요했기에 아공간에는 급조한 신호기들이 수북이 쌓이기 시작했다. 내구도는 누군가 발로 강하게 치면 부서질 정도로 약했고 신호를 보내는 것도 일회용에 불과했으며 탐색 범위도 반경 수백 미터에 불과했다.

시간을 들여 제작한 것이 아닌 현장에서 급조한 물건이니만큼 만족스러운 성능은 아니었으나 어차피 녀석을 잡기 위한 일회용 그물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충분하다고도 볼 수 있는 성능이었다.

‘나중에 더 개량을 해봐야겠어. 조금만 응용하면 괜찮은 물건이 나올 것 같은데.’

마법사로서의 연구욕이 불타올랐지만 지금은 더 급한 일이 있는 만큼 잠재웠다. 어차피 이번 일이 끝나면 남는 것이 시간일 터, 그 때는 얼마든지 연구욕을 불태울 수 있으리라.

모든 준비가 끝난 다음 날부터 나는 다시 몬스터의 대지를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일정 거리 이동 후에 신호기를 설치하고 또 다시 일정 거리를 이동하여 신호기를 박은 뒤 지도를 확인하는 행위의 반복.

지루한 일이었지만 집중력을 잃지 않은 채, 빈틈이 없도록 최선을 다했다. 혹여 녀석이 빈틈을 비집고 들어가더라도 빠져나갈 수는 없도록 수 겹, 수십 겹의 신호기가 그물을 이룬 채 기다리고 있겠지만.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지났다. 겨울이 다가왔지만 되돌아갈 생각은 없었다. 본격적인 전투가 벌어지는 것도 아니었으며 출발할 때, 과할 정도로 가져온 물품들은 예상외의 사태에도 불구하고 든든히 나를 뒷받침해주었다. 그렇게 한치 앞도 볼 수 없는 눈보라 속에서 조금씩 영역을 넓히고 있을 때, 깜깜무소식이었던 신호기가 드디어 제 역할을 다하기 시작했다.

반짝- 반짝- 반짝- 반짝-

수 개의 신호기가 연속해서 신호를 보내온다. 방향은 현재 위치에서 남서쪽, 작업을 시작했던 이름 없는 산으로부터는 북쪽으로 빠른 속도로 북진 중이었다.

“잡았다.”

반 년 하고도 반의 반 년. 근 일 년이 다 되어서야 녀석의 그림자를 붙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그림자를 절대로 놓치지 않을 생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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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호는 더 이상 울리지 않는다. 애초에 일회용이었으며 설치하지 않은 지역에서까지 신호가 울릴 수는 없었으니까. 나는 마지막 신호가 울린 곳에 도착해 녀석의 이동 방향을 따라 움직였다. 아무런 장애물도 없는 이 곳에서 하늘을 날아다니는 녀석이 목표를 향해 일직선으로 가지 않을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리고 마침내 찾아냈다. 지도 끝자락에 간신히 닿았지만 선명하며 짙은 푸른색. 지금까지 이 정도 마력 반응은 단 두 번밖에는 본 적 없었다. 그 중 하나인 마정석 광산은 이와 같은 마력 반응이 훨씬 더 넓은 범위에서 발견되었으니 예외로 친다면 남는 건 녀석뿐이었다.

혹여 녀석이 눈치 챌까,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수단을 동원해 내 존재를 감췄으며 주변의 자연물을 이용해 물리적으로도 가렸다. 검은빛과 붉은빛이 공존하는 비늘, 거대한 두 개의 뿔과 믿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덩치.

무엇보다 극심한 상처를 입은 듯 눈꺼풀을 감고 있는 한쪽 눈까지. 도합 십 년 가까운 시간동안 쫓아다녔던 ‘그 녀석’이 확실했다.

“드디어 찾았다.”

최초에 목표로 했던 기한인 십 년. 그 안에 녀석의 뼛가루를 동료들의 무덤에 뿌리기로 마음먹었었다. 그리고 그 기회가 지금 이 순간 나에게로 주어졌다. 남아있는 것은 주어진 기회를 붙잡는 것 뿐.

“그 자리에 가만히 있어라.”

준비가 끝나는 대로 사냥을 시작할 테니까.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62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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