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9화 - >
아직 가을임에도 불구하고 새하얀 입김이 나왔다. 오랜만에 맡는 몬스터의 시체가 타오르는 냄새와 높고 두꺼운 방벽은 내가 비로소 테라 방벽에 왔다는 것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후작 각하.”
“······네가 온다는 소식은 들었다. 근 칠 년 만인가. 생각보다 더 빨리, 더 강해져서 돌아왔군.”
그의 말처럼 근 칠 년 만에 만난 지크 후작은 내 기억 속의 얼굴보다는 조금 더 늙어 있었다. 사실 아직까지도 젊음을 유지하고 있다는 점이 놀라운 일이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하기에 충분한 시간이었으니까. 그보다 조금 더 짧았다고는 하나 매일이 전투의 연속이었던 만큼 다른 이들보다 고생을 많이 했을 테니 더 빨리 늙을 수밖에 없었을 텐데 말이다.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랬군. 그랬었지.”
잠시 고개를 들어 주변을 훑어봤다. 지크 후작이 변하지 않은 것처럼 그의 집무실도 내 기억 속과 똑같았다. 화려하기는커녕 삭막하기 짝이 없었으며 가구라고는 서류를 처리하기 위한 책상과 의자. 손님을 대접하기 위한 테이블이 전부였으니까. 변하지 않은 것은 외면뿐만이 아니라고 말하는 듯했다.
“후작 각하께서는 제가 떠날 때와 하나도 변하지 않으신 것 같습니다.”
“그러는 너는······. 꽤 많은 것이 변했군.”
“한참 성장하는 이십 대 아닙니까.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는데 한참 성장해야 할 젊은이가 과거와 똑같으면 각하를 볼 면목이 있겠습니까.”
진짜 많이 변했다. 레닐.
과거였으면 허리 딱 피고 왜 불렀는지 고민이나 하고 있었을 텐데, 이렇게 여유롭게 차도 마시고 시답잖은 말도 꺼낼 수 있는 걸 보면.
“하지만 변하지 않은 것도 있군. 하긴 그것까지 변했다면 이 지긋지긋한 곳에 제 발로 돌아오지는 않았겠지만.”
“시간이 지나도 그 때 광경이 생생하더군요. 사실 시간이 약이라고, 잊힐 뻔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생각이 들기가 무섭게 꿈속에서 그 때의 광경이 수십 번이고 반복되더군요. 그 때 깨달았습니다. 이 일은 어떻게 해서든 끝장을 봐야 할 일이라는 것을요.”
“······끝이라. 끝낼 준비는 되었고?”
“제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만, 끝을 낼 수 있을 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실패 확률이 더 높을지도 모르죠. 상대가 상대이다 보니 말입니다.”
“그렇군.”
다른 말은 없었다. 이제 와서 방향을 바꾸기에는 너무 먼 길을 걸어왔다. 그리고 그렇게 왈가왈부할 정도로 나와 지크 후작의 관계 또한 가깝지는 않았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해라. 내 선에서 도와줄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와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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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 후작과의 대화를 끝마치고 잠시 테라 방벽을 돌아다녔다. 내가 떠난 때로부터 근 칠 년에 가까운 세월이 지났기 때문일까. 아는 얼굴이 영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도 그 이후로 죽는 이들이 조금 줄어들었다고 들었는데, 최악에서 차악으로 바뀐 것뿐일지도 모르겠다.
돌아다니던 와중에 오래 전 내가 머물렀던 방을 찾았다. 당연한 말이지만 방주인은 옛날 옛적에 바뀐 상태. 양해를 구하고 방 안에 들어갔지만 이내 빠져나오고 말았다. 내가 삼 년씩이나 머물렀던 방이지만 더 이상 내 흔적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으니까.
‘몇 년이 지났는데 당연한 일이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여길 온 거냐.’
그 방을 대신하여 내게 새로이 배정된 방은 기존의 방보다 훨씬 넓었으며 배치되어있는 가구들도 비교적 고급졌으나 오히려 넓어진 공간 때문이었을까, 숨길 수 없는 적막감이 방안을 메웠다.
“이 때 뭐했더라.”
지금으로서는 딱히 할 일이 없다. 이제는 가물가물하기까지한 경보가 울린 것도 아니었으며 누가 나를 찾는 것도 아니었다.
예전이었으면 지금쯤 조장들에게 불려가 테라 방벽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자신들의 등을 맡길 이들을 소개받고 있었을 텐데. 만약 내가 이 곳에서의 경험이 없었다면 입장은 달랐더라도 그 안에 포함되어 있었겠지만, 삼 년 동안 이 곳에 머무른 경험은 어디가지 않았다.
똑똑-
“대제자님. A조 조장입니다.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들어오세요.”
그 때, 영원할 것만 같았던 적막감을 깨는 소리가 있었다. 한 때, 내 스승이나 다름없었던 일드님이 맡았던 A조의 조장. 그러나 지금은 말 한 번 섞어본 적 없었던 이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처음 뵙겠습니다. A조 조장을 맡고 있는 기욤 페텔입니다. 대제자님께 알려드릴 것이 있어 찾아왔습니다.”
기욤은 나보다 한 세대 위의 마법사였다. 마법사로서의 경력도 조장을 맡을 정도면 결코 부족하지 않았고, 중후반이라고는 하나 삼십 대라는 것을 감안한다면 왜 테라 방벽까지 밀려왔는지가 의문인 사람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욤은 내게 깍듯한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말씀 낮추어주십시오. 저는 대제자님께 존대를 들을 만큼의 사람이 아닙니다.”
불편하다. 군대에서 나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후임이 들어왔을 때의 느낌이 이럴까. 귀족 가문의 아들로 태어나 나보다 몇 배를 더 살아온 어른들에게도 존대를 받곤 했지만 적응이 되지 않는 건 지금까지도 똑같았다. 이십 년도 되지 않았던 전생이 삼십 년에 가까운 현생의 삶에도 불구하고 강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뜻이겠지.
“오래 전에 이 곳에서 복무하셨다고 들었는데, 사실이십니까?”
“그렇습니다. 고작 삼 년을 못 버티고 도망치긴 했습니다만.”
“도, 도망이라니요. 다시 돌아오시지 않았습니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였을 뿐입니다.”
이게 자리가 주는 힘인가. 내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말이 듣는 사람 입장에서는 불편하기 짝이 없는 말이 된다. 그리고 그 광경을 보는 나까지도 불편해진다. 안 그래도 기분이 안 좋은 상황에서 부정적인 상황이 겹치기 시작하자 더 나락으로 떨어지려는 것을 서둘러 봉합하기 시작했다.
“대제자님께서는 편하신 대로 움직이시면 됩니다. 청색경보의 경우에는 움직이지 않으셔도 되고 황색경보 때부터는 여유가 있으신 대로 빈틈이 보이는 곳을 메워주신다면 감사하겠습니다.”
“스콜피온이 배치되면서 피해가 줄었다고 들었는데, 경보의 기준은 똑같습니까?”
“그렇습니다. 그러고 보니 스콜피온의 상용화도, 마정석을 이렇게 사용할 수 있는 것도 대제자님 덕분이라고 들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덕분에 몬스터를 막아내는 것이 보다 수월해졌습니다. 사실 청색경보 때는 마정석을 아낀다고 쓰지 않는 경우가 있는데, 그런 탓에 가끔은 청색경보가 더 힘들 때도 있습니다.”
도움이 되었다니 다행이다. 스콜피온의 핵심 과정은 오직 나밖에 참여할 수가 없었기에 내가 수도로 떠난 직후에도 지원 부대를 통해 완성품을 올려 보낼 수밖에 없었으니까. 다른 이들에게 각인을 가르쳐준다는 방법도 있었지만 몇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스승님조차도 제대로 된 감을 못 잡을 정도였으니 어림도 없는 소리였다.
“앞으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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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 땡- 땡- 땡-
청색경보다. 도착한 지 하루 만에 경보가 울리는 걸 보면 좋아졌다 해도 결국 테라 방벽인 모양이었다.
우당탕탕-
고래고래-
들려오는 정겨운 소리를 들으며 나도 성벽으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기욤은 오래 전 장로였던 원더가 그러했고 지금의 장로가 그러듯 굳이 올라갈 필요는 없었지만 이 좋은 기회를 놓칠 생각은 없었다.
“실전에서도 써봐야지.”
지금도 아공간에 잠들어있는 두 자루의 총들. 지금껏 테스트를 해보지 않은 건 아니다. 내가 아무리 실력에 자신이 있어도 시험조차 하지 않고 본 게임이라 할 수 있는 테라 방벽에 왔을까. 그러나 이 곳은 다르다.
일단 수도 인근은 너무 안전했다. 제대로 된 시험을 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상위종 이상이 대상이 되어줘야 하는데 수도 인근에 그런 몬스터가 있을 리 없었으니까. 발견을 하더라도 단발성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수도 인근에서는 보는 것조차 어려운 상위종이 떼거지로 밀려오는 이 곳은 무기를 실험하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곳이 있을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성벽에 올라가자 기욤이 다가왔다. A조 차례인가. 나는 신경 쓰지 말고 평소대로 움직이면 된다고 말하니 머뭇거리면서도 자리로 돌아갔다.
아공간으로부터 두 자루의 무기 중 한 자루를 꺼냈다. 총 길이의 절반을 차지하는 개머리판과 총몸. 그리고 나머지 절반인 총열. 사이즈에 맞춘 총알의 두께도 손가락 한 마디를 넘어섰다.
가볍게 몸을 띄어 올린 후 총구를 달려오는 몬스터에게 향했다. 목표는 산더미만한 덩치를 자랑하며 달려오는 몬스터A. 내가 이 곳에 있을 때부터 몇몇 특별한 몬스터들을 제외하고는 상위종이라는 단어로 싸잡는 경향이 있었기에 자세히는 알 수 없었지만 저 덩치를 그대로 방벽에 들이박는 순간 몇 십 명은 균형을 잃고 방벽 아래로 추락할 것이라는 사실만큼은 알 수 있었다.
퉁-
만약 위력만큼의 반동이 있었다면 그대로 몸을 한 바퀴 회전했을 것이다. 그러나 화약이 아닌 각인으로 인한 발사이니만큼 반동은 꽤나 줄어들어서 몸이 살짝 뒤로 밀리는 수준에서 그칠 수 있었다. 반면 가벼운 반동과 달리 그 동작이 만들어낸 결과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목표로 한 상위종의 머리를 그대로 꿰뚫고 그 뒤에 위치한 몬스터까지 마무리시켰다. 아무리 포악한 몬스터라고는 해도 다른 부위라면 모를까, 머리에 바람구멍이 났는데 움직일 수 있는 놈들은 내가 알기로도 몇 없었다. 그리고 저 녀석들은 그 몇에 포함되지 않았고.
퉁- 퉁- 퉁- 퉁-
방아쇠를 당기면 상위종이 쓰러졌다. 지금 내가 하는 일은, 예를 들면 이미 만들어져 있는 탕수육에 소스를 붓는 행위였다. 당연히 처음부터 탕수육과 소스를 만드는 것에 비하면 시간도, 노력도 가벼울 수밖에 없었으며 소스는 내가 틈틈이 만들어두었기에 자신들의 차례를 기다리며 아공간에서 잠들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상위종을 상대로도 학살에 가까운 모습을 보여줄 수 있었음에도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신기할 정도로 지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단순히 마력의 양만 성장한 것이 아닌 마력을 다루는 방법과 회복 속도 등등 모든 면에서 성장했다는 것이 느껴졌다.
‘그럼 슬슬······.’
임시로 [이빨]이라고 작명한 저격소총은 이만하면 되었다. 꽤 많은 숫자의 총알을 발사했음에도 뒤틀리거나 총알의 경로가 엇나가는 일이 없었으니까. 특별한 이상이 없다면 앞으로도 멀쩡할 테지.
그렇다는 건 이제 [발톱]을 테스트할 차례라는 것이었으나 안타깝게도 그 기회는 차후로 미뤄야만 했다. 테라 방벽이 보다 편해졌다는 말이 거짓이 아닌지 전투가 벌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몬스터들이 전투의지를 잃고 물러나고 있었기에. 그리고 전투가 끝나기가 무섭게 나에게로 몰리는 시선들.
도대체 내가 손에 들고 있는 그 정체불명의 무기는 무어냐고 묻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 보였지만 차마 나한테 직접 물어볼 수는 없었는지 다가오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나마 기욤이 다가와 고생하셨다며 인사를 건네는 정도.
“저는 먼저 내려가 보겠습니다.”
“그, 그러십시오.”
[이빨]을 아공간 안에 넣고 쏠리는 시선을 뒤로한 채, 방벽을 내려왔다. 그 누구보다도 화려했던, 더 이상 인상적일 수 없었던 복귀식이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9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