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8화 - >
6서클. 모든 마법사들이 그토록 오르고자 하는, 꿈이 아닌 현실적인 목표로서 존재하는 곳. 다른 국가의 마탑이라면 모를까, 제국의 마탑의 장로로서 존재하기 위해 암묵적으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경지. 더 이상 인간이 아닌 병기라고 불려도 이상할 것이 없는, 개인의 존재로 전투의 판도를 바꿔놓을 수 있는 경지가 6서클이라는 경지였다.
그러나 그런 경지에 올라왔음에도 내가 느끼는 변화는 크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느끼는 변화만 크지 않을 수도 있었다. 드디어 길고 긴 레이스의 마지막을 출발했다는 기쁨에 잠도 최소화, 끼니도 최소한으로 때우며 연구에만 몰두했으니.
그나마 얼굴을 마주하는 스승님이나 조조도 그런 쪽으로 나에게 말을 붙일 사람들이 아니었으니 나와 몇 발자국 떨어진 이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무슨 반응을 보이는지, 관심도 흥미도 없었다. 어차피 그들의 바람대로 움직여줄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으니. 나에게 있어 중요한 것 외부의 반응이 아닌 내부의 성장이었으니만큼 더더욱.
그런 의미에서 6서클에 도달하며 얻게 된 여러 요소들은 충분히 흡족할 만한, 내가 6서클을 목표로 한 것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음을 실감하게 해주었다.
첫 번째로 스스로의 마력으로 아공간을 만들 수 있게 되었다는 점. 아직까지는 미숙하여 큰 공간을 만들 수는 없지만 손에 들고 있지 않더라도 언제든지 보관해두었다가 꺼내 쓸 수 있게 되었으니, 내가 6서클을 목표로 한 것에는 아공간의 유무가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었다.
두 번째로는 각인의 연쇄를 드디어 본격적으로 실험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 5서클에 불과했을 때는 자물쇠로 잠가놓은 것 마냥 길이 보이지 않았지만 신기하게 벽을 뛰어넘자마자 열쇠가 등장한 것처럼 자물쇠가 열렸다. 아직까지도 각인의 정체를 밝혀내지 못했으니 왜 이런 현상이 존재하는지는 여전히 미지수였지만.
철컥- 철컥-
아쉽게도 내가 모티브로 삼은 장비와는 다르게 자동으로 날아와 장착되는 기능은 없다. 그런 기능까지 넣기에는 물리적으로도 마력적으로도 한계가 있었으니까. 제아무리 미스릴( Mythril)이 마력의 금속이라고 불린다지만 여유가 있다면 모를까, 지금은 그럴 여유를 부릴 상황이 아니었다.
끼익-
신발, 하의, 상의, 장갑 등등 차곡차곡 내 몸을 차가운 금속들이 뒤덮기 시작했다. 대장장이에게 부탁해 가슴 중앙에 위치한 작은 공간에 주먹 크기의 마정석이 들어가는 것을 마지막으로 장비의 착용은 끝이 났다.
“좋네.”
마정석의 보조를 받자는 생각은 확실히 좋은 선택이었다. 단순히 내 마력만을 사용하는 것보다도, 마정석의 마력만으로 대신하는 것보다 효율이 좋았으니까. 일 더하기 일이 삼이 되어 나온 결과였다. 설령 마정석의 마력이 다한다고 하더라도 아공간 내에 준비되어 있는 새로운 마정석으로 교체하면 되니 전투 지속력이 몇 배는 길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 외에 기대했던 기능들 또한 큰 문제없이, 사전에 예상했던 만큼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만큼 충분히 만족할 만한 결과였다.
“이제 이빨만 날카롭게 가다듬으면 되나.”
테이블 위에 올라와있는 새로운 이빨과 발톱. 그러나 아직은 살짝 부족했다. 녀석의 숨통을 끊고 심장을 꿰뚫기 위해서는 조금 더 날카롭고, 조금 더 단단할 필요가 있었다.
사실 갑옷에 대해서는 별 고민을 하지 않았다. 머릿속에 잡혀있는 구상이 있기도 했으며 방어라는 확고한 목적이 있는 만큼 생각할 수 있는 변형의 정도가 크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무기는 달랐다.
검, 창, 도끼, 활 등등 당장 생각나는 종류만 해도 수 가지였으며 자세히 파고들며 수십, 수백 종류가 넘어갈 것이다. 그 중 내게 가장 잘 맞는 무기를 선택해야만 했다.
“답은 정해져 있지만.”
재래식 병기, 속칭 냉병기라고 불리는 무기들은 나와는 맞지 않는다. 주된 사용자인 기사들이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은 무기의 위력이 뛰어나기 때문이 아니라 무기를 다루는 기사들이 뛰어나기 때문이었다. 최소 수 년에서 수십 년간 한 무기만을 다루어온 그들과 당장 필요에 의해 무기를 선택해야 하는 나에게는 좁힐 수 없는 차이가 존재했다.
무기 자체의 위력이 강한 무기. 그 대표적인 무기가 지금도 내 허리춤에 메여있지 않은가. 같은 모양이지만 서로 다른 기능을 가진, 아직 여러모로 미숙했던 시절에 제작했기에 그 뒤로 개량을 거쳤음에도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부족한 점이 많았다.
위력, 사거리, 내구도, 소모 값에 이르기까지. 지금이라면 더 강하고, 더 길고, 더 단단하고, 더 효율적인 무기를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오늘 연락이 왔다. 물건이 완성되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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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 깡- 깡-
아직 근처에만 왔을 뿐인데 쇠를 두드리는 소리와 뿜어져 나오는 열기가 심상치 않은 이 곳. 황실 소유의 대장간이 있는 곳이었다. 본래는 황실에서 필요한 물품을 제작하거나 황실 기사들의 장비를 담당하는 곳이었지만 줄을 타고 타다보면 이 정도는 간단했다.
황실 소속이니만큼 대장장이 한 명 한 명의 실력은 제국 최고라 칭해도 과언이 아니었으며 재료 또한 최상품이 아닌 것이 없었다.
“물건이 완성되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준비된 방에서 기다리자 몇 분 뒤, 내가 주문을 맡겼던 대장장이가 거대한 나무 상자와 함께 등장했다. 아마 저 안에 나의 새로운 발톱이 되어줄 무기가 들어있으리라.
“완성된 겁니까?”
“열어보십시오.”
딸깍-
조심스럽게 나무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새하얀 솜이 상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으며 그 위에 감싸인 두 자루의 무기. 외견만큼은 내가 원하던 모습과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보내주신 샘플을 바탕으로 제작하긴 했습니다만, 수십 년 동안 망치를 놓은 적이 없었지만 이런 모습을 한 무기는 처음입니다. 아니, 무기가 맞긴 한 겁니까? 날이 서있는 것도 아니고 둔기라고 하자니 속이 비어있어 타격에 적합한 것도 아닙니다.”
대장장이가 궁금증이 섞인 말들을 내뱉었지만 그에 상관없이 상자 속 무기들을 천천히 살폈다.
바닥에 대었을 때, 내 어깨 가까이 닿을 정도로 긴 길이를 자랑하는 첫 번째 총. 그리고 그보다는 짧지만 두 개의 거대한 총열을 자랑하는 두 번째 총.
내부는 봐야 알 수 있겠지만 외견상으로는 나무로 만들었던 모형과 차이는 없었다. 물론 내부의 모습도 실제 총과는 달리 복잡할 건 없으니 모형을 본 따 만들었다면 큰 문제는 없으리라.
“아직 완성된 게 아닙니다. 이제부터 완성시켜나가야겠죠. 게다가 마법사가 평범한 물건 구하는 것 보셨습니까.”
“······그렇긴 합니다만, 완성된다면 꼭 한 번 보여주셨으면 합니다. 어떤 모습일지 궁금하군요.”
정말 많은 것이 투자되었다. 돈, 시간, 사람 등등. 지금까지의 준비를 위해 그 동안 내가 귀족들에게 받았던 선물 대부분을 쏟아 부었을 정도로 돈지랄의 결정체였으니까.
“기대하셔도 좋습니다. 머지않아 깜짝 놀랄 소식이 들려올 테니까. 그리고 그 때, 당신이 제작한 무기가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주변에 자랑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연구실로 돌아와 아공간에 넣어둔 나무 상자를 다시 꺼냈다. 지금 이 상태로는 대장장이의 말처럼 그 무엇도 되지 못한 반쪽짜리에 불과하다. 뭉툭하고 단단하지도 못해서 그 무엇 하나 꿰뚫고 잘라내지 못하겠지. 그러니 갈고 닦는 거다. 그 어떤 무기보다 예리하고 단단한 무기가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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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방벽으로 가신다고요?”
“그래.”
“아니, 왜 이제 와서 그런 선택을 하신 겁니까?!”
그 해, 가을. 어김없이 테라 방벽을 향해 지원이 출발할 예정이었다. 그리고 그 목록 최상단에 ‘레닐 드라그닐’이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해야 할 일이 있으니까.”
“충분하지 않습니까! 테라 방벽의 손실은 형님이 계셨을 때와는 달리 많이 줄어들었습니다. 형님의 행적 덕분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구했다고요.”
“그것 역시 내가 해야 할 일들 중 하나일 뿐이야. 아직 그 곳에는 나만이 할 수 있는, 아니 내가 해야 만 하는 일이 있어.”
어디서 그 소식을 들었는지 윌랜드가 나를 찾아왔다. 그러나 무려 육 년 전부터 정해두었던 일이다. 이제 와서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바뀔 일은 없었다. 몇 번이고 찾아와 설득을 계속하던 윌랜드도 결국 내 단호한 태도에 뜻을 이루기 힘들다는 것을 깨달았는지 어느 순간부터는 찾아오지 않았다.
수군수군-
나를 주제로 떠드는 소리도 들려온다. 그들 딴에는 먼 거리에서 조심스럽게 대화하는 것일 텐데, 내 귀에는 한 마디 한 마디가 똑똑하게 들려왔다. 내가 성장했다는 뜻이겠지.
“도와줄까?”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야.”
“자신과는 상관없는 일에 먼저 손을 내뻗은 사람이 그런 말을 하다니, 이상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그 때는 너에게서 <마력의 분산>의 비밀을 듣고 싶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네가 얻을 것이 없어.”
“친구 사이라면 그런 것에 신경 쓰지 않는다고 한 것도 네가 한 말이었지.”
지원 병력과 물자가 출발하기 며칠 전, 조조와도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눴다. 일 년 전의 이야기를 꺼내며 이번에는 나를 도와주겠다는 말이 퍽이나 고마웠지만 담담히 거절했다. 지금부터 내가 걸어갈 길은 생사를 장담할 수 없는 길이다.
많은 준비를 했다. 그에 따른 각오도 다져왔다. 그런 만큼 친구라는 이유만으로 조조를 이 길로 끌어들일 수 없었다.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은 나뿐이기에,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도 나뿐이었다.
“죽지 마라.”
“죽기는. 너야말로 불길하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 얼굴에서 죽음을 각오한 의지라도 느껴진 모양이겠지. 그를 안심시켜 돌려보내고서는 다시 한 번 짐을 확인했다. 아공간의 존재 덕분에 공간의 한계를 벗어날 수 있었던 만큼 준비 자체는 내가 테라 방벽으로 처음 떠날 때와는 차원을 달리했다.
“네가 무슨 일을 하기 위해 이런 선택을 했는지는 모른다. 나는 네 스승이지만 너는 내게 단 한 번도 네 목표가 무엇인지 말해주지 않았으니. 하지만 목표를 이룰 수 있기를 응원하마.”
정들었던 마탑 안의 내 방을 정리하고서는 마지막으로 스승님께 인사를 올리고 지원 부대에 합류했다. 규모는 내가 갓 성인식을 치르고 형을 대신해 테라 방벽으로 향할 때보다 줄어 있었다. 제국에 여력이 없어 지원이 줄어든 것이 아닌 그 만큼 테라 방벽에서의 피해가 줄어들었기 때문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이 옳은 만큼 기분 좋은 변화라고 할 수 있었다.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대제자님!”
“잘 부탁합니다.”
그 때와는 많은 것이 바뀌었다. 오크 한 마리를 잡기 위해 전력을 내야 했던, 다른 이들과 마찬가지로 두려움에 떨며 마차에 몸을 실었던 마법사는 드래곤이라는 정체불명의 생명체를 죽이겠다는 확고한 목적을 가진 채, 그 누구도 타지 않은 마차에 몸을 실었다.
“도착했습니다!”
그리고 낯설지 않은, 어딘가 정겹기까지한 광경이 내 눈에 들어왔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8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