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7화 - >
“제게 거짓말을 하신 겁니까?”
내 말에 조조의 표정이 바뀐다. 마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표정. 자신이 하려는 행동이 왜 내게 해가 된다는 것인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간혹 저런 이들이 있다. 자신의 행동이 어떤 영향을 가져올지 모르는 채 일단 저지르고 보는 이들, 혹은 자신의 입장에서만 생각하여 타인의 입장까지는 깊이 생각하지 않는 이들이.
“조조 씨의 입장은 잘 알겠습니다. 바다 건너 여기까지 온 이유도, 레닐을 만나야만 하는 이유까지도. 하지만 그건 조조 씨의 입장. 그에게 해가 되지 않을 거라는 말과는 상충되지 않습니까.”
확실히 단기간 내에 이름을 알리는 데에는 현재, 조조가 생각하고 있는 방법보다 더 빠른 방법은 없을 것이다. 실제로 기사들 혹은 용병들 중에는 그런 것을 노리고 유명한 이들을 찾아 결투를 요청하는 이들도 있을 정도이니.
그러나 정작 그 대상이 되는 이에게는 무슨 메리트가 있는가. 승리해야 본전, 패배한다면 가지고 있는 명성을 빼앗기는 결과만 기다리고 있을 뿐인데. 이성적으로 생각해본다면 받아들일 이유가 전혀 없는 제안이었다. 물론 사람이라는 것이 항상 이성적으로 생각하지 않기에, 그 손해를 뛰어넘는 이득이 있기에 그런 전례가 이어지고 있는 것이겠지만.
“그가 승리한다면 문제가 없겠으나 그가 조조 씨에게 패배한다면 조조 씨의 명성이 올라가는 만큼 그의 명성은 깎아내려질 텐데요.”
“······그것이 해가 된다는 이야기와는 무슨 상관입니까?”
그 터무니없는 대답에 살짝 놀랐다. 그리고 조조의 얼굴을 확인했을 때, 그가 진심으로 그리 생각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조조 씨의 스승님을 생각해보면 간단하지 않습니까. 결과적으로 깎인 명예를 회복하기 위함인데, 왜 해가 되지 않는다는 겁니까?”
“명예와 명성은 다릅니다. 그가 저에게 진다하더라도 명예가 깎일 일은 없습니다. 오히려 걱정하시는 것과 달리 그도 쉽게 받아들일 지도 모릅니다.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저는 통상적인 길과는 다른 길을 걷고 있으니까요. 그가 진짜 마법사라면 좋은 경험이 될 수 있는 기회를 그깟 명성이 아까워 놓치지 않을 것입니다.”
명예와 명성은 다르다. 그 뒤에 이어진 말들은 내가 아직 마법사로서는 갈 길이 멀다는 것을 알려주는 말이었다. 정말로 마법에 모든 것을 내던졌다면 방금 전과 같은 생각은 하지 않았을 테니까. 어쩌면 한 뼘을 채우지 못한 것은 진실로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갔다.
“······그렇군요. 그렇네요.”
조조의 말이 맞다. 설령 내가 이 자리에서 조조를 만나지 못했다고 하더라도, 예정대로 마탑에서 그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한다면 6서클로 향하는 발판이 될 수도 있는 기회를 놓치려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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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권총이 바깥 공기를 마시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그 뒤로 조용히 동행하게 된 나와 조조는 오슬론을 떠나 내가 내건 조건대로 여행을 시작했다.
그 자리에서 내가 레닐임을 밝히는 방법도 있었으나 조조에게도 그리고 나에게도 원치 않는 방향이었다. 조조는 공개적인 장소이기를 바랄 것이며 나는 최선의 준비를 다한 상태이고 싶었으니. 더불어 지금 돌아간다면 큰마음을 먹고 여행을 떠난 만큼 다시 여행을 떠나기는 힘들 것 같았으니까.
“이건 이런 식으로······.”
“저건 저런 식이······.”
게다가 그와의 동행은 생각만큼이나 유익한 시간이었다. 그의 말처럼 방향은 똑같을지언정 다른 길을 걷고 있는 만큼 그가 보고 있는 광경, 시야 또한 나와는 다른 부분이 많았다. 같은 것을 보고 같은 것을 경험하고 같은 것을 배웠으면 벌어질 수 없는 차이.
아마 조조 또한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출발은 나와 조조가 비슷했을지 몰라도 요 몇 년 사이에 걸어온 길이 달랐으니까. 다른 이들의 시선에서는 나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엘리트’였으며 반쯤은 사실인 이야기였다. 그런 만큼 언더독이나 다름없는 조조와는 같은 것을 보고도 다른 의견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남쪽으로, 동쪽으로.
대륙 제일의 크기를 자랑하는 호수인 카스피 호수도, 끝을 알 수 없는 평원인 프레리 평원도, 테라 방벽을 감싸고 있는 테라 산맥과 함께 엄청난 높이를 자랑하는 로체 산맥을 등반하기도 했다.
시기상 겨울이었기에 여행을 계속하기에 좋은 시기는 아니었으나 제국 남부는 그 위치 상 겨울에도 눈을 볼 수 없을 정도로 날씨가 따뜻했기에 큰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남부를 여행한 뒤, 로체 산맥을 따라 동부로 향할 때는 점점 날씨가 풀리고 있었기에, 그 정도 추위는 미량의 마력으로도 제어가 가능했기에 상관없었고.
그렇게 간소하게나마 제국의 1/3을 돌아다녔을 때, 나는 점점 북쪽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서쪽으로 틀었다.
많은 것을 봤다. 많은 것을 보았고 많은 것을 경험했다. 제국 북부와 동부에서는 지금까지와는 또 다른 것들을 경험할 수 있겠지만 들여야 하는 시간에 비하면 효율이 좋지 않을 터. 마지막으로 제국 동부에 다다른 김에 지크 영지에 들리려고 했지만 이내 포기했다.
현재 조조는 나를 언트루라는 이름의 마법사로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크 영지에 머무르게 되면 내가 레닐이라는 사실은 발각될 수밖에 없었다. 이미 여행의 끝에 다다른 만큼 밝혀져도 큰 상관은 없었으나 그와 무려 반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동거 동락했다. 마지막만큼은 내 입으로 끝내고 싶었다.
그러나 그 생각은 여행을 끝마치고 수도에 하루거리로 다가온 그 때, 의도치 않은 끝을 보았다.
“언트루.”
“왜?”
나이는 두 살 차이. 그러나 말을 놓은 지는 꽤나 되었다. 이 년이라는 시간 이상으로 서로 잘 맞는 구석이 있었기에. 그러나 뒤이어진 말에 나는 발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아니 레닐, 네가 레닐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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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레닐이지?”
“······언제부터 알았어?”
순간 멈칫했다. 부정할까라는 생각이 잠시 고개를 내밀었다가 다시 들어갔다. 어차피 수도까지는 하루도 남지 않았다. 지금 부정해봤자 내 정체를 밝혀야 하는 것도 고작해야 하루라는 뜻이었다. 지금 부정하고 조금 있다가 얼굴을 붉힐 바에야 언급된 지금 밝히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수도까지 하루 남은 거리다. 이제 와서 이런 말을 꺼낸다는 것이 결코 이제야 정체를 파악했기 때문은 아닐 것이다. 조조도 조조 나름대로 계산과 확신이 섰기에, 지금 이 순간이 물어보기 가장 좋은 순간이라고 생각했기에 물어본 것이겠지. 이런 상황에서 일단 부정하고 보는 것은 결코 좋은 선택이 아니었다.
“오래 되진 않았어. 그렇다고 최근도 아니었지만.”
역시나. 조조의 물음에서는 숨길 수 없는 확신이 느껴졌었다. 결코 하루 이틀로는 형성될 수 없는 확신이. 며칠, 몇 주에 걸쳐 확인했으니 그 정도 확신을 가질 수 있으리라.
“티는 안냈다고 생각했는데.”
“무의식적으로 나오는 말까지 숨길 순 없었으니까.”
반년 동안 단순히 여행만 다닌 것이 아니다. 걸으면서도, 식사를 하면서도, 잠자리에 누워서도 나와 조조는 마법에 관련된 이야기를 나눴다. 아주 간단한 것에서부터 복잡한 것들까지. 겉핥기에 불과했다면 모를까, 비슷한 수준의,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이 서로가 수 년, 수십 년 동안 쌓아온 지식을 바탕으로 토론을 나누었는데 바닥을 드러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결과적으로 속인 꼴이 되어서 미안. 수도에 도착하는 대로 밝히려고 했는데 한 발 늦었네.”
“이유는 안 물을게. 그 당시 네 입장에서 내가 어떻게 보였을지 이해가 가니까. 꽤나 수상했을 테니 진심인지 아닌지 파악하려고 했겠지.”
쉬웅-
시원한 바람이 나와 조조 사이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째 물리적인 거리 이상으로 바람이 가르는 거리가 더 길게 느껴졌다. 그리고 조조가 쥐고 다니던 지팡이를 고쳐 잡았다.
“준비해.”
“······여기서? 어떤 식으로 결말이 나오든 네가 원하는 결말은 아닐 텐데.”
그가 원하는 결말은 스승의 명예 회복이다. 그리고 그를 위해서는 일단 그의 존재를 수많은 사람들이 알 필요가 있었다. 나와의 대결은 승패를 떠나 그것을 가능하게 해줄 테고. 그러나 이 곳에서 전투를 진행한다면 마찬가지로 승패를 떠나 멀어질 수밖에 없었다.
“방법이 그것밖에 없는 것도 아니고 내 욕심에 친구를 이용할 수는 없지.”
“이용이라니, 서로에게 필요한 부분을 받는다고 하면 되지 않나?”
“그건 이미 주고받고 있어. 이것과는 다른 이야기야. 내가 너를 통해 이득을 취한다면 너도 나에게서 이득을 얻어야 해. 그래야 동등한 관계를 이어나갈 수 있다고.”
“뭘 그렇게 딱딱한 생각을······. 게다가 친구가 어려움에 빠져 있으면 손익에 상관없이 손을 내뻗을 수 있는 게 친구 관계 아닌가?”
그러나 조조는 뜻을 바꿀 생각이 없어보였다. 안타까운 이야기다. 그가 나를 통해 얻으려 하는 것이 잘못된 것이라면 모를까. 또 하나의 훌륭한 업적을 남긴 선구자의 명예 회복을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그럼 이렇게 하자. 내가 이기면 <마력의 분산>에 쓰여 있지 않은 보완점들을 설명해. 어떻게 다른 마법사들과 달리 너는 성공할 수 있었던 건지, 차이점이 무엇인지. 네가 이기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 스승님의 명예를 회복하는 걸 도와주겠어.”
아직도 엉터리나 다름없었던 <마력의 분산>이 어떻게 성공할 수 있었는지 밝혀내지 못했다. 오직 당사자의 입에서 나온 경험을 통해 서적의 미진한 부분을 보완했을 때, 성공적으로 적용할 수 있을 터. 그렇기에 나도 지팡이를 꺼내들었다. 각인을 사용하지 않고 오직 마법으로 승부를 보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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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연, 이론으로는 표현하기 어려웠던 부분들을 이런 식으로 처리한 건가.”
반년 만에 마탑으로 돌아왔다. 고작해야 반 년. 변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조조는 그의 몸에 대한 연구를 허락했다. 동시에 <마력의 분산>에 대한 개정판도 새로이 작성하기 시작했고.
스승님께서도 한 번 보고 되돌아왔던 길이 사실은 끝까지 이어져있다는 사실에 한 손 거들어주셨다. 개정판이 나오고 그것을 조조가 증명해낸다면 그의 스승의 명예를 되찾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터였다.
그리고 나 또한 천천히 조조의 성과를 내 몸에 이식할 방법을 구상하고 있었다. 이제 와서 갈아타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며 기존의 방식보다 상위호환인 것도 아니었다.
다만 조조는 조조의 방식대로 장점과 단점이 있었고 기존의 장점을 유지하며 새로운 방식의 장점까지 가져올 방법을 연구하고 있을 뿐. 덕분에 연구실의 불빛은 꺼질 틈 없이 과도한 중노동에 시달려야만 했다.
그렇게 하루이틀삼일나흘. 스물 중반의 마지막 겨울에 나는 부족했던 한 뼘을, 아주 살짝 높았던 벽의 끝에 손을 올릴 수 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7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