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4화 - >
아이를 봐달라니, 동시에 내가 해줘야 하는 일이라니. 순간적으로 불길한 생각이 머릿속을 스쳐지나갔다. 하지만 이내 형의 표정을 확인하고는 너무 앞서나간 생각이었다는 것을 인정했다. 하긴 만약 아이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다면 아버지나 형이나 이렇게 편하게 나를 맞이할 수는 없었겠지.
“아이를 봐달라니, 무슨 소리야. 나한테 육아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고, 형수, 아니 유모는?”
우리 집이 다른 귀족들에 비해 상당히 검소한 건 사실이다. 주변 다른 영지들보다 세금을 덜 받는 것은 아니지만 그 세금을 개인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아닌 영지민들을 위해 사용했으니까.
그러나 그건 어디까지나 상대적으로 검소한 것일 뿐, 평민들에 비한다면 비교조차 할 수 없을 만큼 부유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그런데 유모 한 명을 고용할 수가 없어 나에게 조카를 돌봐달라고 할 리는 없었다.
“아이 낳은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마리아가 아이를 돌보겠냐. 게다가 내가 아이를 봐달라는 건 네가 생각하고 있는 그런 게 아니야.”
아하. 그제야 형이 하고자 하는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있었다. 각자에게는 가장 빛날 수 있는 자리가 있는 법이다. 그리고 아이를 돌보는 건 내가 빛날 수 있는 자리와는 거리가 멀었다.
“다른 이들은? 영지에 마법사가 없는 것도 아닐 텐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너만 하겠냐. 잘난 동생 둔 덕 좀 보자.”
어려운 부탁은 아니다. 삼촌으로서 조카에게 해 줄 수 있는 선물이기도 하고 경험은 없지만 방법은 숙지하고 있는 만큼 큰 문제는 없으리라. 그나저나 휴식을 위해 고향으로 돌아왔는데 오자마자 일이라니.
“그런 일이라면 준비 좀 하고. 나 집 도착한 지 한 시간도 안 됐어.”
남은 가족들에게도 인사를 하고 여행의 피로를 푼 뒤, 형의 부탁을 들어주기 위해 다시 조카에게로 향하니 이미 그 방에는 아버지, 어머니, 형과 형수, 동생과 유모까지. 가문의 모든 사람들이 모여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뭐 중요한 일이라고 이렇게 모여계세요.”
“중요한 일이지. 장손의 일이 아니냐.”
형은 가문의 대를 이을 장남이다. 그리고 그 핏줄을 이은 이 아이는 형의 뒤를 이을 장손이고, 형이 동생을 낳고 차남이 욕심을 부리지 않는 한 그렇게 될 확률이 높은 만큼 가족들의 관심이 집중되는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자리 좀 만들어주세요. 그렇게 뚫어져라 쳐다보면 아이가 놀라겠습니다.”
지금만큼은 선생과 말 잘 듣는 학생들이 된 것처럼 내 말이 들리기가 무섭게 가족들이 조금씩 물러나 내가 다가갈 자리를 만들어주었다.
“나중에 크면 여자 여럿 울리겠는데.”
형이나 나나 못 생긴 얼굴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미남이라는 말을 들을 정도는 아니었다. 굳이 좋게 말하자면 호감을 줄 수 있는 얼굴이라고는 할 수 있겠지만. 하지만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대충 윤곽이 나올 정도로 조카의 얼굴은 잘생긴 편이었다. 물론 성장하면서 어떤 역변을 겪을지는 모르는 일이었지만.
방긋-
내가 삼촌이라는 것을 알기라도 하는 것일까. 나를 보면서 울지도 않고 방긋방긋 미소 짓고 있는 조카를 보며 물었다.
“그러고 보니 조카 이름도 모르고 있었네요. 이름이 뭐에요?”
“루키우스, 루키우스에요. 아버님께서 며칠을 고민하셨는지 몰라요.”
루키우스.
빛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이니 아버지가 무슨 뜻으로 아이의 이름을 지어주셨는지 알 것만 같았다. 안 그래도 가문이 성장을 계속하고 있으니 가문을 빛내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겠지. 그리고 지금 이 순간이 이름에 걸맞은 사람으로 성장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는 1차 테스트가 될 예정이었다.
“혹시나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저를 믿고 가만히 계세요. 오히려 더 큰 사고가 벌어질 수도 있으니까.”
단단히 주의를 준 뒤, 아이의 가슴에 손을 가져다대었다. 작게 고동치는 심장의 박동소리를 느끼는 것도 잠시, 조심스럽게 마력을 흘려보내기 시작했다.
‘아기는 아기구나.’
금방이라도 무너질 듯한 모래성을 만지는 것처럼 조심스럽기 짝이 없었다. 덕분에 속도는 한없이 느렸지만 아이의 몸이 크면 얼마나 크겠는가. 오히려 더 짧은 시간에 한 바퀴를 돈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다행이다.’
회로는 넓고 깨끗했다. 조금만 힘을 주면 금방이라도 찢어발길 수 있을 만큼 연약했으나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만큼 당연한 이야기일 뿐이었다. 차후 얼마나 성장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적어도 마력에 대한 자질은 충분하다고 할 수 있었다. 그 뒤로 나는 근 삼십 분 가까이 아이의 회로에 마력을 순환시키며 불순물을 제거한 뒤에야 아이로부터 손을 뗄 수 있었다.
“끝난······거냐?”
내가 한숨을 쉬었을 때부터 안절부절 못했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내 집중을 깨트리지 말라는 말 덕분에 마음을 졸이며 지켜보는 것밖에는 하지 못했던 가족들이 달라붙었다. 내가 말할 틈을 주지 않고 물어보는 가족들을 겨우겨우 진정시킨 다음에야 제대로 된 이야기를 진행할 수 있었다.
“걱정 마세요. 건강하고 자질도 있으니까. 노력 여하에 따라 달라지긴 하겠지만 재능은 충분하네요.”
건강하다는 것. 그리고 재능도 있다는 것. 물론 그 재능을 살리는 것은 노력 여부지만 그것까지 내가 확인시켜줄 수는 없는 거니까. 그 사실을 재차 확인시켜주자 비로소 가족들도 나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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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여기서는 언제까지 머무를 생각이냐.”
“확답은 못 드리겠지만 적어도 한 달 정도는 머무를 것 같습니다.”
“그러냐. 잘 됐다. 네 도움이 필요한 일이 몇 가지 있었는데, 머무르는 동안 일 몇 개만 맡아서 해결해줬으면 좋겠구나.”
마법과 떨어져 푹 쉬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온 것인데 일이라니, 떨떠름한 제안에 고민하고 있을 때 이어진 아버지의 말은 그 결정을 수긍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말이었다.
“쉬는 것도 계획성 있게 쉬어야 하는 법이다.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무작정 쉬어봤자 시간 낭비,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지. 무엇보다 당장 내일부터 하라는 건 아니니 잘 생각해 보거라.”
그렇게 나는 일주일동안 말 그대로 푹 쉬었다. 아무 계획 없이 늦잠을 자보기도 했으며 일어나서도 하는 일 없이 누워있기도 했다. 의식해서라도 마법을 떠올리지 않으려고 노력했으며 마법과 관련된 책들 또한 눈에 들어오지 않는 곳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곳으로 이동을 시켰다.
그렇게 일주일, 나는 아버지가 말한 ‘쉬는 것도 계획성 있게 쉬어야 한다.’라는 말의 뜻을 몸으로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제 도움이 필요하다는 일이 뭐에요?”
“일주일이라, 빨리도 왔구나. 적어도 이주는 버틸 줄 알았더니.”
“쉬는 것도 쉽지 않네요.”
동시에 습관이라는 것이 참 무섭다는 것도. 잠을 자려 눈만 감아도 연구 내용이 떠올랐으며 천장 혹은 벽을 바라보면 마법 술식이 눈에 그려졌다. 몸을 혹사하며 생각을 그만해보려 하기도 했지만 그 때뿐이었다.
“큰일은 아니다. 네가 머리를 싸매고 고민해야 할 정도의 일이었다면 일찌감치 너를 불렀거나, 아예 부르지 않았겠지. 부담 없이 할 수 있는 일이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그 말처럼 나는 남은 기간 동안 여러 가지 일을, 그러나 큰 부담이 따르지 않는 일들을 해결했다. 솔직히 내가 없어도 되는 일이었으나 있으면 더 좋은 이들. 예를 들어 저수지를 만들거나 몬스터 혹은 도적들의 박멸 등등의 일들이었다.
확실히 그냥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보다는 나았다. 소일거리는 하는 동안에는 그 일에 집중하느라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여전히 내가 원하는 변화는 없었고 나는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휘릭휘릭-
아기의 머리 위로 밝은 빛을 내는 광구가 천천히 회전하며 아이의 눈을 사로잡고 있었다. 그 짧은 손을 있는 힘껏 뻗으며 광구를 손에 쥐려고 하지만 그 작은 손으로 닿을 리가 없었다. 그래도 방긋방긋 웃고 있는 모습이 꽤나 즐거워보였다.
“가는 거냐?”
“가야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는 없으니까.”
조카와 놀고 있자 슬그머니 다가온 형이 다가왔다.
“언제까지 여기 있어도 괜찮은데.”
“괜찮기는. 내가 더 머물러봤자 괜한 분란밖에 더 생기나.”
가문의 후계자는 형이다. 그리고 형이 영지를 이어받아 가주가 된다면 나는 방계혈족이 된다. 그 말은 곧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이 저택은 더 이상 내 집이 아니게 된다는 이야기였고.
사실 근 한 달에 가까운 시간 동안 나에게 접근한 이들은 꽤나 있었다. 부유한 상인부터 다른 귀족의 하수인까지. 나에게 형 대신 후계자가 되라고 종용하기 위함이었다. 자신들이 돕겠다고, 대신 나중에 자신들을 잊지 말아달라고. 물론 허튼 소리 하지 말라며 모두 내쫓았지만.
내게 전생의 기억이 없었다면, 전생의 기억으로 인해 이들을 진정한 가족으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면 혹은 내 욕심이 컸다면 깔끔히 포기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충분한 가능성이 있는 일이었으니까.
“······미안하다.”
“새삼스럽게? 머리에 피가 마르기도 전에 결정된 일인데 갑자기 왜 그래?”
“네가 그대로 놀고먹었으면 모를까, 너도 가문을 위해 많은 일을 했으니까. 나 대신에 테라 방벽에 끌려간 것도, 아버지가 자작이 되신 것도 그렇고 마정석의 건까지. 게다가 네가 마탑주님의 제자가 되면서 여러모로 많은 이득을 볼 수 있었어. 그런데 그걸 조금 일찍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것을 내가 물려받게 되었으니까. 만약 네가 불만이 있다면······.”
“뭔 소리를 하나 했더니.”
딱히 그런 것에 대해 고민하는 것 같지는 않았는데, 형은 계속해서 마음속에 두고 있었나보다. 나조차도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있었는데.
“옛날부터 아버지를 도와서 영지를 돌본 건 형이었어. 그러면 영지를 이어받는 것도 형이 되어야지.”
“하지만 능력만 따지면 네가······.”
“마법 잘 쓰면 영지도 잘 관리하나. 다 각기 잘하는 영역이 있는 거지. 괜한 말은 그쯤 해둬. 그런 생각 해본적도 없고 설령 있다고 하더라도 아버지께서 허락하실 리 없으니까.”
욕심도, 미련도 없다. 애초에 내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오히려 지금까지의 인생이 내게 더 잘 맞는 길이었다. 단지 열 명 분의 복수를 책임진 것만으로도 이렇게 어깨가 무거운데 수만 명의 목숨을 책임진다는 건 나에겐 무리였다.
“그러니까 형도 자식 낳을 때, 나 같은 놈으로 나오라고 기도해. 아들들끼리 싸우는 꼴 보고 싶지 않으면.”
“······계획은 아직 세우지도 않았는데.”
“안 나을 거야? 가문이 번창하려면 형이 노력해야지.”
“하하. 그래. 너 같은 녀석으로 나오라고 기도라도 해야겠구나.”
“그리고 정 미안하면 나중에 조카들이 마법 배우고 싶다고 하면 나한테 보내고. 열심히 부려 먹어줄 테니까.”
“그건 오히려 내가 부탁하고 싶은 일이지.”
그렇게 형제의 밤이 깊어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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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뵐 때까지 건강하십시오.”
“그래. 여행 간 김에 네 며느릿감도 좀 찾아오고, 신분은 상관없으니 말이다. 네 나이도 이제 스물다섯이다. 더 이상 여유를 부릴 만한 나이가 아니야.”
“······노력해보겠습니다.”
“노력만 하지 말고! 네가 자주 하는 말 있잖니, 결과가 중요하다고. 결과를 가져오렴. 결과를!”
어머니의 낯설지 않은 잔소리를 마지막으로 나는 드라그닐 영지를 떠나 남서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시간상으로 될지는 모르겠으나 제국 전체를, 기회가 된다면 제국 바깥의 다른 나라까지도 가볼 생각이었다.
“기연이 있었으면 좋겠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4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