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53화 (53/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3화 - >

다음 날, 윌랜드는 마탑에 한 차례 성장했음을 보고했다. 당연히 마탑에서는 또 한 명의 인재가 탄생했음에 기뻐했다.

사실 늦은 감이 없잖아 있었다. 그의 성격이 오만하였다고 하나 그에 걸맞은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테라 방벽에서의 고난을 통해 마음가짐뿐만 아니라 부족했던 경험까지 쌓아 돌아왔다. 솔직히 말해 나는 윌랜드가 살아남기만 한다면 마탑에 남아있는 것보다 더 빠르게 성장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오히려 지금까지 3서클에 머물러 있던 것이 이상하게 느껴질 정도로. 굳이 원인을 찾아보자면 윌랜드가 마법에만 집중하지 못해서가 아니었을까. 나에 대한 복수심, 후계자 자리에 대한 걱정과 야망 등이 갖가지 감정들이 그를 뒤흔들었을 테니까.

“스승님!”

“스승님은 무슨.”

내 조언 때문인지, 아니면 타이밍이 좋았던 것인지 4서클 마법사가 된 윌랜드는 무릎을 꿇으며 내게 감사를 표했지만 애써 물렸다. 어차피 시간은 조금 더 걸렸을지언정 윌랜드는 4서클에 닿았을 것이다. 말 몇 마디를 해준 것으로 과한 보답을 받을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누군가는 내 도움으로 넘지 못했던 벽을 뛰어넘었지만 정작 나는 벽 앞에서 허우적거리고 있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이미 올라온 벽에서 다음 사람이 올라올 수 있도록 손을 뻗는 것과 새로운 벽을 넘어서고자 다시 손을 뻗는 것이 같을 수는 없겠지만.

“답답하군.”

답답하다. 물론 목표를 향해서 끊임없이 나아가고 있는 것은 사실이었다. 내가 정했던 목표인 십 년 안에 복수를 마치는 것. 그리고 그를 위해 6서클에 준하는 실력을 갖출 것.

십 년 중 사 년이 흘렀다. 여전히 6서클은 먼 경지지만 육 년 안에 다다르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다만 문제가 있다면 테라 방벽에서 복수를 완수할 시간까지 생각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복수를 위한 본격적인 준비는 6서클부터 시작이라는 것. 그걸 생각하면 육 년이라는 시간은, 아니 오년 약간 넘게 남은 시간은 그리 긴 시간이라고 볼 수 없었다.

“고민이라도 있느냐.”

“스승님.”

스승님과 보낸 시간도 어느새 사 년이 넘었다. 내가 테라 방벽을 떠나 수도로 올라온 이유가 스승님의 가르침을 받아 빠른 성장을 하기 위함이었으니, 내가 수도에 올라온 이후 가장 오랜 시간 동안 교류를 가졌던 이라고 해도 틀린 말은 아니었다. 덕분에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주고받는 관계였던 나와 가델의 관계도 이제는 꽤나 그럴듯한 사제관계가 되어 있었다.

“티가 납니까?”

“며칠 전에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들어오더니, 오늘은 또 죽을상을 하고 있으니 세 살 먹은 어린 아이도 눈치 챌 것이다. 무슨 일이냐?”

“성장이······정체된 것 같아서 말입니다.”

“······네가?”

어렵사리 내뱉은 내 고민에 스승님이 어이가 없다는 듯 대답했다. 사실 내가 하고 있는 고민을 들은 사람이라면 열 명 중 아홉은, 아니 백 명 중 구십구 명은 저런 반응을 보일 것이니 남의 고민을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것이 아니냐고 말하기도 애매했다.

“네 나이가 몇이지?”

“스물다섯입니다.”

“스물다섯에 6서클을 바라보고 있는 마법사가 성장이 정체 되었다라······. 나조차도 네 나이 때는 네가 이미 밟고 있는 벽에 오른 것뿐이었는데 말이야. 네 성장은 유례가 없을 정도로 빠르다. 이 이상을 원한다면······스승으로서도, 한 명의 마법사로서도 욕심이 과하다라고 밖에는 말해줄 수가 없겠구나.”

욕심이 과하다라, 사실 말이야 백 번 맞는 말이었다. 지금껏 그 어떤 마법사도 나와 같은 성장세를 보여주지는 못했다. 그런데도 만족은커녕 정체를 입에 담다니, 제아무리 부족함을 인정하는 것이 발전의 시작이라지만 이쯤 되면 스승님의 말처럼 욕심이 과한 것밖에는 되지 않는다.

“너무 조급해하지 마라. 조급함에 쫓기다가는 오히려 먼 길을 돌아가게 되는 법이다.”

백 번 맞는 말씀입니다. 스승님.

그러나 나는 좀처럼 조급함을 내려놓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손에 닿을 것 같았으니까.

6서클. 그건 결코 끝이 보이지 않는 산이 아니었다. 그랬다면 조급함과 동시에 막막함까지 느꼈겠지. 그러나 나는 조급함을 느낄지언정 막막함을 느끼지는 않았다. 막막함이란 끝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걸을 때나 생기는 감정. 끝이 보이는데 막막함을 느끼긴 왜 느껴?

한 뼘, 단지 그 한 뼘만 뻗으면 닿을 것 같았다. 그것에 필요한 건 발판 약간, 사다리 한 칸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니 조급함을 내려놓지 못하는 거다. 조금만 더 하면 닿을 것 같은데 닿지 않으니까.

만약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이 마법이 아닌 일반적인 학문의 길이었다면 좀 덜했을까.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처럼 시간이 지남에 따라 계단식으로 올라가는 시스템이었다면 덜 했을지도 모르겠다. 재능에 따라 시간의 차이는 있겠지만 결국 올라가니까.

그러나 마법은 달랐다. 위와 비슷하게 재능에 의한 차이는 분명히 있다. 아니, 오히려 마법이 재능에 의한 차이는 더욱 극명했다. 애초에 재능이 없다면 발을 딛을 수조차 없는 길이었으니까. 단지 이 길은 재능만으로는, 노력만으로는 끝은커녕 중간의 장애물조차 넘기 어려웠다.

재능, 노력은 기본 바탕이며 천운, 환경 등 수많은 요소들이 필요했다. 막말로 운이 따르지 않으면 나도 이 한 뼘을 영원히 좁히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하아.”

“여행이라도 다녀오는 것이 어떠냐.”

결국 내 조급한 모습을 보다 못한 스승님이 나섰다. 스승님께서는 내가 왜 이렇게 조급해하는지 모를 것이다. 아직까지 나는 스승님께 내 목표에 대해 설명하지 않았으니까.

드래곤.

그 존재에 대해 알게 된다면 스승님은 상황을 막론하고 테라 방벽으로 향할 것이다. 나를 제자로 받아들여 각인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것도 8서클을 위한 것이니만큼 마법의 종주로 불리는 드래곤은 스승님에게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일 테니까.

그렇기에 말할 수 없었다. 알리더라도 내가 충분한 준비를 끝마친 뒤여야 했다. 적어도 녀석의 목숨만큼은 내가 끊어야 했으니까. 내 복수를 남의 손으로 끝낼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여행 말입니까?”

“고향에 다녀오는 것도 좋겠지. 도대체 무엇을 보고 있기에 네가 그렇게 조급해하는지는 모르겠으나 사람이 앞만 보고 달려가다가는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는 법이다. 가끔 주변의 풍경을 둘러봤을 때 더 잘 달려갈 수 있는 법이지. 내가 아직 일개 마법사에 불과했던 때······.”

여행, 여행이라······.

그러고 보니 고향에 다녀온 지도 꽤 되긴 했다. 형의 결혼식 때 잠시 갔던 것이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삼 년 전의 일이었다. 내 성장의 밑거름이었던 테라 방벽에서의 경험도 굳이 따지자면 여행을 떠나 얻은 경험이니만큼 쓸모없는 시간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이 못난 제자, 잠시 스승님의 곁을 떠나도록 하겠습니다. 허락해주시겠습니까?”

“허락하마.”

#

여행을 떠나기 위한 짐은 많지 않았다. 수도에서 할 일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지금 당장 해야 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제작 의뢰를 맡긴 물건이 있었으나 내 물건에 함부로 손댈 만한 사람이 있는 것도 아니었으니까. 무엇보다 나만이 할 수 있는 추가적인 작업을 거치지 않는다면 단순한 철 덩어리에 불과한 만큼 그것을 걱정해 출발을 늦출 이유는 없었다.

“목표는······머리를 식히는 것과 시야를 넓히는 것.”

내 입으로 말하기에는 부끄러운 말이지만 수도로 올라와 지금까지, 나는 단 하루도 편히 쉬지 않았다. 마탑 내의 모든 방의 불이 꺼지더라도 내 방만큼은 밝았고 잠을 자든 밥을 먹든 내 머릿속에는 항상 마법에 관한 일로 가득했다.

목표로 향하는 길을 끊임없이 걸었고 벽에 막혀 잠시 멈췄을지언정 벽을 넘기 위해 노력했지, 잠시 앉아 쉬는 일 따위는 없었다.

스승님의 말이 옳다. 어쩌면 지금 나는 앞만 보고 달리느라 미처 발견하지 못한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상태일지도 몰랐다. 주변을 보지 못하고 앞만 보느라 넘어진 줄도 모른 채, 두 발을 열심히 놀리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기어가고 있기에, 닿지 않는 그 한 뼘이 너무나 멀게만 느껴지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잠시 목표로부터 눈을 떼는 것이다. 목표만 바라봐서는 나를 볼 수 없으니까.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 넘어졌다면 넘어진 것을 확인해야 일어설 수 있을 것이 아닌가. 넘어졌다면 일어선 뒤, 상처를 치료하고 다시 걷기 위한 준비를 한다.

그리고 다시는 넘어지지 않도록, 목표에 시선을 두면서도 길가의 장애물을 놓치는 일이 없도록 시야를 넓힐 수 있다면 한 발자국 물러날 가치는 충분했다.

“집으로 가자.”

다른 길로 새지 않는다면 내 조카가 세상에 나오기 전에 집에 도착할 수 있을 터, 그것만이 목적은 아니지만 잠시나마 머릿속에서 복수를 지우기 위해서는 가족들과 함께하는 시간만큼 좋은 것을 없을 것이다. 물론 여행 내내 고향에만 머무를 생각은 없었지만.

#

“저 왔습니다.”

“왔느냐.”

“······삼 년 만에 보는 아들의 얼굴인데 그걸로 끝입니까?”

근 삼 년 만의 귀환. 고향까지 오는 길에 불편한 점은 없었다. 괜한 접근을 차단하기 위해 정체를 숨기기는 했지만 아예 마법을 사용하지 못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내 수중에도 꽤나 많은 돈이 있었기 때문에.

삼 년 만에 도착한 드라그닐 영지는 여전했다. 마정석 광산이 개발되고 그 중 일부라도 에 판매해 수익을 얻고 있으니 결코 작은 돈은 아닐 텐데, 저택 내부는 여전히 검소할 따름이었다.

“그러면 부모의 생일에도 얼굴 한 번 비추지 않는 불효자가 왔다고 환영회라도 열어주길 바랬느냐?”

“죄송합니다.”

할 말이 없었다. 아마 형의 결혼식이 아니었다면 고향에 찾아오지 않은 기간은 더 길어졌을 테니까. 아버지께서 저리 말씀하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서 무슨 일이냐. 부모의 생일에도 오지 않았던 네가 이리 온 것을 보면 수도에서 무슨 일에라도 휘말린 것이냐?”

“그런 것이 아니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너무 앞만 보고 달려온 것 같아 스승님의 말에 따라 잠시 머리를 식히려고 온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말은 저리 하시면서도 나의 급작스러운 방문에 걱정하시던 아버지의 걱정을 풀어드렸다. 확실히 사전에 연락도 없이 내려온 만큼, 내가 수도에서 수많은 이들의 중심에 있었던 만큼 갑작스러운 변화에 걱정이 들 수밖에 없으셨을 것이다.

“어, 왔냐?”

“오랜만이네. 근데······ 그 아기는?”

“아버지께서 말씀 안 하시디? 네 조카다.”

최소한 한 달 정도는 더 있어야 나오는 것 아니었나? 물론 아이라는 것이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나오는 것은 아니라지만.

“뭐가 그리 급해서 이렇게 일찍 나왔는지, 부모 될 사람의 얼굴이라도 궁금했던 모양이지!”

이런, 그렇다면 내가 고향에 온 이유가 하나 줄어들었다. 출산이라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인 만큼 혹여나 사고에 대비해 미리 와있으려는 것이었는데. 형수님도 아이도 무사하다하니 다행이었다.

“그런데 무슨 일이냐. 사고라도 치고 쫓겨난 건 아니겠지?”

이러다가는 만나는 사람마다 일일이 해명을 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단지 휴식을 위해 내려온 것이라고 말하니 형도 고개를 끄덕인 채, 나를 끌고서 형의 방으로 데려갔다.

“왜?”

“마침 잘 됐다. 딱 네가 해줘야 하는 일이 생겼는데, 해줄 거지?”

“뭔데?”

나만 할 수 있는 일이라니, 영지에 무슨 큰일이라도 있나? 아버지께서는 그런 말씀하지 않으셨는데, 어쩌면 쉬러온 나를 염려해 말을 꺼내지 않았다는 걱정이 들 때, 형이 입을 열었다.

“아이 좀 봐줘.”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3화 -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