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0화 - >
윌랜드의 아버지, 크라머 백작은 치밀어 오르는 분을 참지 못한 채, 윌랜드를 쏘아보았다. 또 한 번 더 큰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더 많은 것을 손에 넣을 수 있는 흔치않은 기회였는데 멍청한 아들 때문에 허공으로 날려 보내고 말았다.
더 부아가 치미는 사실은 그의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이들이 바쁘게 움직이는 와중에 자신은 할 수 있는 것이 극히 제한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첫인상부터 최악을 달리고 말았으니까. 불과 어제까지만 하더라도 든든했던 아들이 이토록 미워 보일 수가 없었다.
“도대체 어떤 일이 있었던 게냐. 네 입으로 설명해라.”
대략적인 이야기는 측근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수도가 떠들썩해질 정도로 화젯거리인 만큼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를 수가 없었지만 장본인의 입으로 다시 한 번 듣고자 했다. 혹시라도 현 상황을 반전시킬 무언가가 있을 수도 있었으니까. 그러나 차라리 듣지 않는 것이 나았을 정도로 윌랜드의 입에서 나온 전후사정은 너무나 처참했다.
“······후.”
눈을 감고 몸을 의자에 기댄 채 작게 한숨을 내쉬는 크라머 백작과 흐르는 피를 닦을 생각도 하지 못한 채 우두커니 서있는 윌랜드. 그 모습은 점점 세력을 넓혀나가던 신흥 백작과 그 후계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초라하고 처량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다니는 거냐!”
“······.”
“그깟 알량한 재능으로 알량한 힘을 얻고 나니 세상이 다 네 발밑에 있는 것처럼 보이더냐! 아니면 가문의 힘이 네 힘처럼 여겨지더냐! 도대체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 자에게 시비를 걸었는지 나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어!”
크라머 백작은 윌랜드에게 폭언을 쏟아 부었다. 아들에게 하는 말 치고는 할 말 못할 말이 다 섞여 있었지만 크라머 백작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단순히 말만으로 끝날 수 없을 것 않았기에.
“후우. 후우.”
몇 분 간 이어진 폭언. 윌랜드는 조금의 미동도 하지 않은 채 그 폭언의 파도를 정면으로 맞닥뜨리고 있었다. 그렇게 한참동안 폭언을 쏟아 붓다가 이내 화가 가라앉았는지 한숨을 몰아쉬는 크라머 백작.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서는 꼴도 보기 싫다는 듯 윌랜드에게 등을 보였다.
“가서 무릎을 꿇든 머리를 조아리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대제자의 화를 풀어! 대제자와 함께 돌아오는 것이 아니라면 내 얼굴 볼 생각은 하지도 마라!”
내쫓긴 윌랜드는 방으로 되돌아와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단 한 번의 잘못된 판단으로 잃은 것이 너무나 많았다.
크라머 백작의 자식은 그 혼자만이 아니었다. 크라머 백작은 세력을 넓히기 위해, 탄탄히 다지기 위해 결혼이라는 수단을 아끼지 않았고 처만 셋에 첩은 일곱 명에 달했다.
그러하니 후계자 자리를 노리는 배다른 형제들만 하더라도 두 손을 동원해도 셀 수 없을 정도. 오늘 일로 자신이 몇 발자국은 뒤로 물러났음을, 그리고 적이나 다름없는 형제들이 기쁨의 박수를 치고 있으리라는 것은 너무나 명백한 사실이었다.
‘젠장.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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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머 백작이 낭패를 느끼고 있었다면 당황함을 느끼고 있는 이도 있었다. 레닐의 아버지, 드라그닐 자작만큼이나 현 상황에 당황스러운 이도 없을 터였다.
“이, 이게 다 무슨 일이더냐?”
다 같이 짜기라도 한 듯 어느 날을 기점으로 혼담이 물밀 듯 밀려들어왔다. 스물 하나라는 나이가 결혼하기 이른 나이는 아니었으니 레닐에 대한 혼담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으나 이렇게 폭발적인 수준은 아니었다.
그가 이름을 들어본 가문부터 듣지 못한 가문까지, 조금 과장되어 말한다면 적당한 나이 대의 딸을 둔 제국의 모든 귀족들이 혼담을 제의한 듯한 숫자였다. 심지어 어떤 귀족은 아직 열 살도 채 안 된 아이를 신부로 내세웠으니 이쯤 되면 꺼림칙함을 느낄 정도였다.
“다 레닐이 열심히 한 덕분 아니겠습니까.”
“그렇긴 하다만, 레닐이 마탑주님의 제자가 된 건 조금 된 일이 아니냐. 이제 와서 이렇게까지 늘어난 이유가 분명 있을 것이다.”
그러나 드라그닐 영지는 수도와 꽤나 떨어져있는 영지였기에 소식이 느렸다. 다른 귀족들이 그러는 것처럼 가주 본인이 혹은 가족들 중 한 명이라도 수도에 있었다면 무슨 이유인지 빠르게 파악이 가능했을 텐데, 레닐이 수도에 있었지만 소문의 장본인답게 소식을 전하지 않았으니 드라그닐 자작은 영문도 모르고 밀려오는 혼담에 당황해할 수밖에 없었다.
“하하. 잘난 동생을 둔 덕에 저에게까지 혼담이 오기도 하는군요.”
그리고 그 혼담이 레닐에게만 집중된 것은 아니었다. 거의 대부분이 레닐을 대상으로 한 혼담이었지만 가끔가다 레닐의 형인 보리스를 향한 혼담도 볼 수 있었다. 아주 가끔가다가 여동생인 이리엘을 향한 혼담도 있었고. 어떻게 해서든 레닐과 관계를 맺으려는 이들의 몸부림이었다.
“왜, 생각이 있느냐? 그렇다면 말만 하거라. 내가 최선을 다해 나서볼 테니.”
“농담이시죠?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 이를 상대로, 게다가 목적조차 제가 아닌 레닐과 가까워지기 위한 것. 그렇게 이루어진 가정이 행복할 수 있을 리가 없잖습니까.”
드라그닐 자작의 짓궂은 질문에 보라스가 손사래를 치며 부정했다. 그가 생각하고 있는 결혼은 그런 것이 아니었으니까. 서로 사랑하는 이와 행복한 가정을 꾸리는 것. 동시에 드라그닐 자작도 한 번 해본 말일 뿐, 그의 자식들을 정략결혼의 희생양으로 만들 생각은 없었다. 물론 귀족 전체를 놓고 보자면 드라그닐 가문이 특이한 것이었다.
밀려오는 혼담을 보면 알 수 있듯이 귀족들에게 있어 결혼은 하나의 수단이었으니까. 가문이 너를 위해 많은 것을 해주었듯 너도 가문을 위해 희생해라. 몇몇을 제외하고서는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말이었다. 가문이 없었다면 그들이 입었던 값비싼 옷도, 그들이 먹었던 희귀한 식재료도, 그들이 몸을 맡긴 푹신한 침대까지, 아무것도 없었을 테니까.
“게다가 저, 사랑하는 사람 있습니다. 아버지가 그러셨던 것처럼 그 사람만 사랑할 생각이고요.”
그의 나이가 올해로 스물셋. 레닐이 그러하듯 그도 결혼하기에 이른 나이는 아니었다. 특히나 가문을 이을 장자이니만큼 그의 결혼에 대해서 이그닐이 모를 리가 없었고 지금의 말은 말 그대로 짓궂은 장난일 뿐이었다.
“알았다. 알았어. 이 이상 말했다가는 마린 경이 원망의 시선을 보낼 테니 그만 해야겠구나. 미래의 사돈에게 벌써부터 미움 받고 싶지는 않으니.”
보리스는 드라그닐 영지에서 오랫동안 기사로서 일해온 마린 경의 딸과 연분을 나누고 있었다. 아직까지 구체적인 날짜는 잡히지 않았지만 그와 그녀가 마음을 먹는 순간이 드라그닐 영지의 축제날이 될 터였다.
“그나저나 이것들을 어떻게 한다.”
수십 개의 혼담들, 그 중 드라그닐 자작보다 높은 작위를 가진 이들이 보낸 혼담들도 수없이 많았다. 아무리 그의 아들이 혼담을 받는 입장이라지만 함부로 처리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우선 레닐에게 소식을 전하시죠. 그리고······. 거절의 답장을 미리 써놓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거절을?”
“예. 할 일이 있다고 제 입으로 말하지 않았습니까. 그 녀석이 허송세월을 보내던 건 노력을 못해서가 아니라 할 일을 정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할 일이 생겼으니 어디 결혼 같은 일들이 눈에 들어오겠습니까. 그러니 제의를 한 이들이 기분나빠하지 않을 답장을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네 말이 옳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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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주변이 떠들썩할 무렵 정작 내 주변은 그다지 떠들썩하지 않았다. 오히려 조용하다면 조용한 편이었지. 나를 향해 수군대는 소리는 저 멀리 사라졌으며 그들이 보내던 질투 또한 많이 사라졌다. 질투란 것은 그들의 손이 닿을락말락한 위치에 있는 이들에게나 할 수 있는 것. 나처럼 아예 눈으로밖에 쫓을 수 없는 곳에 있는 이들이 받을 감정이 아니었다.
그러나 나를 향한 시기는 여전히 존재했다. 시기라는 감정을 품는 이들이 달라졌기 때문에. 지금까지 유망주들이 나를 향해 시기했다면 이제는 마탑에서 한 자리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나를 시기했기 때문이었다.
이유야 지금까지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나의 재능, 내가 이뤄낸 성과들. 그들이 수십 년에 걸쳐 도착한 장소에 나는 십 년이 조금 넘어서 도착했으니까. 질투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의 반응이었다.
“그래도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훨씬 더 많아.”
어차피 새롭게 나를 경계하는 이들도 나와는 거리가 먼 이들이었다. 나의 목표가 마탑주가 되는 것이라면 이들과의 관계도 중요하겠지만 그런 것은 아니었으니까. 오히려 화제의 중심이 되어 제국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아 얻을 수 있었던 것이 더 많았다.
단적으로 내 방만 보더라도 나와 연을 맺고 싶어 하는 귀족들이 보낸 선물들로 발 디딜 틈이 없는 지경이었다. 물론 맨 입으로 받은 것은 아니고 수많은 제안들과 함께 온 선물들이었지만. 아마 가문에게도 많은 선물들이 도착했을 것이다. 꼭 본인과 친해지지 않더라도 주변 인물부터 포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일 테니.
“차근차근히 가자. 너무 늦어서는 안 되지만 놓치는 것이 있는 것보다는 나아.”
그러나 내 경지를 세상에 알린 건 고작해야 제물을 얻고자 함이 아니었다. 아니, 일차적인 목표는 될 수 있겠으나 최종적인 목표는 아니었다. 제물을 모으는 이유는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물건을 제작하기 위한 자금 마련일 뿐이었으니까. 아직은 이론만 세워놓고 있을 뿐이었지만 한 번 더 벽을 뛰어넘는다면 충분히 현실로 구현할 수 있으리라.
똑똑-
그 때, 내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십중팔구는 나와 친분을 맺고자하는 귀족의 심부름꾼이겠지. 그 쪽에서 먼저 이것저것 주는데 거절할 이유는 없다. 그런 생각으로 방문을 열었을 때, 나는 영 불쾌한 얼굴을 마주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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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나를 보러 왔지?”
“······지금까지 제가 했던 무례에 대해 사과드리겠습니다.”
“크라머 백작님께서 시키시던가?”
고개를 조아리며 사과하는 윌랜드의 모습을 시큰둥하게 쳐다봤다. 그가 진심으로 고개를 조아리고 있다과 생각하지 않았기에. 그 사이 어떤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진심으로 뉘우치고 반성했다는 이야기보다는 위에서 압박이 들어와 어쩔 수 없이 사과한다는 쪽이 더 설득력 있었으니까.
“제 의지입니다. 많이 반성하고 후회했습니다. 그 동안 제가 했던 무례한 행동들, 무례한 발언들 사과드리겠습니다. 어떻게 하면 제가 진심이라는 것을 알아주시겠습니까.”
그의 사과를 받든 말든 딱히 큰 상관은 없었다. 이제 와서 그가 나에게 무슨 짓을 하기에는 내가 너무 많이 커버렸다. 얼마 전 나와 윌랜드가 어른과 아이의 싸움이었다면 지금은 사람과 개미가 되었을 정도로.
그가 했던 발언들은 내게 분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지만 이제 와서는 분노조차 느껴지지 않았다. 한 번 풀었기 때문일까, 아니면 분노를 품을 가치조차 없기 때문일까.
“진심, 진심이라······.”
혹여나 그의 사과가 진심이라면 그걸 확인할 좋은 방법이 생각났다.
“삼 년.”
“······삼 년?”
“테라 방벽에서 삼 년을 보낸다면 지금의 사과가 진심이라고 믿지. 그렇게 할 수 있나?”
삼 년이 지났을 때, 열 명이었던 내 동기들 중 살아남은 사람은 나를 포함해 단 두 명에 불과했다. 설령 지금의 사과가 진심이 아니더라도 삼 년이 지나도록 살아있다면 지금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있을 테고 죽는다면 그걸로 끝. 물론 선택은 그의 몫이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50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