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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48화 (48/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8화 - >

나를 욕하는 것이라면 살짝 기분 나쁘기는 하지만 아무렇지 않게 넘어갈 수 있다. 지금까지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오늘처럼 유난히 신경에 거슬리는 날이 아니라면. 그러나 테라 방벽에서 희생한 이들을 모욕하는 것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단순히 동료들을 모욕했기 때문이 아닌 내가 보낸 삼 년 동안의 시간, 다른 이들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이들의 용기와 희생에 대한 멸시 그리고 그렇게 지켜낸 이들의 배신까지.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들의 연속이었기 때문이었다.

“동료를 버리고 도망쳤다······. 틀린 말은 아니지.”

윌랜드의 말에 더 민감하게 반응하게 되는 건 그 말이 일정 부분 옳다는 걸 내 스스로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더 강해져서 돌아오겠다고, 이보 전진을 위한 일보 후퇴라고 자기합리화를 하더라도 결국 도망친 건 도망친 것이니까. 그렇지만 윌랜드는 그 말을 나에 한정지어 내뱉었어야만 했었다. 내 스스로 약점이라 생각하는 만큼 약점을 찔렸을 때, 더 격하게 반응하게 되니까.

“스스로가 꼬리 말고 도망친 개라는 건 알······.”

“테라 방벽에 와본 적이 있나?”

중간에 끊고 들어가는 나의 말에 안 좋던 기분이 더 나빠진 듯 윌랜드가 인상을 찌푸렸다. 그도 그럴 것이 남의 말을 중간에 끊는 것은 굳이 귀족이 아니더라도 예의가 아니었으니까. 이렇게 시비를 걸고 그걸 받아준 상황에서 예의를 차릴 이유도 없긴 했지만.

“하, 그깟 낙오자들이 모인 곳에 나 같은 엘리트가 뭣 하러 갈까. 가봤자 상처 입은 개들이 서로의 상처를 핥아 주는 것 밖에 더 볼까.”

피식-

그 어처구니없는 대답을 듣고 있자니, 아니 어쩌면 저 대답이야말로 바깥에서 테라 방벽을 생각하는 평균적인 시선일지도 몰랐다. 나조차도 테라 방벽으로 떠나게 되었을 때, 상당히 낙심을 했었으니까. 그러나 그 곳에서 삼 년이라는 시간을 보낸 지금, 그 생각이 얼마나 단순하고 어리석은 것인지 깨달았으니까.

끅끅끅-

“뭐가 그리 웃기지?”

“끅끅. 웃기지. 세 살짜리 어린 아이가 걸을 줄 안다고, 뛸 줄 안다고 성인에게 당신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고 떼를 쓰는데 웃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을까.”

낙오자들. 맞다. 테라 방벽의 마법사들은 낙오자들이 모인 집단이었다. 재능의 벽에 부딪쳐 더 이상 성장하지 못하거나 배경이 보잘 것 없거나. 뒷배 든든하고 재능까지 있는 이들이 보기에는 낙오자처럼 보이겠지.

동 나이대의 실력만 따지더라도 그들이 더 뛰어날 것이다. 그들은 좋은 스승 밑에서 어릴 적부터 마법을 배워왔을 테니까. 뛰어난 재능과 노력은 기본이고 운과 같은 외부적인 요소들까지 도와줬겠지. 그러나 이것 하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었다. 테라 방벽의 마법사들이 낙오자들이라면 그들은 엘리트라는 탈을 쓴 애송이들이라고.

“지금 나한테 하는 말인가?”

“세 살짜리 어린아이는 많지만 떼까지 쓰는 아이는 내 눈앞에 한 명밖에 없는 것 같은데.”

윌랜드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졌다. 내가 그를 세 살짜리 떼쓰는 아이로 칭한 것이 그렇게 화나는 일이었나 보지. 이래서 남들에게 떠받들어지기만 한 사람이 안 되는 법이다. 자신이 다른 사람에게 한 짓은 당연하다 생각하고 다른 사람이 자신에게 한 짓은 당연하지 않다 생각하니까.

툭-

그에 따른 결과 또한 간단했다. 나의 발밑에 던져진 손수건 하나. 그리고 윌랜드가 얼굴을 붉히며 손수건을 던진 손짓 그대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의미를 나도 모르지 않았다. 중간에 말을 끊는 것과 달리 귀족들이나 쓰곤 하는 예법이었지만 나 또한 귀족으로서 배울 것은 대부분 배웠으니.

“꼬맹이가 떼 한 번 제대로 쓰는군.”

#

윌랜드가 레닐에게 결투를 신청했다는 소식은 빠르게 퍼져나갔다. 그도 그럴 것이 둘은 어떤 의미로든 남의 시선을 끄는 이들이었기 때문에. 윌랜드는 마탑 내에서도 기대를 걸고 있는 유망주였으며 레닐은 말해봤자 입이 아플 정도로 화제의 인물이었으니까.

“웬 갑자기 결투?”

“뻔하지. 솔직히······ 굴러온 돌이니까. 게다가 윌랜드는 마탑주님의 제자가 되고 싶어 했잖아. 자기가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진 사람에 대한 질투가 크게 작용했겠지.”

“재미는 있겠네. 최고의 유망주와 대제자의 결투라······.”

“누가 이길까? 아니 어떤 식으로 결투를 벌이려나?”

물론 귀족들 간의 결투라는 것 자체가 화젯거리가 될 수밖에 없는 소재이기는 했지만, 주인공이 그 둘이었기에 더더욱 그러했다. 물론 주인공만 화제가 된 것은 아니었다. 방식, 결과에 따른 보상 등등. 그 중 많은 이들이 입에 올리는 내용은 단연 결과에 관한 이야기였다.

“누가 이길까?”

“글쎄, 누가 이기는 게 그리 중요한가?”

“솔직히 말하면 대제자가 이겼으면 좋겠는데. 윌랜드, 걔 우리끼리 이야기니까 하는 말이지만 재수 없었어.”

“재수 없는 걸로 치자면 대제자도 마찬가지지. 세 살짜리 어린 아이라는 거, 우리한테도 하는 이야기잖아.”

“그런데 공정한 결투가 가능하긴 해? 윌랜드는 3서클이고, 아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대단하긴 하지만 대제자는 그래 보여도 4서클이라잖아.”

“결투는 윌랜드가 먼저 신청했다는데 걔 나름대로 생각이 있겠지.”

그랬다. 윌랜드는 분노했지만 동시에 분노에 휘둘리지는 않았다. 결투란 단순히 승패가 갈리는 것으로 끝이 아니다. 개인의 명성과 크게는 가문의 명성까지 달린 일이니까. 그럼에도 당당히 결투를 신청할 수 있었던 이유, 다른 이들의 이야기처럼 눈에 보이는 격차가 있음에도 손수건을 던졌던 이유는 간단했다. 본인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차이가 벌어져 있다는 건 인정하지. 하지만 그래봤자 한 발자국 차이야. 그것조차 완전한 한 발자국이 아니고.’

3서클과 4서클. 마법사들 간의 전투에서 서클의 차이는 곧 승패의 차이나 다름없었다. 기사들은 오러의 유무에만 큰 영향을 받을 뿐, 오러를 검에 두를 수만 있다면 검술에 따라 승패가 좌지우지된다는 걸 생각해보면 너무 한 요소에 치중된 것이 아니냐 싶겠지만 그럴 수밖에 없었다.

서클이 높다는 건 평균적으로 마력이 더 많다는 것을, 더 강한 위력의 마법을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같은 마법을 더 빠르게, 더 강하게, 더 많이 시전할 수 있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일반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는 자신감이 윌랜드에게는 있었다.

‘그 자도 4서클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았어. 나는 3서클을 완벽하게 다룰 수 있고. 마법을 배우기 시작한 시점 역시 내가 최소 몇 년 이상은 길어.

가르침을 받은 내용의 수준도 다르고. 더 강한 위력의 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것만 빼면 내가 뛰어나면 뛰어났지. 뒤질 게 아무것도 없다고. 견제를 통해 고 서클의 마법을 시전할 타이밍만 주지 않는다면 내가 질 이유가 없지.’

그것은 레닐이 평범한 마법사였다면 꽤나 일리 있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제대로 다루지 못하는 무기는 주인을 헤치는 것처럼 마법이라고 하여 다를 이유는 없었으니까. 하지만 레닐은 평범함과는 조금, 아니 많이 동떨어진 마법사였고 그 자신감이 끝까지 이어질 수 있을지는 결투가 벌어져야 알 수 있는 일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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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꼬리 만 개처럼 도망치지는 않았군. 몬스터 앞에서는 잘만 도망친 걸로 알고 있는데, 몬스터보다는 내가 만만한가 보군.”

“그 어떤 어른도 아이를 상대로 겁을 먹지는 않으니까. 그리고······떼쓰는 아이에게 떼쓰는 것만으로는 이룰 수 없다는 것도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는 일도 어른으로서 할 일이니까.”

꾸욱-

“그렇게 어른을 입에 달고 사는 것치고는 어른다운 모습은 단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한 것 같은데, 아! 혹시 죽기 싫어 뭐빠지게 도망치는 것이 네가 생각하는 어른으로서의 덕목인가? 그렇다면 스스로를 어른이라고 지칭하는 것이 이해가 가는군.”

“아이들은 항상 어른들을 보며 덩치만 커지면 어른이 될 수 있다고 착각하는 법이지.”

나와 윌랜드의 결투에는 수많은 이들이 구경꾼으로서 자리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귀족들 간의 결투는 흔치 않은 구경거리였으니까. 마탑에 머물고 있는 마법사들은 자신들의 인생을 마법에 바치기로 결심한 이들이었지만 그 과정에서 항상 즐거움만을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학문보다도 어렵고 복잡한 만큼 그것을 이뤄냈을 때의 성취감도 대단했지만 성취감을 얻기까지의 과정은 무척이나 고될 뿐만 아니라 얻을 수 있을지 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그런 만큼 이런 소소한 즐거움이야말로 그들이 잠시나마 복잡한 고민을 잊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규칙은 간단하다. 서로 간에 최선을 다하여 상대방을 무력화할 것. 위험하다 싶으면 내가 끼어들겠지만 그 전에 두 손을 번쩍 드는 걸 추천하지. 늦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야.”

중재는 중년의 한 마법사가 맡았다. 귀족임과 동시에 뛰어난 마법사였음으로 귀족 간의, 마법사들 간의 결투를 중재하기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내 발이 결투장 바깥의 땅에 닿는 순간부터 시작이다. 두 사람 모두 귀족으로서 부끄럽지 않은 정정당당한 결투를 할 수 있도록.”

그리고 중재자의 발이 경기장을 벗어났다.

#

무의식적으로 허리춤에 메인 권총에 손이 갔다. 이번 결투에서는 사용할 생각이 없었지만 습관이라는 것이 그리 쉽게 사라지지 않는 것처럼 권총의 존재가 느껴지지 않으면 괜스레 불안함이 느껴지곤 했다.

‘어떻게 할까.’

이 결투에 임함에 있어 패배라는 두 글자는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아니, 생각하지 않았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지금의 결투는 반드시 이겨야만 하는 결투였다. 나를 위해서도, 테라 방벽에 남겨둔 동료들을 위해서도, 가족들을 위해서도.

무엇보다 내가 진다는 그림이 잘 그려지지 않았다. 단순히 내가 윌랜드보다 서클이 높기 때문이 아니었다. 물론 서클이 높다는 건 평균적인 능력치 또한 높다는 이야기였지만 단순히 그것만 믿고 배짱을 부리기에는 내가 겪은 경험들이 너무 아까웠다.

‘강한 마법을 쓸 수 있느냐 없느냐는 실전에서 중요하지 않아.’

실전에서 중요한 건 수많은 상황들 중 가장 적절한 마법을 얼마나 빠르게 구사할 수 있느냐 였으니까. 내가 테라 방벽에서 배운 것들 중 가장 가치 있는 것 또한 마찬가지였다.

약한 마법, 강한 마법 상관없이 가장 적절한 마법을 구사하는 법. 단순히 누군가의 보호를 받으며 강력한 위력의 마법을 쏟아내는 병기로서의 마법사가 아닌 진정한 의미의 배틀 메이지(Battle Mage)가 되는 방법 말이다.

그래서 5서클 아니 4서클의 마법을 사용할 생각이 없었다. 마법의 위력이 아닌 활용 능력으로 저 녀석을 눌러주고 싶었으니까. 테라 방벽에서 배울 수 있었던 것들은 네 녀석이 배웠던 것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오히려 앞선다는 것을 머릿속에 똑똑히 각인시켜주고 싶었다.

‘어디 마탑이 내세우는 유망주의, 방구석 마법사들의 보물의, 스스로를 엘리트라 자부하는 이들의 실력을 봐 볼까.’

내 나름대로의 환영인사가 윌랜드를 향해 쏘아졌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8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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