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6화 - >
“여기까지 뭣 하러 오셨어요. 안 그래도 바쁘실 텐데.”
“바쁘다고 해도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는 법이다. 네 얼굴을 보는 것도 그 중 하나이고. 어디 다친 곳은 없느냐?”
“네. 편지에 적었던 대로 다친 곳 하나 없이 멀쩡해요. 아버지는요. 괜찮으세요?”
“네가 무사하다면 나도 괜찮다. 이렇게 눈으로 확인하니 마음이 놓이는구나.”
근 삼 년 만에 만난 가족들은 변한 것이 없었다. 사실 삼 년은 누군가에게 큰 변화가 있기에는 길지 않은 시간이었으니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도 근심걱정이 많으셨는지 내가 무사하다는 것을 직접 확인하시고 나서부터는 안색이 많이 좋아지셨고 형도 나를 대신 보냈던 것이 그 동안 계속해서 마음에 짐으로 남아있었는지 한결 편안한 모습이었다.
“그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갑자기 전역이라니, 물로 네가 안전해진 건 환영할만한 일이다만.”
“전역은 아니고요. 다시 돌아가긴 해야 해요. 완전히 끝낸 것이 아니라 잠시 미뤄둔 거라서, 게다가 그 곳에서 해야 할 일도 있고요.”
“해야 할 일?”
“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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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반드시 해야만 하는 일이 있어요.”
그 말을 하는 레닐의 눈빛을 보았을 때, 레닐의 아버지인 이그닐은 흠칫할 수밖에 없었다. 삼 년 사이, 그가 알던 아들은 그들과 다르게 많은 것이 변해있었으니까. 삼 년이라는 시간은 누군가가 변하기에는 짧은 시간이었으나 동시에 충분히 긴 시간이었다.
‘어른이 되었다······라고 해야 할까.’
그의 품을 떠나기 전, 그의 아들은 여러모로 어렸다. 아직 하고 싶은 일을 찾지 못해 유랑하고 있었고 확고한 의지나 행동 또한 보여주지 못했다. 그렇기에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레닐이 테라 방벽으로 향할 때,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시선에서 레닐은 아직 보호받아야 할 어린 아이였으니까.
그러나 오늘, 삼 년 만에 만난 아들은 이미 어른이 되어 있었다. 눈에는 확고한 의지가 보였고 행동 또한 자신감이 서려있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이 있다면 가족들의 앞이라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할 일이 있다는 말이 살기와 상실감을 품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그것 또한 한 명의 어른이 되기 위해서는 겪어야 할 계단임에는 분명했다. 그 계단을 모두 올랐을 때, 거친 세상 속에서도 온전히 제 두 다리로 설 수 있으리라.
‘응원하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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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도, 어머니와도, 형과도, 여동생과도 어느 정도 이야기를 마친 나는 이 곳을 벗어나야 함을 느꼈다. 마탑주의 제자라는 신분 덕분에, 따로 머물 곳이 없었던 탓에 마탑 내에 존재하는 방에 짐을 풀 수 있었지만 일단 기본적으로 마탑은 숙박시설이 아니었다. 방은 나 혼자 지내고 연구하기에 부족함이 없었지만 온 가족이 머물기에는 부족한 점이 너무나 많았다.
“머물 곳은 정하셨어요?”
“다른 곳에 머물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니, 우리가 짐을 풀 곳은 한 곳밖에 없지 않겠느냐.”
아버지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의 땅값은 다른 곳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높았다. 당연한 일이다. 황궁, 황제가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제국의 중심이었기 때문이지. 문화가 되었든 교통이 되었든 행정이 되었든.
당연히 수도에 개인 저택을 가지기 위해서는 어지간한 부로는 어림도 없었다. 자그마한 집이라면 모를까. 하지만 그런 작은 집은 오히려 자신들의 품위를 깎아내린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귀족들이니만큼 수도에 개인 소유의 저택을 가지고 있는 귀족의 숫자는 많은 편은 아니었다.
그렇다면 수도에 올라온 귀족들은 어디에서 머무느냐. 여행자들이 여행 도중 도착한 도시에서 여관을 찾듯 귀족들에게도 그들의 격에 맞는 여관이 있었다. 그만큼 가격 또한 만만치 않았지만 우리 가족은 귀족이었다. 그것도 영지를 보유하고 있는 귀족.
영지가 작고 경제적으로도 여유롭지 않다지만 조금 무리를 하신다면 수도에 그럴듯한 저택 하나는 마련할 수 있는, 물론 그것을 위해 영지민들이 한층 더 고생을 해야 할 것이기에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리 하지 않으시겠지만.
“일단 나가요. 오랜만에 다 같이 식사도 하고, 이야기도 좀 더 나누고. 아무래도 여긴 좀······ 장소가 좋진 않네요.”
그 뒤로 나는 가델과의 수련을 잠시 멈춘 후, 며칠 동안 가족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다. 삼 년 만에 처음으로 만났다. 고작 하루, 그것도 몇 시간 정도로 하고 싶은 이야기가 동날 리가 없었다. 나 또한 하고 싶은 말들이 많았고.
그러나 복수에 관한 이야기는 의도적으로 뺐다. 위험한 일이다. 어려운 일이고. 발을 조금만 헛디뎌도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질 수도 있는 길을 걷겠다는 것을 가족들에게 말해 걱정시키고 싶지는 않았다. 만류하신다고 하여 뜻을 바꿀 것도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짧지만, 그렇지만 긴 며칠간의 만남 끝에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왔다. 뒤를 돌아보는 건 며칠이면 충분했다. 이제는 다시 앞을 향해 걸어 나갈 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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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네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이라고 생각하지?”
“······가장 큰 약점 말입니까?”
“그래.”
어느 날, 스승은 내게 물었다. 나의 가장 큰 약점이 무엇이냐고. 딱히 고민해본 적이 없는 주제였다. 약점이라니, 약점과 강점. 그 두 가지가 있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최소한의 성장이 뒷받침되어야 했으니까.
많은 요소들 중 두드러지게 못하는 것을 약점이라고 하지, 전체적으로 못하는 걸 약점이라고 칭하지는 않지 않는가. 그리고 5서클이란 경지는 최소한의 성장치는 충분히 만족한 경지였다.
‘내 약점이라.’
한 번쯤은 짚고 넘어가야 할 문제였다. 전체적인 크기를 키우는 것이, 특출한 강점을 더욱 강화하는 것이 성장이라면 도드라진 약점을 보완하는 것도 성장의 한 부분일 테니까.
천천히 생각을 해보자. 경험? 솔직히 말해 경험은 내게 약점이 아니라 강점이었다. 나이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 세월 동안 어떤 일을 겪었느냐가 중요하지. 그리고 나는 그 동안 누구와 비교해도 밀리지 않을, 한 수 위의 경험을 했다고 자부했다.
다른 부분은 어떨까. 마력을 다루는 능력에 대해서도 딱히 약점이라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 테라 방벽에서는 같은 마법이라고 하더라도 더 빠르게, 더 완벽하게 시전을 해야 했고 실수가 있어서도 안 됐다.
신체적인 능력이야 마법사들이라면 공통적으로 가지는 단점이었으니 나의 약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더군다나 나는 다른 이들에 비하면 비교적 체력이 더 뛰어나기도 했고. 그런 내게 굳이 약점을 찾고자 한다면.
“마력의 양······ 이라고 생각합니다.”
내가 몸 안에 품고 있는 마력의 양이었다.
“알고는 있구나.”
그리고 가델도 부정하지 않았다. 사실 이건 젊은 마법사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었으며 내 또래의 마법사에 비하면 딱히 약점이라고 할 만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기준을 나와 똑같은 5서클 마법사들로 둔다면 명백한 약점이었다.
“넌 충분히 뛰어난 마법사다. 또래에 비해서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수준을 놓고 봤을 때도. 단순히 네 나이가 어림에도 5서클에 다다랐기 때문이 아니라 얼마나 마법을 이해하고 있는지, 어떤 상황에 어떤 마법이 가장 적합한지, 빠르고 완벽하게 마법을 시전하는 것 등등 테라 방벽에서 보낸 시간이 헛된 것은 아니었던 모양이지.”
다른 누구도 아닌 세계 제일의 마법사에게서 이런 칭찬을 듣자니 무안하기도 하고 어색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이어질 말에 집중했다. 그의 입에서 나올 한 마디 한 마디가 나의 약점을 채워줄 단서가 될 테니까.
“그러나 그 경험들로도 마력의 양만큼은 어쩔 수 없었겠지. 그것만큼은 시간이라는 절대적인 기준을 넘을 수는 없으니까.”
내가 다른 마법사들에 비해 마력량이 부족한 건 다른 이유가 아니었다. 시간, 그들에 비해 마법에 쏟아 부은 시간이 적었기 때문이라는 간단하고도 직관적인 이유였다.
내가 마법에 대해 알게 된 것은 아기였을 때부터, 그러나 본격적으로 마법 세계에 뛰어든 것은 한참 뒤의 이야기였다. 그럼에도 성인이 되기 전 3서클의 마법사가 된 것은 내게 재능이 있었다는 이야기겠지만 걷기 전부터 마법과 함께 지냈다는 마탑주나 다른 마법 가문의 후계자들에 비하면 한참 늦은 시작이었다.
거기에 나와 비교할 대상은 대부분이 삼사십 대의 마법사였으니 마력량이 약점일 수밖에. 게다가 지금의 나는 다섯 개의 서클을 완벽히 사용하지 못하고 있었다. 다름 아닌 마력의 부족 때문에. 졸졸졸 흐르는 다섯 개의 수로보다는 콸콸콸 쏟아지는 네 개의 수로가 더 효율적이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드래곤의 피는 내게 기연이었다. 마력을 다루는 감각뿐만 아니라 내 신체 자체를 마력에 친숙하게 바꿔버리며 같은 시간에 조금이라도 더 많은 마력을 끌어 모을 수 있게 만들었으니. 아마 이대로 시간이 지난다면 마력량은 내게 약점이 아닌 강점이 되어 있으리라. 시간이 지난다면.
“복수할 대상이 있다고 했던가.”
“예.”
“그렇다면 지금보다도 더 빠르게 강해질 필요가 있겠군.”
가델은 잠깐 고민에 빠졌다. 그리고 나는 잠자코 그 광경을 지켜봤다. 무슨 고민인지는 모르겠으나 내가 개입할 일이 아닌 듯싶었으니.
“나는 네게 최선을 다해 가르침을 주겠다고 맹세했다. 그렇다면 모든 방면에 있어 최선을 다해야겠지. 앉아라. 지금부터 네게 나의 마력연공법을 전수해줄 테니.”
“!”
“너 스스로 어느 정도 궤도에 오른 만큼 모든 것을 바꿀 필요는 없다. 필요한 부분은 바꾸고 필요하지 않은 부분은 쳐내면 될 뿐, 그것까지 내가 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알아둬라.”
“감사합니다!”
마력연공법. 그것은 곧 마법사에게 역사나 다름없었다. 그들의 선조가, 스승으로부터 대를 이어 내려온 비전. 내가 그의 제자가 되었으니 그 비전을 이어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나와 그의 관계가 일반적인 사제관계가 아닌 거래로 이루어진 관계라는 점에서 혹시나 싶었는데, 그는 그의 말처럼 최선을 다할 생각이었다.
“······너만을 위한 결정은 아니다. 네가 빨리 성장해야 그 각인이라는 마법에 대한 이해도도 높아질 테고, 내게도 더 많은 것을 설명해줄 수 있겠지. 내가 최선을 다한 만큼 너도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내 감사에 어색하게 말을 돌린 가델. 그 뒤의 일은 간단했다. 나는 조심히 앉아 몸에 힘을 풀었고 가델은 내 등 뒤에 손을 댔다. 남의 몸에 마력을 집어넣고 제어하는 것은 상당한 실력을 요구했다.
만약 내 등 뒤에 있는 사람이 마탑주가 아니라 그저 그런 마법사였다면 그 어떤 미끼가 있더라도 물지 않았을 만큼. 그런 만큼 나는 내 몸을 타고 흐르는 가델의 마력을 조금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다시 찾아올 기회가 아니었으니까. 괜한 딴 생각으로 지금의 흐름을 놓쳐버린다면 지금 이 순간을 평생 동안 후회할 지도 몰랐다.
최선의 과정은 물론이거니와 최고의 결과까지, 어느 것 하나 놓칠 수 없었다. 그리고 그의 최선의 가르침은 마력연공법의 전수로 끝이 아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6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