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4화 - >
레닐이 지크 후작의 명으로 수도에 올라와 스콜피온에 대한 시연회를 열고 난 이후로 일 년 하고도 반년이 넘는 시간이 흘렀다. 그 시간 동안 마탑주는 연구실에 틀어박힌 채, 바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그리고 그 이유를 알만한 이들은 대부분 알고 있었다.
스콜피온.
테라 방벽에서 건너온 마법 병기 때문이라는 것을. 마탑주의 명으로 새롭게 마련된 마탑주의 전용 연구실에 마탑주와 스콜피온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고작해야 변방으로 내몰린 자들의 작품 따위가 뭐 그리 대단하다고.”
“탑주님이시니까 우리가 보지 못한 무언가를 보셨을 지도 모를 일 아닌가.”
“그러면 그 낙오자들이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만들어냈다는 소리를 하는 건가!”
“헛, 험. 왜 또 말이 그렇게 되나. 탑주님 정도 되시는 분에게는 사소한 것도 영감이 될 수 있다 그런 말이지.”
물론 그에 대한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일단 마법사들에게 테라 방벽은 뒷배 없고 재능 없는 이들이 가게 되는 종착점과도 같은 곳이었으니까.
몰릴 대로 몰린 낙오자들이 만들어낸 작품을 가지고 그들의 정신적 지주이자 대표인 마탑주가 연구에 몰두하는 것은 그들로서는 마음 한 구석이 불편해질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무시해왔던 이들의 성과가 본인들과 비교해 부족할 바 없는, 한 편으로는 더 대단하다는 말이었으니까.
그러나 그런 반응도 하루 이틀,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나자 그들도 점점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도대체 어떤 비밀이 숨어져있기에 마탑주가 두 달이 넘도록 연구에 집중하는 것인가.
그러나 그런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유일하게 그들의 의문에 답을 내려줄 수 있는 인물은 연구실에 틀어박혀 얼굴조차 보이지 않았고 유일한 연구자료 조차도 그의 손에 들어가 있었으니까.
그렇게 그들의 궁금증이 점점 커져만 갈 때, 연구에만 몰두하고 있는 마탑주, 가델은 여전히 풀리지 않는 실뭉치를 붙잡은 채 실마리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도저히 모르겠군.’
그 일이 있은 직후부터 벌써 일 년 육 개월이 지났다. 그러나 그는 실마리조차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에게 있어 꽤나 당황스러운 결과가 아닐 수 없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파고들어가야 되는 거지?’
그는 천재였다. 천재 중의 천재. 그 정도 재능이 아니었다면 제국 제일의 마법사만이 오를 수 있는 마탑주의 자리에 앉을 수도 없었을 터였다. 그 어떤 벽을 마주해서도 좌절감이라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었으며 남들은 쳐다보는 것만으로도 모든 인생을 바쳐야 하는 벽조차 그에게는 조금 높은 벽에 불과했다.
그런 그에게도 넘을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벽이 있었으니 바로 8서클의 벽이었다. 지금껏 수많은 벽을 단순히 길가의 돌멩이로 만들었던 그의 재능과 노력이 무색해지는 벽의 등장. 그건 그에게 너무나 당황스러운 경험이었다.
지금껏 그가 오를 수 없다고 생각한 벽은 없었으니까. 그렇게 벽 앞에서 머뭇거리며 벽에 오르기 위한 방법을 생각하고 갖은 시도를 거듭하고 있을 때, 눈에 들어온 사다리가 있었으니 한 마법사가 자신의 연구 성과라 주장하는 마법이었다.
그 마법을 잠깐 살펴보았을 때, 그는 그 어느 때보다 놀랐다. 지금까지 그가 사용하던 마법과는 체계부터가 완전히 다른, 새로운 마법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자리에서 그는 확신했다. 이것이야말로 8서클의 벽을 뛰어넘기 위한 실마리라고. 그러나 그의 능력으로도 눈에 보이는 실마리를 붙잡는 것이 어려웠다. 단순히 실력이 부족한 것이 아니었다.
관점, 수준, 차원.
지금까지 그가 배워왔고 개척해낸 모든 것들이 쓸모없게 느껴졌다. 2차원의 존재가 3차원 존재를 알 수 없는 것처럼 그 또한 밑이 보이지 않는 늪에 빠져 허우적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일 년 육 개월이라는 시간을 헛되게 보내고 8서클에 오르기 위한 수단으로서 해당 마법을 연구하는 것인지, 해당 마법을 파헤치고야 말겠다는 오기인 것인지 경계가 희미해졌을 때쯤 테라 방벽에 나가있는 에반으로부터 한 장의 편지가 도착했다.
그리고 편지의 내용을 전부 읽었을 때, 그는 그 자리에서 답장을 작성해 전령에게 주었고 곧바로 황궁으로 향했다. 실마리를 붙잡기 위한 실마리가 손아귀에 들어올 절호의 기회였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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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서클이라는 경지는 마법사들에게 있어 매우 중요한 경지다. 본격적으로 살상력을 가지는 마법을 배울 수 있는 경지이기도 했으며 어딜 가더라도 다른 이들에게 당당하게 마법사라고 소개할 수 있는 단계이기도 했다.
1서클도, 2서클도 아닌 3서클에 오른 이들부터 온전한 한 명의 마법사로서 대접받는 이유는 간단했다. 마법사로서 첫 벽을 마주하는 시기가 3서클이었으니까.
그 벽을 뛰어넘을 수 있다면 계속해서 마법사로서 성장할 수 있을 것이고 뛰어넘지 못한다면 영원히 뛰어넘지 못한다. 말 그대로 마법사가 될 수 있는 재능의 차이가 보이는 시점이 바로 이 때였다. 그렇기에 그 벽을 뛰어넘어 3서클에 오른 이들은 자신이 뛰어넘은 벽이 무척이나 두껍고 높았다고 생각하곤 했다.
그러나 세 개의 서클을 다루는 것에 익숙해지고 네 번째 서클을 마주하게 되었을 때, 그들은 다시 한 번 깨닫는다. 그들이 오래 전 마주했던 벽은 지금 마주한 벽에 비하면 성벽 앞의 동네 담장이었을 뿐이라고. 그 때 느꼈던 고난과 성취감은 자신이 어렸기 때문이라는 것을.
나라고 하여 그 벽이 나타나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 벽은 분명 내가 처음 마주했던 벽을 벽돌 수준에 불과하게 만들었고 두 번째로 마주한 벽조차 나무 울타리 수준처럼 느껴질 정도로 두텁고 높았다. 그런데 그 벽이 예전보다 더 낮게 느껴진다면 그것은 벽이 두껍고 높아진 것보다 내가 한층 더 성장했기 때문이리라.
개미에겐 작은 담장조차 까마득하게 높아 보이지만 사람이라면 조금만 노력하면 넘을 수 있는 것이 담장이었으니까.
“열아홉에 4서클, 스물하나에 5서클이라······. 천재도 이런 천재가 없군. 사실이 알려지면 세기의 천재의 탄생이라고 떠들어대겠어.”
천재의 탄생이라는 결과를 위해 어떠한 희생이 있었는지는 신경 쓰지 않은 채,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했다. 사람들은 지겹고 어두운 과정보다는 찬란하고 화려한 결과에 집중하기 마련이니. 그러나 적어도 나만큼은 잊어서는 안 되었다. 지금의 성장이 오직 나만의 힘으로 이루어낸 것이 아니라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도움이 뒤따른 결과라는 것을.
똑똑-
“예.”
“후작 각하께서 자네를 데려오라 하셨네. 급한 일이 없다면 지금 바로 따라오게나.”
“알겠습니다.”
얼마 전, 에반을 통해 보낸 연락의 답장이 이제야 도착한 모양이었다.
“부르셨습니까.”
“이 곳을 떠나고 싶다고?”
“······예.”
언제나와 같이 서론 없이 본론부터 시작하는 지크 후작과의 대화. 나 또한 그의 질문에 변명하지 않고 답했다.
테라 방벽의 철칙 중 하나인 십 년 동안의 복무를 외적인 방법으로 건너뛰려고 한 것이니까. 불과 이 년 전 만 하더라도 비슷한 상황에서 악성 대물림의 연쇄를 끊기 위해 방패가 되어 달라 말했었던 만큼 지금의 내 선택이 그로서는 무척이나 괘씸하게 느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복수에 몰입된 머리를 식힐 시간이 지났음에도 내 선택에 후회는 없었다.
“이 곳에는 제가 남아서 할 일이 없습니다.”
휴식을 취하는 동안 꽤 고민을 해봤다. 어떤 길이 가장 옳은 길인지. 복수라는 목표를 세워둔 상황에서 어떠한 길을 걸을지에 대한 고민이 될 수밖에 없었고, 방향 또한 두 가지 외에는 없었다.
이 곳에 남아 실전에서 경험치를 쌓고 차근차근 올라갈 것인가, 수도에서 탑주의 제안을 받아들여 수련에 힘쓸 것인가. 각기 장단점이 있었기에 고민이 깊어졌지만 결국 내 선택은 후자였다.
오만하고 어리석은 발언일지도 모르겠지만 내 수준에서 쌓을 수 있는 경험은 이미 충분할 만큼 쌓았다고 자부했다. 지금 나에겐 필요한 건 그 동안 쌓아놓은 경험치를 폭발시킬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에게 삼 년 간의 경험이 없었다면 제 아무리 드래곤의 피를 뒤집어썼다고 하더라도 겨울이 지나가기 전, 5서클의 벽을 허무는 건 어려운 일이었을 테니까.
그런 면에서 테라 방벽에 남아있는 것은 득보단 실이 많았다. 물을 더 부울 수는 있겠으나 이미 내 그릇은 물로 가득해 금방이라도 넘칠 듯 했으니, 그렇다고 집중하여 수련에만 시간을 쏟기에는 테라 방벽의 환경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나에겐 그릇을 넓힐 수 있는 시간이, 그리고 더 큰 그릇으로 변화할 방법을 알려줄 스승의 존재가 필요했다.
“이 곳에 남는다면 저는 흔하디흔한 4서클의 마법사로서 남을 뿐입니다. 굳이 제가 아니더라도, 테라 방벽의 마법사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을 하게 될 테고 제가 목표로 삼은 복수와는 멀어지게 될 겁니다. 그러나 지금 저에게 시간을 주신다면 다시 돌아왔을 때, 저는 지금껏 다른 이들이 하지 못한 일을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내가 5서클의 벽을 무너트렸다는 건 아직까지는 나만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테라 방벽에 남을 생각도 아닌데 굳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었으니까. 조용히 마탑주에게만 알릴 생각이었다.
5서클.
확실히 낮은 경지는 아니었다. 테라 방벽에서도 각 조장을 맡은 마법사들만이 오른 경지였고 대부분의 마법사들에게는 평생을 달려도 도착할 수 있다고 확신할 수 없는 경지였으니. 그러나 나에게 있어 5서클은 통과 거점일 뿐, 결코 도착지가 아니었으니 이대로 만족한 채 안주할 수는 없었다.
“오만하구나. 이 곳에 네가 남고 싶으면 남고, 가고 싶으면 갈 수 있는 곳인 줄 아느냐.”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저는 아직 어리지만 이 곳에서 보낸 세월이 벌써 2년이 넘었습니다. 이 곳이 어떤 곳인지 모르겠습니까.”
“너는 내게 말했을 것이다. 이 곳의 악몽과도 같은 연쇄를 끊어보겠다고. 자신이 뱉은 말 하나 지키지 못하는 녀석이 복수를 입에 담는 것이냐?”
“급할수록 돌아가라는 말이 있습니다. 지금의 선택이 당장은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더라도 결과적으로 더 빠른 길이 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또한 드래곤이 살아있는 이상 테라 방벽은 결코 평안해지지 않을 것이니,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이루는 길이 될 것입니다.”
안다. 지금의 내 모습이 어떻게 보일지. 복수에 눈이 돌아가 있는 떼, 없는 떼 다 부려가는 것으로 보이겠지. 그러나 그렇게 보여도 괜찮다. 백 명 중 백 명에게 그렇게 보이더라도 내가 목표와 목표로 향하는 길을 잊지 않는다면 반드시 목표에 다다를 수 있을 테니.
“반드시 다시 돌아와 제 말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겠습니다. 저를 보내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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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하한다.”
“참 내, 이렇게 갈 거면 정들기 전에 갈 것이지.”
“수도에 가게 되면 편지 좀 고향으로 보내 줘. 부탁한다.”
내가 수도로 올라가는 것이 알려지자 나와 친한 몇몇의 사람들이 작은 파티를 열어주었다. 그 숫자가 많지는 않았다.
조사대 중 나만 살아 돌아온 것에 대한 불미스러운 소문이 돌기도 했었고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통해 테라 방벽을 빠져나가는 모습에서 우리들이 불만을 가지던 뒷배 있는 놈들과 겹쳐 보였을 테니까. 그래도 누군가는 나를 끝까지 믿어주고 앞길을 축복해준다는 점에서 이 곳에서 얻은 것이 또 하나 있다는 점에 감사했다.
“다녀올게요. 그러니까 그 때까지 꼭 살아 계세요. 다시 봬야 하니까.”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4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