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3화 - >
작년 겨울, 열아홉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는 4서클에 올랐다. 3서클에서 4서클로의 성장. 그것은 단순히 조금 더 강한 마법을 쓰고 조금 더 빠르게 마법을 구현하는 것만이 아니었다.
두 개이던 눈이 세 개가 된 것처럼, 두 개이던 팔이 세 개가 된 것처럼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물론 그것을 적절히 활용하기 위해서는 새롭게 생긴 눈과 팔에 적응해야 할 필요가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서 나는 근 이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4서클에 적응 중이었다. 완숙에 이르지 못했다는 말이었으며 5서클은 내게 언감생심이나 다름없었다. 새롭게 생긴 팔에 적응하는 중이었는데 새로운 팔을 돋아나게 한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었고 설령 가능하다 하더라도 당장은 한 걸음 앞서 나가더라도 결국엔 두 걸음 물러서는 꼴이 될 테니까.
“인생사 새옹지마라더니······. 불행 중 다행이지만 불행이 없는 편이 나았을 텐데.”
원인이 드래곤의 피였는지, 죽음의 위기를 겪으며 내 몸이 죽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위해 성장을 한 것인지는 모른다.
내 감은 드래곤의 피를 뒤집어썼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확실한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원인이 드래곤의 피에 의한 진화라고 하더라도 그 대가가 스승의, 선배의, 동기의 죽음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큰 손해를 보는 장사였다.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협상 테이블을 보자마자 뒤엎어버릴 정도로.
‘이대로 며칠만 더 지나면 네 개의 서클을 완벽히 다룰 수 있겠어.’
물론 근 이 년에 가까운 시간을 온전히 수련에만 쏟을 수 있었던 것은 아닌 만큼 나쁘지 않은 성장 속도라 볼 수 있었지만 테라 방벽으로 돌아온 뒤의 나는 천재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은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남들에게는 몇 개월의 시간이 필요한 일을 며칠 만에 완성시킬 수 있다고 자신할 수 있었으니까.
‘앞으로 십 년, 십 년 안에 녀석의 목을 물어뜯고야 말겠다!’
#
어느 정도 몸이 회복된 나는 집중회복실을 벗어나 내 방에서 요양을 취할 수 있게 되었다. 집중치료실을 벗어나자마자 내가 향한 곳은 일드의 방. 아직 죽음이 확정된 것은 아니기에 그의 방은 누구의 손도 타지 않고 원래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었고, 나와 일드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누구도 내가 일드의 방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뭐라 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대로네.”
일드의 방에 찾아오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다. 그리고 내 기억 속의 광경과 지금의 광경 또한 차이 없이 똑같았다. 책으로 가득 찬 책장, 방주인이 먼 길을 떠났기에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책상과 마찬가지로 정돈되어 있는 침대까지. 관리가 되지 않아 먼지가 조금 쌓여있었으나 잠시 손을 놀리자 금방까지 사람이 머물렀던 것처럼 깔끔해져있었다.
“며칠 내로 이 방도 정리 되겠지.”
방이 정리되는 경우는 두 가지 뿐이다. 죽었거나 십 년 간 살아남아 테라 방벽을 떠나거나. 적어도 내가 테라 방벽에 온 뒤로 후자의 경우로 방이 정리된 이는 없었다.
내년이면 10년차가 되는 일드가 죽었으니 후자의 경우를 보려면 최소한 몇 년은 더 필요하리라. 지금 이 방이 정리되지 않은 이유도 죽음이 확인되지 않았기 때문에, 아마 구조대가 돌아온 뒤에는 가차 없이 정리될 터였다. 테라 방벽은 그런 곳이었으니까.
원래대로라면 방주인의 유품은 가족들에게, 남은 물건은 이 방을 이어받을 누군가가 정리해서 내놓거나 자신이 가지겠지만 일드에게는 일가친척이 없었으니 유일한 제자이다시피 한 내가 먼저 방을 정리하기로 했다. 그러던 중 나는 책상 위에서 일드가 써내려가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책 한 권을 발견했다.
“이건······.”
책의 표지를 넘기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는 문장이 있었다.
[네 성장에 내 경험이 도움이 되기를 바란다.]
나는 순식간에 책의 절반 정도 작성되어 있는 내용을 읽어 내려갔다. 동시에 나는 눈으로부터 떨어지는 눈물이 책에 떨어지지 않도록, 그로 인해 잉크가 번지지 않도록 노력해야만 했다.
책의 내용은 4,5 서클 마법에 대한 그의 견해와 설명, 경험과 노하우가 빠짐없이 적혀있었으니까. 아직 완성되지 않아 5서클은 중간에 끊겨있었지만 지금까지 적혀있는 내용만 하더라도 이 이하의 경지의 마법사들에게는 돈을 주고도 살 수 없는 내용들이었다. 일반적인 마법사들이라면 가족에게도 알려주지 않을 만큼.
나는 한동안 책을 가슴에 껴안고 가만히 있었다. 눈의 눈물이 그칠 때까지. 눈물이 책을 더럽히지 않도록.
#
지크 후작은 오랜만에 혼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 돌아온 구조대가 가져온 소식은 그를 씁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물론 술을 얼마나 마시던 경지에 오른 그의 몸은 한순간에 취기를 몰아낼 수 있었지만 오늘만큼은 그러지 않았다.
‘한 쪽 팔을 잃어버린 기분이군.’
조사대의 구성은 대단했다. 여섯 명 밖에 없는 단장이 두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고 나머지 여섯도 테라 방벽에서 구를 대로 구른 베테랑들이었다. 마법사 쪽은 더 극심해서 조장이 두 명이나 포함되어 있었으나 문제는 그들 모두가 몬스터의 대지의 한줌 흙으로 변했다는 것.
제 아무리 뛰어난 기사라도 언제 죽어나갈지 모르는 곳이 테라 방벽이라지만 한순간에 이렇게 많은 숫자의 베테랑들이 죽은 것은 유래가 없던 일이었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끈질기게 살아남았기에 베테랑이라는 말을 들을 수 있었던 것이니까.
더불어 술을 찾게 된 이유는 그것 뿐만은 아니었다. 지크 후작의 머리에서는 오랜만에 외적인 이유로 고심에 빠져있었으니.
‘이 사실을 보고해야 하는가.’
한 번은 우연일 수 있어도 두 번부터는 아니다. 드래곤에 대한 목격담도 벌써 두 번째. 게다가 그 중 한 명은 지크 후작 본인으로서도 꽤나 신뢰하고 있는 이였으니 이 이상의 진위여부는 가리지 않아도 충분했다. 문제는 그의 선에서 끝날 문제가 아니었으니 보고를 하는 것이 옳았지만 그로 인한 결과가 너무 눈에 선히 보였던 탓이었다.
“어렵군.”
사실대로 보고를 올린다면 황제는 모든 수단을 총동원하여 드래곤을 잡아오라 명령할 것이다. 그 과정에서 어떤 손해가 뒤따르더라도 개의치 않겠지. 복구할 수 없는 수준의 피해 - 마스터의 죽음 등 - 가 아닌 이상 드래곤을 잡아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더 탐날 수밖에 없었으니.
단순히 드래곤의 가죽, 뼈, 심장, 피 등 물질적인 이득뿐만 아니라 드래곤이라는 전설을 깨부순 또 하나의 전설로서 얻을 수 있는 명성과 경외감, 제국 전체의 사기 진작까지. 눈에 보이는 이득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이득이 더 얻기 힘든 만큼 기회가 왔다면 잡는 것이 옳았다.
문제는 그 과정에서 수많은 이들이 죽게 될 거라는 점이었다. 가장 깔끔한 방법은 제국에서 뽑아낼 수 있는 최정예를 투입하여 드래곤을 잡는 것이지만 그런 불확실한 방법을 허락할 리가 없었다. 어떻게든 일반 병사들로 드래곤의 힘을 빼놓고 그를 포함한 마스터들이 확실하게 숨통을 끊기를 원하겠지.
“으음.”
평소라면 이런 고민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스스로를 한 자루의 검이라 생각하고 있었고 그저 주인의 의지에 따라 적을 베면 될 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러나 요즘은 정말로 그것으로 충분한가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본인이야 그렇게 생각하고 행동하기로 마음 속 깊이 다짐했으니까.
그러나 그의 결정으로 인해 휘말릴 다른 이들의 고통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당장 그의 가족들만 하더라도 그의 일방적인 결정에 의해 오랜 세월 큰 고통을 받지 않았던가.
지크 후작의 고민이 깊어졌다.
#
“괜찮아?”
“고생 많았어. 다른 분들도 곧 돌아올 거야. 쉽게 죽으실 분들이 아니니까.”
나에게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건넸다. 조사대가 드래곤에 의해 나를 제외하면 사실상 전멸했다는 사실은 나와 지크 후작간의 비밀이었기에 그들이게는 사전에 말했던 대로 몬스터의 급작스러운 습격으로 인해 뿔뿔이 흩어졌다고 밖에는 말해줄 수 없었다. 그렇기에 남들의 위로가 나에게는 가슴을 쿡쿡 찔러오는 날카로운 비수와도 같이 느껴졌다.
“예. 돌아오시겠죠. 저도 돌아왔는걸요.”
“어쩌면 너를 찾느라 늦게 오시는 거일 수도 있고, 조금 더 기다려보자고.”
내가 테라 방벽 바깥에 나가있는 사이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가장 큰 변화는 누가 뭐라고 해도 테라 방벽 후방으로부터 건설되고 있는 거대한 크기의 땅굴. 무슨 수를 썼기에 지크 후작의 허가가 떨어졌는지는 모르지만 이미 꽤나 진행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조사대가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시작한 것 같았다.
“몸은 좀 괜찮나?”
“에반 씨.”
“조의를 표하네. 그리 가시다니 안타까운 일이야.”
“아직은, 아직은 아닙니다.”
“······그렇지. 아직은 아니로군. 미안하네. 말실수를 했어.”
머리로는 인정했다. 나를 제외한 모든 이들이 죽었으리라는 것을. 그러나 수 주가 지난 지금까지도 마음속으로는 인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내가 몬스터의 대지에서 가졌던 희망처럼 시체를 본 것은 아니었으니까.
혹시나, 아주 혹시나 살아있는 것이 아닐까, 모종의 이유로 아직까지 귀환하지 못한 것은 아닐까하는 마음이 남아있었다. 에반도 이 곳에 머물며 많은 것을 함께 했기에 내가 어떤 심정인지 대충은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언제부터 시작하신 겁니까?”
“오래 되지는 않았네. 여름부터 시작했으니 반년이 아직 안 되었군. 그래도 아직 갈 길이 머네. 광산에 도착하는 것까지는 빠르게 판다고 하더라도 그 다음부터는 이런 식으로 했다가는 지하에 존재하는 마정석이 전부 부서질 테니, 그래서 자네 도움이 필요하네. 사전에 정해두기는 했지만 거점을 만들 장소를 다시 한 번 확인해야 하거든.”
광산 개발은 큰 무리 없이 진행 중인 듯싶었다. 하긴 방해될 것이 거의 없긴 했다. 지하를 돌아다니는 몬스터가 없는 이상 장애물이라고 해봤자 수맥 정도밖에 더 있겠는가. 다행인 점이라면 몬스터의 대지는 꽤나 메마른 곳이었고 설사 있다고 하더라도 마법사들이 출동한다면 충분히 해결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무슨 일인가? 단지 진행상황이 궁금해서 그 몸을 이끌고 오지는 않았을 테고.”
“아,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탑주님께 연락을 넣어주실 수 있으십니까?”
“탑주님께?”
“예. 수도에서 저에게 말씀하셨던 제안이 아직까지도 유효하냐고 여쭤 주십시오. 탑주님이라면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고 계실 겁니다.”
강해지고 싶다. 강해져야만 했다. 아이러니하게도 복수할 대상으로부터 강해질 수 있는 발판을 얻었지만 단지 발판으로는 부족했다.
발판만으로도 충분히 강해질 수는 있겠지만 거기에 뛰어난 가르침이 동반된다면 한층 더 빠르게 강해질 수 있을 테니까.
마침 나에게는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마법사와 안면이 있었고 그에게 제자가 되지 않겠냐는 제의도 받았다. 그 대가로 나만의 비밀을 알려줘야겠지만 더 빠른 시간에, 더 강한 힘을 손에 넣을 수 있다면 손해 보는 제안은 아니리라.
“분명 답장을 주실 겁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3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