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2화 - >
마법사는 각자 개인만의 고유마법 한 가지씩은 가지고 있는 법이었다. 경력이 오래된 마법사라면 몇 가지씩 가지고 있는 경우도 있었고. 꼭 본인이 의도해서 만든 마법이라기보다는 연구를 진행하다보니 얼떨결에 만들어지는 경우가 더 많다는 것은 아이러니한 일이었지만. 당연한 말이지만 경력만 수십 년에 이르는 일드에게 자신만의 고유마법이 없을 리는 없었다.
“이걸 쓸 순간이 오게 될 줄이야.”
레닐을 잠재운 마법은 단순한 제압 마법이었다. 효율이 이보다 나쁠 수가 없는. 그러나 효율이 나쁠 뿐, 효과까지 나쁘지는 않았다.
상대의 신체에서부터 마력까지, 자신의 마력이 잔존하는 한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만든 뒤 가사 상태에 빠트렸으니까.
물론 과정이 쉽지 않아서 자신보다 강한 이에게는 어림도 없었고 약한 이조차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굉장히 지친 상태와 마음속으로도 풀어져 있는 상태여야 했기에 또한 테라 방벽의 사정상 포로가 없다보니 사용할 기회가 없어 기억만 하고 있는 마법이었지만 말이다.
“이거라면 저 녀석도 이 녀석을 찾지 못하겠지. 아니 못하기를 바랄 수밖에.”
어떻게 녀석이 여기까지 쫓아왔는지는 알 수 없었다. 냄새로 쫓아왔든 마력을 느끼고 쫓아왔든 무슨 수를 썼겠지. 그렇기에 얼마 남지 않은 마력으로 레닐의 몸을 씻기고 마력을 봉인한 뒤, 디그로 땅을 파 깊숙이 묻었다. 공간을 제법 남겨놓았으니 모든 상황이 끝날 때까지 가사 상태로 살아남기에는 무리가 없으리라.
“꼭 살아남아라.”
일드에게 있어 레닐은 무척이나 소중한 존재였다. 가족과 제자 한 명도 없었던 그에게 처음으로 맞이한 수제자나 다름없는 존재였으며 거의 아들 뻘로 아끼고 있었다.
레닐에게 있어서도 테라 방벽 내의 그 누구보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고. 또한 성장이 멈추고 살만큼 산 그와 다르게 앞으로도 걸어 나갈 길이 많이 남은 유망주인 만큼 일드는 레닐만큼은 살려 보내고자 했다.
조금 더 많은 것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많은 것을 알려줄 수 있었다. 그러나 아무래도 그와 레닐의 인연은 여기까지인 모양이었다.
예기치 못한 고통에 이성을 잃고 주변을 휩쓸던 녀석이 그와 레닐이 있는 곳을 향해 날아오를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까.
고통의 원인부터 죽여 버리고 말겠다는 의지의 표현. 일드는 녀석의 시선을 끌며 최대한 레닐로부터 멀어지기 시작했다. 혹시라도 땅을 휩쓸다 레닐을 발견하는 불상사가 발생하지 않도록. 그런 경우가 없도록 깊숙이 땅을 팠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었으니.
“여기다! 도마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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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을 떴을 때, 주변은 빛 한 점 없는 어둠에 잠식되어 있었다. 여긴 어딘가 눈을 끔뻑거리며 상황을 파악하고 있을 때, 기절하기 전의 상황이 떠올랐다.
[한 숨 자고 일어나라. 일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 있을 테니.]
마법으로 빛을 밝히니 주변을 감싸고 있는 흙이 보였다. 다행이 기절해있는 동안 마력이 회복이 되었는지 마법을 사용하는 데 있어 무리가 없었고 서둘러 지하를 탈출하니 푸른 하늘이 나를 반겨주었다.
“드래곤은······사라진 것 같은데.”
얼굴만 빠끔히 내밀어 바깥을 확인했지만 드래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더불어 사람의 모습도 찾아볼 수 없었고. 그 때의 상황 상 현장으로부터 멀리 떨어지지는 않았을 텐데, 주변에 채 사라지지 않은 전투의 흔적이 그것을 증명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일행의 흔적은 남아있지 않았다.
“······테라 방벽으로 가자. 만약 누군가 살아있다면 테라 방벽으로 향했을 테니까.”
우노스는 마지막에 외쳤다. 어떻게든 살아남아서 테라 방벽으로 향하라고. 향해서 오늘 있었던 일에 대해 보고하라고. 만약 나처럼 운 좋게 살아남은 이가 있다면 분명 테라 방벽으로 향했을 터, 만약 다른 이들이 모두 죽었다고 한다면 나는 반드시 테라 방벽에 도착해야만 했다. 그것이 최후의 생존자로서 해야 할 일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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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에 의지해 계속해서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남쪽으로 향해 산맥을 오른쪽에 두고 동쪽으로 나아갈 생각이었다.
몬스터의 대지 한복판을 가로지르는 것보다 훨씬 안전하게 테라 방벽으로 향할 수 있는 경로였으니까. 물론 그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조사를 위해 준비했던 마탄은 전부 사용했고 내게 남아있는 것은 소형 몬스터 전용의 철탄들뿐이었으니, 아무리 지도가 적의 위치를 알려준다지만 상시 켜놓을 수는 없는 노릇.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할 경우도 있었으나 지금의 내 능력으로는 녀석들을 죽이기에는 어림 반 푼어치도 없었다. 그 과정에서 얻은 것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테라 방벽으로 향하는 것이 최우선과제이니만큼 해당 건에 대한 고찰은 조금 더 뒤로 미뤄두기로 했다.
“산맥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날씨가 추워지고 있었다. 아직까지 눈은 내리고 있지 않지만 이 추세대로라면 겨울이 찾아오는 것도 금방일 터, 겨울이 되면 정말 곤란해진다.
먹을 것은 몬스터의 고기뿐이었고 마실 물 또한 마법으로 대체한 지 오래였다. 게다가 드래곤과의 전투에서 짐을 모조리 잃어버린 탓에 추위에 대비한 장비도 없었다.
마력이 존재하는 한 체온을 유지할 수는 있겠으나 마력도 무한한 것이 아니었고 방한용품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필요한 마력도 차원이 달라지는 만큼 빠르게 테라 방벽에 도착하지 못한다면 큰 위기를 맞게 될 것이 분명했다.
다행히 첫 눈이 내리기 시작하던 날, 나는 간신히 테라 방벽의 거대한 방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클린 마법에 사용하는 마력도 아까워 거지꼴도 이런 상거지 꼴이 없었지만 몬스터라고 오해를 받을 정도는 아니었고 무사히 테라 방벽 내부로 들어온 나를 이 곳을 떠나기 전, 마주했었던 얼굴들이 나를 반겨주었다.
“다른 사람들은, 조사대의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눈이 그칠 때 출발하여 첫 눈이 내릴 때 돌아왔다. 장장 반년에 걸친 여정이었고 만약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나보다는 일찍 테라 방벽에 도착했으리라. 그러나 그 누구도 선뜻 내 질문에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애써 무시하던 불길한 예감이 슬그머니 올라오기 시작했다.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조사대원들 중 지금껏 돌아온 사람은 네가 유일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사실 어느 정도는 예상하고 있었다. 나 외에 살아남은 사람이 없을 수도 있다는 것쯤은. 내 일격으로 인해 드래곤은 상당히 분노한 상황이었고 원흉인 내가 살아있는 것으로 보아 그 분노를 누구에게 풀었을지 뻔한 것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실낱같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던 것은 시체가 보이지 않았으니까. 녀석의 뱃속으로 향했을 확률이 높지만 어쨌든 두 눈으로 다른 이들이 죽은 것을 확인하지 않았으니까.
일드는 이렇게 말했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모든 것이 끝나있을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끝은커녕 새로운 시작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에게는 끝일지 몰라도 나에게 있어 끝은 두 가지 경우 밖에 없었다. 녀석에게 복수를 성공하거나 복수 중에 내가 죽거나. 이제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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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이냐.”
꼬박 삼일 간 기절해 있다가 깨어났다. 그 동안의 피로, 상처, 굶주림 등을 마력의 힘으로 억지로 누르고 있던 상황에서 안전한 장소에 도착했다는 안도감, 애써 무시하던 현실을 더 이상 부정할 수 없게 된 충격까지.
그 충격은 지칠 대로 지쳐있던 내 몸이 버틸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아니었다. 결국 절대안정이라는 당부를 받고 나는 패잔병임에도 불구하고 지크 후작이 직접 병문안을 오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다.
“······로랑의 말이 사실이었습니다. 저희는 근 세 달간의 여정 끝에 서북쪽의 한 산에서 드래곤을 찾아낼 수 있었습니다.”
내 말에 지크 후작이 놀랍다는 표정을 지었다. 경지가 경지이니만큼 찻잔에 작은 물결 하나가 생긴 정도였지만 그것만으로도 대단한 일이긴 했다. 아마 지크 후작도 진심으로 로랑의 말이 사실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혹은 로랑의 말이 사실이라 하더라도 우리가 정말 찾아낼지는 몰랐었거나.
나는 담담히 그 때 있었던 일들에 대해 설명했다. 드래곤으로 추정되는 마력 반응 - 로랑이 발견했을 때보다 얕았던 것은 잠을 자고 있기 때문인 듯싶었다. - 을 발견했고 거대한 동굴 속에서 잠을 자고 있는 드래곤을 발견했으며 최대한 조심히 퇴각을 했지만 드래곤이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우리를 습격해왔다고. 그 과정에서 절반이 죽었고 내가 왼쪽 눈을 저격한 사이 모두 뿔뿔이 흩어져 테라 방벽으로 향하기로 했지만 살아남은 건 나뿐인 것 같다는 말까지.
“저는 한동안 땅속에 가사상태로 묻혀있었습니다. 그 덕분에 살아날 수 있었지만 귀환 또한 늦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렇기에 혹시나 살아남은 사람이 있다면 저보다는 먼저 도착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스승이나 다름없는 사람을 잃었고, 동기를 떠나보냈으며 생명의 은인에게 은혜를 갚지 못했다. 그것만으로도 나는 죄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앞으로 무거운 죗값을 갚아 나가야만 했고. 낙담한 나와 무언가 곰곰이 생각에 빠진 지크 후작. 방 안에는 잠시 동안 침묵만이 흘렀다.
“우선 이 일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누군가 물어본다면 몬스터의 습격이 있었고 뿔뿔이 흩어져 테라 방벽에서 만나자고 했다고 대답해라.”
“······예. 알겠습니다.”
“다음 명령이 있을 때까지 몸을 치료하며 대기할 수 있도록. 네가 잠들어 있는 동안 구조대를 보냈지만······. 겨울이 오는 만큼 성과를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도 희망을 버리지는 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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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 날부터 나는 심한 두통과 악몽에 시달렸다. 죽은 이들이 왜 너는 죽지 않았냐며, 왜 복수를 해주지 않냐며 나를 둘러싼 채 압박하는 악몽. 결코 이런 짓을 할 사람들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악몽은 멈추지 않았다. 심지어 각인을 새겨 넣었음에도.
이제야 왜 과거 내가 테라 방벽에 도착했을 때, 일기장의 주인이 죽은 동료에게 내 잘못이 아니라며 더 이상 나타나지 말라고 글을 작성했는지, 로랑이 드래곤을 마주한 뒤 눈을 시뻘겋게 뜨며 복수를 중얼거렸는지 알 것만 같았다.
“복수, 해야겠지.”
그러나 나와 드래곤 사이에는 너무나 먼 격차가 있었다. 지금부터 전력으로 달려도 내가 죽기 전에라도 따라잡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마법을 사용하지 않은 것인지, 못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단순히 육체만으로도 그러한데 마법까지 사용한다면 도저히 손이 닿을 것 같지가 않았다.
다행이 희망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이제 와서야 다시 한 번 생각나는 일이지만 가사 상태에서 빠져나왔을 때는 느끼지 못했지만 내 몸에는 확실히 변화가 있었다. 몬스터의 대지를 질주하며 몇 번이고 더 느꼈고. 그 당시에는 시간이 없었기에, 사정이 없었기에 깊이 파고들지 못하고 넘길 수밖에 없었지만 이제야 그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피 덕분인가?”
한 번에 다룰 수 있는 마력의 양도, 마력의 총 보유량과 컨트롤에 이르기까지 드래곤을 만나기 전까지의 나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발전했다. 마력에 관련된 재능 자체가 올라간 것처럼. 예상되는 이유는 하나 밖에 없었다. 드래곤의 피. 마법의 종주라고 불리며 드래곤 하트라고 불리는 마력의 원천이 있는 만큼 피에도 뛰어난 효용이 있다고 본다면······.
“전화위복. 새옹지마. 불행 중 다행인가.”
그 녀석은 주변의 땅을 모조리 뒤엎는 한이 있더라도 나를 죽였어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 나를 살려 보낸 대가를 반드시 치르게 만들 테니까. 반드시.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42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