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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38화 (38/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8화 - >

“만일의 경우라도 그냥 넘겨서는 안 되는 곳이 이 곳, 테라 방벽이다. 또 그러기 위한 가을 원정이 아니었나. 정확한 사실을 파악하기 위해서라도 조사대를 보내는 건 당연한 수순이라고 할 수 있겠지. 이의 있나?”

이의가 없을 리가 있나. 만일의 이야기도 정도껏이야 감안을 하지, 그런 옛날이야기 속에서나 나올 법한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조사대를, 그것도 한겨울에 파견한다는데 이의가 없다면 그건 그것대로 회의 참석자들의 정신 상태를 의심해봐야 했다.

“지금 바로······말씀이십니까?”

“지금 바로 가야지. 그래야 최소한 흔적이라도 발견할 것 아닌가.”

“무리입니다! 바깥을 보십시오. 이미 겨울이 찾아왔습니다. 이 곳의 겨울이 얼마나 혹독한지 각하께서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테라 방벽조차 그럴 진데 몬스터의 대지 안으로 조사대를 파견하는 것은 그들보고 죽으라는 말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겨울은 혹독한 계절이다. 그러나 테라 방벽의 겨울은 대륙의 그 어떤 곳과 비교해도 우위를 내주지 않을 정도로 한층 더 혹독한 계절이었다. 수시로 눈보라가 휘몰아쳤으며 영하 삼십 도쯤은 우습게 돌파했으니까. 초입이라 할 수 있는 테라 방벽이 이러한데 더 북쪽은 입이 아플 정도. 아무리 기사와 마법사들이라 하더라도 무시할만한 환경이 아니었다.

“물론 추위도 문제지만 눈으로 인해 시야 또한 극도로 좁아집니다. 눈보라에 휩쓸리기라도 한다면 동료들과 떨어져 길을 잃을 가능성도 높습니다. 더군다나 몬스터들 또한 먹잇감을 찾기 어려워 한층 더 흉포한 상황에서 조사대를 파견한다는 건 그들을 버리겠다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동료를 버린다는 과격한 표현을 써가며 제 1 기사단장인 우노스가 강하게 이의를 제기했다. 솔직히 조사대를 파견하자고 한 것이 지크 후작이었으니 그나마 이 정도로 순화해서 말하는 것이지 조사대를 다 죽일 생각이냐며 쌍욕이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다른 이들도 대놓고 말만 하지 않았다 뿐이지 우노스의 의견에 동조한다는 것을 눈빛으로 표현하며 지크 후작을 바라보고 있었다.

“조사대를 보내더라도 최소한 겨울이 지난 다음이어야 합니다. 어차피 그 사건이 있은 후부터 며칠이 흘렀는지 알 수 없습니다. 게다가 다시 그 장소로 향하기 위해서도 며칠이 소모될지 모릅니다. 그 사이 눈 폭풍이 몰아쳐도 몇 번은 몰아칠 것입니다.”

“그 때가 되면 늦어.”

“지금 조사대를 보낸다고 하더라도 이미 늦었습니다.”

지크 후작이 한 번 받아쳤음에도 우노스 또한 이번만큼은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그만큼 조사대가 맞닥뜨려야 하는 고난들이 너무 위험했고 파견의 이유가 황당하기 때문이리라.

“너는 어떻게 생각하느냐?”

“굳이 따지자면 저도 반대하는 입장입니다.”

두 명의 대립을 지켜보며 일드의 질문에 곰곰이 생각을 정리한 후 조용히 대답했다. 로랑의 말을 믿지 못해서라기보다는 그만큼 몬스터의 대지에서 맞이하는 겨울이 혹독함을 알기 때문이었다.

기사와 마법사들은 범인으로서는 쉬이 할 수 없는 일을 해낼 수 있다. 기사는 육체적인 능력을 바탕으로, 마법사는 마법이라는 이능을 바탕으로. 그러나 그 능력은 마력이라는 대가를 필요로 했다.

마력이라는 원료가 없다면 기사는 범인보다 신체적인 능력이 조금 더 뛰어난, 검 좀 휘두르는 사람일 뿐이며 마법사는 더 심해서 쓸데없는 지식을 나불거리는 범인과 다를 바 없었다.

문제는 겨울에는 마력의 소모가 평소보다 심해질 수밖에 없다는 점에 있었다. 영하 삼십 도, 사십 도에 육박하는 기온에서 장기간 움직이기 위해서는 마력의 도움이 필수적이었으니까. 제 아무리 지도가 유용하다하더라도 최악의 경우 조사대가 로랑 일행처럼 되지 말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시기가 너무 안 좋습니다. 드래곤이 실존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지만 기껏 보낸 조사대가 되돌아오지 못한다면 그보다 최악의 경우는 없지 않겠습니까.”

최악보다는 차악을, 차악보다는 차선을, 차선보다는 최선을. 아무리 생각해도 아무런 대책 없이 조사대를 파견하는 것은 차악의 선택일 뿐이었다. 최악은 로랑이 거짓말을 했다고 믿으며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고.

“각하! 한 번 더 재고해주십시오!”

“제가 한 말씀 올려도 되겠습니까?”

평행선을 달리며 각자의 주장을 꺾지 않는 지크 후작과 우노스. 물론 지크 후작이 강제로 밀어붙인다면 조사대를 파견할 수 있겠지만 그 위험성을 알기 때문일까. 지크 후작도 억지로 밀어붙이지는 않았다. 그렇기에 결론을 내릴 때였다. 더 이상 현 상황이 지속된다면 서로의 마음에 앙금이 생길 수도 있을 테니까.

“자네가?”

“예. 기회를 주신다면 올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해보도록.”

“우선 지금 조사대를 파견하나 겨울이 지난 다음 파견하나 비슷할 것이라는 말이 일리가 있습니다. 단순히 눈이 내려 흔적이 사라졌다던가, 무리가 이동했을 우려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로랑은 그 존재가 한 말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자신의 영역에 침범해 분노했다.]

고요. 만약 그 존재가 정말로 드래곤이고 그 주변을 영역으로 삼았다면 인간 몇몇이 찾아왔다하여 영역을 옮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만일에 만일의 경우가 되겠지만 그 존재가 드래곤이면서 영역을 옮겼을 경우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면 더더욱 신경 쓸 필요가 없다. 고작해야 인간들이 찾아올 것이 두려워 영역을 옮길 정도라면 동화 속에서 보여주는 어마어마한 힘을 가진 존재는 아니라는 뜻이었으니까.

“겨울 동안은 혹시 모를 사태에 단단히 대비하며 겨울이 지나간 다음 조사대를 파견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다시 한 번 재고해주십시오.”

“재고해주십시오!”

내 말이 기폭제라도 되는 마냥 내 말이 끝남과 동시에 회의실에 모여 있는 인물들의 입이 하나로 모였다. 아무리 지크 후작이라 하더라도 모두가 반대하는 일을 밀어붙이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으며 또한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도 아니었다. 막말로 지크 후작이 조사대를 이끌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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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은 좀 어때요?”

“나쁘지는 않아. 왼팔이 없다는 건 아직도 실감이 안 되지만······. 살아 돌아온 것만으로도 다행이지. 그 자리에서 죽었어도 이상하지 않은 일이었으니까.”

강제로 잠에 들었다가 깨어난 로랑은 내가 맡았다. 친분이 두텁기도 했고 동기라는 신분, 그리고 개인적으로도 궁금한 점이 있기 때문이었다.

“잠들어 계시는 동안 조사대에 대한 회의가 열렸어요.”

“······어떻게 됐어?”

“겨울이 지나간 다음에 조사대를 파견하기로 결정 났어요.”

눈에 띄게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한 로랑. 그러나 어쩔 수 없다는 걸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가 경험했듯이 이 시기에 몬스터의 대지를 돌아다니는 건 무척이나 위험한 일이었으니까.

“그런데······정말로 드래곤이 있었어요?”

“너도 내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거냐?”

내 말에 로랑이 오해하기 전에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괜한 오해가 생기면 앞으로 이야기를 진행하는데 있어 불편함이 있을 수도 있으니.

“믿기 힘든 말이지만 거짓말이라고는 생각 안 해요. 정말로 거짓말을 할 거였다면 그보다 설득력 있는 거짓말들이 수십, 수백 개는 있었을 테니까요.”

거짓말도 설득력 있는 거짓말을 해야 믿는 법. 로랑의 발언이 거짓말이라면 둘 중 하나다. 희대의 멍청이거나 엄청난 강심장이거나. 누구도 믿지 않을 거짓말을 당당히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말이다.

“그러니까 말씀해주세요. 정말로 드래곤이었어요? 하나라도 더 정보가 있어야 조사대가 더 많은 것을 조사할 수 있으니까요.”

“······.그렇지. 그걸 위해 어떻게든 나를 살려 보낸 거고, 드래곤이라······. 정확하게 말하자면 확신은 못하지.”

“확신은 못 한다는 말은?”

“실제로 드래곤을 본 적은 없으니까. 하지만 그 동안의 아종들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모습이었어. 단순히 겉모습뿐만이 아니라 주변의 분위기에서부터 그런 게 느껴졌지.

게다가 주변 몬스터들이 그 존재에게 복종하는 모습과 우리들에게 의사를 표현할 정도로 지성이 있다는 점 등등을 종합해 봤을 때, 드래곤에 대해 내려오는 이야기들과 상당히 유사한 점이 많았다는 거지.”

로랑의 말은 그런 광경을 보여줄 수 있는 건 드래곤 외에는 없다. 그러니 그 존재는 드래곤이다. 내 생각에도 틀린 추론은 아니었다. 설령 드래곤이 아닌 다른 이름을 가진 종족이라고 하더라도 우리들에게 그 존재는 드래곤이라는 이름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 외에 궁금했던 점들에 대해 물어보기 시작했다.

“그럼 드래곤은 직접 움직이지 않고 몬스터들에게 명령만 내린 거예요?”

“······그러네. 적어도 직접 움직이는 모습은 보지 못했어.”

“왜 그랬을까요? 로랑 씨는 드래곤이 자신의 영역을 침범했다며 분노했다고 했잖아요.”

“글쎄, 내가 드래곤이 아니니만큼 확실히 알 수는 없지만 자신이 직접 나설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것이 아닐까. 보통 자존심이 엄청 강한 존재로 표현되곤 하니까. 오크 따위를 잡자고 후작 각하께서 직접 나서지 않는 것처럼 말이야.”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 뒤로 나는 계속해서 로랑과 대화를 나눴다. 그 당시 상황부터 여기까지 오면서 겪게 된 일까지. 그러면서 깨닫게 된 점은 적어도 꾸며낸 이야기는 아닐 것 같다는 점이었다. 이야기 속에 허점이 없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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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 드래곤이라니, 그게 갑자기 무슨······?!”

마정석 광산의 개발 계획을 위해 잠시 테라 방벽을 떠나 수도로 향했던 에반이 돌아왔다. 상세한 계획을 가지고 관계자들을 설득하여 테라 방벽으로 돌아온 그에게 정말 청천벽력과도 같은 소식이 아닐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인가? 드래곤이라니, 무슨 동화에서나 나올법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건가!”

“후작 각하께서 결정하신 일입니다.”

“허. 계획도 다 승인받았고 시작만 하면 되는 상황인데······.”

영역을 침범했다는 말에 광산 개발도 중지가 되었다. 로랑이 드래곤을 발견했다고 추정되는 장소와는 꽤나 거리가 있었지만 정확한 사실이 밝혀지기 전까지 모든 외부 활동을 금한다는 것이 지크 후작의 방침이었다.

테라 방벽에 도착한 에반이 그 소식을 듣고 지크 후작을 설득하기 위해 만났지만 바위와도 같이 단호한 모습에 결국 한 발자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늦어도 여름에는 진실을 알 수 있을 터, 그 사이를 준비 기간으로 잡는다면 크게 낭비하는 것은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만큼 날씨 또한 점점 풀리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그 간 특별한 일은 없었다. 어느 때와 같이 몬스터가 공격을 해왔고 방어를 했으며 병사들 또한 죽어나갔다. 영역을 침범만 하지 않으면 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평소보다 방어를 굳건히 한 것이 무색할 정도로 어떠한 변수조차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봄이 찾아왔고.

“저도 조사대에 넣어주십시오!”

“자네 몸부터 살피게. 제대로 마법도 사용하지 못하면서 어딜 가겠다는 거야!”

“제가 그 녀석을 봤습니다. 그 장소도 아직 똑똑히 기억하고 있고요. 짐이 되지는 않을 테니 조사대에 넣어주십시오!”

조사대가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8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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