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6화 - >
비리가 적발되었다. 억지로 만들어낸 비리도 아니었다. 소식을 듣고 달려온 조장들마저 고개를 저을 정도로 확실한 비리. 그 뒤로 한층 더 꼼꼼하게 이어진 감찰에서 한 명이 더 적발되는 것을 끝으로 마법사들에 대한 감찰은 끝이 났다.
“젠장! 내가 이딴 곳에서까지 와서 죽을 둥 살 둥 개고생하고 있는데 이 정도는 해도 되는 거 아니야!”
“너흰 불문율을 어긴 거야! 알아! 책임질 수 있어? 있냐고!”
그 사이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이 있었다. 좋은 소식이라면 그 외에 비리가 적발되지 않았다는 점. 병사들에게는 그럴 만한 힘과 권력이 없었으며 기사들은 마법사들에 비해 단체 생활을 강조했기에 집단의 비리가 있으면 있었지, 개인적인 비리는 벌이기 쉽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나쁜 소식은 뭐냐, 말했다시피 마법사들에게만, 것도 신입들에게서만 비리가 적발된 탓에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점이었다.
“어떻게 하는 것이 좋겠나?”
“두말할 필요 없는 중죄입니다. 법대로 처벌하십시오.”
지크 후작의 물음에 원더가 작게 고개를 숙이며 답했다. 나이 상으로나 지위 상으로나 지크 후작이 위였으며 마법사들의 총 책임자로서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죄까지 있었으니 평소보다도 공손해질 수밖에 없었다.
“멍청한 자식들. 상대를 봐가면서 그 지랄을 해야지.”
“여기가 어딘 줄 알고 이런 짓을 해?”
“걸렸으면 바로 죄송하다고 빌기라도 하던가, 뭘 잘했다고 큰 소리야.”
결국 그 둘은 처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한창 전쟁 중인데 주요 군수 물자를 개인적인 욕심으로 빼돌리다가 적발되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 둘 또한 작위를 받은 귀족들의 아들이었지만 아마 그들의 부모는 항의조차 할 수 없을 것이다. 명령을 내린 이가 지크 후작에다가 사유까지 확실했으므로.
“더러운 새끼들.”
“이런 상황에서도 지들 욕심만 챙겨?”
그 시체 또한 가족들의 품으로 되돌아가지 못했다. 머리는 몸과 분리되어 장대 위에 걸렸고 나머지 시체는 몬스터들의 먹이로 던져졌다. 제국의 적에게 협조한 격이었으니 스스로 자초한 문제였다.
당연한 말일수도, 당연한 말이 아닐 수도 있었지만 나에 대한 질책은 없었다. 결과적으로 마법사들의 명예를 실추시킨 것에 한 몫 거든 꼴이 되고 말았지만 애초에 내부감사가 있었다는 점, 지금 넘어갔어도 결국 밝혀졌을 거라는 점, 두 명 모두 테라 방벽에 온 지 얼마 안 된 신입들이라는 점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덕이었다.
그렇게 약간의 소란을 가져온 감찰이 끝난 후, 나는 지크 후작의 부름을 받아 그의 집무실로 향했다. 이유는 대충 예상이 되었고 좋은 쪽이냐 나쁜 쪽이냐 이지선다로 고르라 한다면 그래도 좋은 쪽이 아닐까 싶었다. 나쁜 일을 한 건 아니었으니까.
“후작 각하. 각하의 명령대로 레닐을 데리고 왔습니다.”
“들어오도록.”
내가 들어오자 지크 후작은 다른 이들을 모두 밖으로 내보냈다. 무슨 말을 꺼내든 간에 다른 이들이 들어서 좋을 건 없는 말일 테니까. 둘만 남은 집무실에서 나는 또다시 예전에 마셨던 차를 마실 수 있었지만 그 날과는 조금 다른 맛이 느껴졌다. 아마도 차를 타는 사람의 마음이 담겼거나, 내 마음이 달라졌기 때문이리라.
“우선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알고 있었나?”
“예. 따님이 사람을 통해서 감사의 인사를 전해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군.”
아직 수양이 낮은 나로서는 지크 후작의 무표정을 뚫고 속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십 년에 가까운 세월을 떨어져 있다가 간신히 마지막을 함께한, 거의 반평생을 함께한 아내의 죽음. 그리고 죽음을 뒤로 한 채 임무를 다하기 위해 머나먼 타지로 달려온 본인까지. 그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이 약간의 침묵이 무척이나 무겁게 느껴졌다.
“너에게 큰 은혜를 입었다.”
“······아닙니다. 제가 한 일이라고는 따님에게 말 한 마디를 건넨 것밖에는 없습니다.”
“그 한 마디가 없었다면 시작조차 할 수 없었겠지.”
지크 후작은 일부러 관심을 끊은 상태에서 그의 딸인 시그니는 발만 동동 구르고 있는 상황이었다. 상황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은 알고 있었지만 일말의 망설임이 그녀의 발목을 잡고 있는 상황에서 나는 그녀가 한 발자국 내딛을 수 있도록 등을 떠밀었을 뿐이었다.
아마 내가 아니었더라도 그녀는 결국 한 발자국 앞으로 나섰겠지. 후작 부인이 쓰러졌다는 소식을 접한다면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을 테니, 물론 그렇게 되었다면 지크 후작에게도, 후작 부인에게도, 영애에게도 모두 조금씩 늦은 선택이 되었겠지만.
“나에게 바라는 것이 있나? 사적인 일이기에, 가문의 일이기에 공적인 일로 도와줄 수는 없지만 테라 방벽의 지휘관이 아닌 지크 영지의 영주였던 지크 후작으로서 가능한 일이라면 들어줄 수 있다.”
과연 지크 후작에게 이런 말을 들어본 사람이 몇 명이나 있을까. 물론 조건이 붙기야 하겠지만 지크 후작의 입에서 청탁을 들어준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
“물론 제국의 이익에 반하는 일이 아니어야겠지. 말해보게. 내게 부탁할만한 것이 있나?”
부탁할만한 것이 뭐가 있을까. 그가 말했던 것처럼 테라 방벽의 지휘관으로서 나서야 하는 일은 불가능했다. 제국의 이익에 반하는 일도 안 되었고, 그런 조건 하에서 내가 부탁할 수 있는 일의 범위가 넓지는 않았다.
“제 고향을 도와주십시오.”
‘지크 후작’에게서 얻어낼 수 있는 최선이었다. 적절히 잘 대처를 하셨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드라그닐 영지는 여러모로 위험한 상황. 비록 드라그닐 영지와 지크 영지가 각각 서남쪽과 동쪽으로 꽤나 거리가 있는 편이었지만 물리적인 거리와 상관없이 교류가 이어지는 모습만 보여줄 수 있어도 드라그닐 영지에는 큰 힘이 되리라.
“고향을?”
“예. 아시다시피 황제 폐하께서는 광산에서 채굴되는 산물 일부를 제 아버지께 하사하셨습니다.”
나는 내가 떠났을 때의 드라그닐 영지의 상황을 상세하게 설명했다. 황제의 하사품이 분란의 씨앗이 될 수도 있다는 말까지. 지크 후작 또한 어리석은 인물이 아니었기에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를 리가 없었다.
“그런 이야기로군.”
“그렇습니다.”
“알았다. 부관들이 돌아갈 때, 말을 전해두도록 하지.”
다행히 드라그닐 영지 주변에 강력한 힘을 가진 영지는 없다. 아무리 거리가 멀리 떨어져있다지만 지크 영지와 친하게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면 헛된 생각을 하는 이들은 없으리라.
“부탁을 들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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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크 후작과의 대화를 성공적으로 끝마친 이후로 나는 점점 초조해져 갔다. 다른 이유가 아닌 다른 이들은 거의 다 도착을 했는데 정작 내가 기다리는 사람은 깜깜무소식이었기 때문이었다.
“음······.”
“오늘도 기다리는 것이냐?”
“예. 어쩐지 불길한 예감이 들어서 말입니다.”
술 한 잔을 약속하고 가을 원정을 떠났던 로랑 일행이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사실 출발 직후부터 불길한 느낌이 들긴 했었다. 사실 위험할 수밖에 없는 일이니만큼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지만 다른 이들이 모두 돌아온 상황에서 한 일행만 늦는다면 단순히 그러려니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몇 안 남은 동기이니만큼 걱정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겠지만, 믿고 기다려 보거라. 다른 이들도 대부분 무사히 돌아오지 않았느냐.”
작년에도 큰 역할을 한 지도는 이번 년도에도 어김없이 원정대의 생존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가을 원정에 있어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상대할 수 없는 강력한 몬스터를 마주하는 순간이 아니었다.
물론 그것도 충분히 위험한 상황이었지만 빈도가 낮기도 했을 뿐더러 최소한의 희생으로 빠져나올 수 있었으니까. 아마 가을 원정 경험이 있는 이들 열 명에게 가장 위험한 순간이 언제였냐 물어본다면 열 명 중 아홉 명은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전투 중 갑작스럽게 다른 몬스터가 공격해올 때가 가장 위험했다고.
몬스터들의 대지에서 우리들은 약자다. 약자가 강자를 잡아먹기 위해서는 철저한 계획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그런데 갑작스러운 몬스터의 등장은 그 그림을 종이 째로 찢어버리는 것과도 같았으니 모두가 두려워하는 상황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도의 등장은 그림을 찢어지지 않게 만들어주었으니 찬사가 뒤따를 수밖에.
“그렇기에 더 걱정이 됩니다.”
다른 이들이 비교적 무사히 돌아오는 와중에 한 무리만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의 결과일 테니까.
그렇기에 초조한 것이다. 가을 원정을 떠날 때, 리옹이 한 말부터 한 편으로는 불길하기 짝이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불길함은 결코 느낌으로만 남지 않았다. 며칠 후, 로랑이 테라 방벽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인근에서 만신창이의 모습으로 발견되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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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을 잃고 쓰러진 로랑을 발견한 것은 방벽 위를 순찰하던 기사들 중 한 명이었다. 테라 방벽으로부터 수백 미터 떨어져있는 협곡 입구에 쓰러져있던 로랑을 발견할 수 있었던 건 오로지 기사의 신체 능력이 일반인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우여곡절 끝에 테라 방벽으로 되돌아온 로랑의 상태는 결코 좋지 못했다. 왼팔은 어디에 놓고 왔는지 어설프게 마법으로 봉합한 상처가 보였으며 그걸 제외하고도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쩡하다 할 수 있는 부분이 없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의 품에서 나머지 일행들의 유품으로 보이는 물건들이 나왔다는 것. 로랑이 발견된 상황과 유품으로 추정되는 물건들이 의미하는 것은 하나뿐이었다.
예측하지 못한 사고로 인해 유품을 로랑에게 넘겨준 뒤, 로랑만 살아 돌아왔다는 것. 최후의 생존자로 로랑이 선택된 이유 또한 알 법했다. 몬스터의 대지를 무사히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마법사가 유리했으니까.
“뭐가 어떻게 된 걸까요?”
“글쎄다, 자세한 건 로랑이 깨어난 이후에야 알 수 있겠지.”
결과만 보고 과정을 추론하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가을 원정을 떠났던 다른 일행들에게 이에 관련된 사실을 물어봤음에도 초반에 만나서 헤어졌다던가, 모른다는 대답이 나올 뿐이었으니 일드의 말처럼 로랑이 깨어나 스스로 밝히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로랑이 발견된 지 며칠이 지났을 때, 로랑이 기나긴 잠에서 깨어났다.
“여, 여기는······.”
일어나자마자 고개를 돌려 주변을 확인하고 나서야 이 곳이 테라 방벽 내부임을, 그리고 자신이 살아남았다는 것을 확인한 로랑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동시에 왼팔이 잘렸다는 것이 실감되지 않는지 의문스러운 표정을 짓다가 이내 무슨 일이 있었는지 깨닫고 고개를 숙여 남은 손으로 얼굴을 쥐는 행동이 그의 심정이 어떨지를 짐작하게 했다. 그러나 미안한 이야기였지만 그의 심정보다 더 중요한 일은 그가 무슨 일을 겪었냐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같이 떠났던 동료들은, 자네 혼자만 살아 돌아온 건가?”
“······예. 나머지 동료들은 제가 도망칠 시간을 벌기 위해 그 자리에서 장렬하게 산화했습니다.”
로랑의 대답에 회복실이 침묵에 잠겼다. 지금껏 이어진 가을 원정에서 단 한 명만이 살아 돌아온 적은 없었다. 그것도 다른 일행은 대부분 무사한 상황에서 한 무리만 전멸 직전에 처한 것이라면 더더욱.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는지 자네 말을 듣지 않고서는 상상조차 불가능하군.”
“몬스터가.”
“몬스터가?”
“몬스터가 사람의 말을 했습니다. 그 뿐만이 아니라 그 몬스터에게 많은 몬스터들이 종류를 불문하고 복종하고 있었습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6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