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5화 - >
테라 방벽에서의 일 년, 그 시간은 나에게 정말 무수히 많은 경험을 쌓게 해준 시간이었다. 덕분에 일개 조에 해당하는 인원이 빠져나가 이개 조로만 길고 긴 테라 방벽을 방어하고 있음에도 그렇게까지 어렵게 느껴지지만은 않았다.
개개인의 숙련도가 다르긴 했지만 여름이 다가올 때쯤 해서는 거의 마흔 명에 가까운 숫자만이 남아있었으니까. 비슷한 상황에서 몇 십 번의 전투를 거쳤는데 이제 와서 더 어려울 것이 뭐 있겠는가.
“정신 똑바로 차려! 해야 할 일은 달라진 게 없어! 그냥 감당해야 할 구역만 넓어진 거라고, 왜 이렇게 허둥거려!”
“적이, 적이 너무 많아!”
“닥치고 집중해! 어중간한 것들은 신경 쓰지 말고 위험할 것 같은 놈들만 못 올라오게 막으라고!”
작년 이 때쯤 나는 일행들과 함께 바실리스크와 열심히 씨름을 하고 있었을 터, 테라 방벽에 남았던 로랑과 가이우스의 심정이 내 눈앞에서 공황에 빠진 마법사와 똑같지 않을까 싶다. 나였다고 하더라도 달랐을까? 장담을 할 수는 없었다. 지금이야 경험이 쌓인 덕분에 냉정할 수 있지만 그 때의 나는 눈앞의 마법사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까.
“마력을 아껴! 언제 전투가 끝날지 모르는데 펑펑 쓰고 지랄이야! 뭐, 차라리 마력 회복한다는 핑계로 내려가서 쉬겠다는 거냐?! 이 짓을 몇 번을 해왔는데 그거 하나 눈치 못 챌 것 같아!”
그럼에도 테라 방벽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애초에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 그 사이 느낄 수 있었던 건 외부로 나간 이들만 고생을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 가을 원정을 떠난 이들만큼이나 남아있는 이들 또한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게 하루 이틀 버티던 사이 보름이 지나고, 한 달이 지났다. 다시 한 번 가혹한 겨울이 찾아오려던 그 때, 이제 슬슬 원정을 나갔던 이들이 돌아올 때쯤 드디어 지크 후작이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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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 폐하의 명령서다. 지금 즉시 지휘권을 내게 양도하고 수도로 복귀하여 황제 폐하를 알현할 수 있도록.”
“일찍 왔네? 적어도 내년은 돼야 올 줄 알았는데.”
“그건 네가 신경 쓸 바가 아니다.”
“뭐, 그건 그렇지.”
집무실에서 거하게 잠을 자다가 느닷없이 지크 후작을 맞이하게 된 퐁크 후작이 눈을 비비며 일어났다. 그의 예상보다 훨씬 빠르게 돌아온 지크 후작의 모습에 감탄을 표하면서도 태도는 불량스럽기 그지없었다.
지크 후작이 건넨 명령서를 읽지도 않은 채, 주섬주섬 일어나 밖을 빠져나가는 퐁크 후작을 향해 지크 후작이 일갈했다. 황제의 명령서를 받았음에도 읽지도 않은 채, 움직인 것이었으니까.
“네가 다 설명했잖아. 지휘권 양도하고 수도로 올라오라고. 설마하니 네가 명령서를 위조했을 리도 없고, 내가 한 시라도 빨리 떠나주는 편이 더 좋은 거 아닌가? 마침 슬슬 몬스터를 죽이는 것도 질리기도 시작한 참이고.”
“건방진······.”
“잘 놀다 간다.”
그렇게 퐁크 후작은 테라 방벽을 떠났다. 그러나 일은 지금부터가 시작이었다. 몇 개월 만에 제 자리로 돌아온 지크 후작은 곧바로 주요 인물들을 소집했다. 먼 길을 달려왔지만 휴식보다 중요한 것이 현재 상황을 파악하는 것이었으니까.
“후작 각하!”
“완전히 돌아오신 겁니까?”
“이렇게 빨리 돌아오시다니,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것입니까?”
지리적인 이유를 포함해 여러 이유들로 인해 테라 방벽은 특히나 세간의 소식에 늦을 수밖에 없었다. 우선 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탓에 가까운 영지만 하더라도 꽤나 거리가 있었으며 일반인의 통제가 엄격하게 금지된 곳이었다. 유일한 통구라고 해봤자 일 년마다 찾아오는 지원군들과 주기적으로 찾아오는 물자 이송이 전부였으니까.
“쓸데없는 추측은 하지 마라. 황제 폐하의 명령을 받들고 다시 복귀했을 뿐이다. 그보다 테라 방벽의 현재 상황에 대해 보고할 수 있도록.”
지크 후작이 테라 방벽을 떠나있던 시간은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 여름과 가을이 속해있다는 점이 문제였다. 테라 방벽에서 큰 사건으로는 세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는 지원군과 가을 원정이 속해있는 시간이었으니까.
“아, 예!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바로 준비하겠습니다.”
급작스러운 귀환과 곧바로 이어진 점검에도 이 곳에 모인 이들은 조금 당황했을 뿐, 금세 페이스를 되찾고 지크 후작의 말에 따라 행동하기 시작했다. 잠시 동안 그와 떨어져 있었으나 애초에 그와 함께한 시간은 떨어져 있던 시간의 몇 배에 달했다. 이제 와서 그의 방식에 적응하지 못할 리가 없었다.
순식간에 회의실이 분주해졌다. 그가 떠나기 전의 병력과 물자의 숫자, 지원군이 도착하며 작성한 서류들, 그리고 가을 원정을 떠난 이들에 대한 자료까지.
그가 떠난 이후로 많은 것이 새롭게 생기고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자료를 가져오고, 비교 분석하여 일부러 빠트린 부분은 없는지, 부풀려지거나 축소된 부분은 없는지 확인했다. 지금까지 수십 번도 더 해온 일이기에 그 속도는 섬전과도 같았다. 그럼에도 양이 양이기에 해가 저물 때나 되어서야 감사가 끝이 났다.
“좋아. 서류상으로는 별 문제 없는 것 같군.”
만족스럽다는 지크 후작의 말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테라 방벽은 실시간으로 전투가 벌어지는 전장이었고 물자에 대한 서류를 속인다는 것은 경우에 따라 사형까지도 감내해야 하는 중죄였으니까. 그 점을 잘 알고 있기에 깨끗하고 투명하고자 최선을 다했지만 완벽이 그리 쉬울 리가 없었다. 그러나 지크 후작은 단순히 서류에서 끝낼 생각이 없었다. 아니, 끝내서는 아니 되었다. 서류로는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었기에.
“그럼 이제 서류와 실물을 비교해 볼 차례군.”
이 일에는 그가 영지로부터 데리고 온 관리들과 기사들, 마법사가 빛을 발했다. 평소 그가 테라 방벽에 있을 때야 실시간으로 감시하니 혼자서도 충분했지만 지금은 아니었으니까. 현재의 일이 끝나면 다시 영지로 돌려보낼 이들이었으니 이권으로 얽힐 수 있는 관계가 아니었고 결과적으로 누구보다 공정히 부패를 밝혀낼 수 있는 이들이었다.
“시작하게. 자네들도 이들의 행동에 철저하게 협조할 수 있도록. 막아서는 자가 있다면 감찰에 걸릴만한 짓을 했다는 것으로 생각할 테니,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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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예.”
“마법사 레닐이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 누구십니까?”
나를 찾는 목소리에 방문을 열고 손님을 맞이했다. 처음 보는 얼굴의 마법사. 그러나 그의 가슴팍에 새겨져있는 문양과 그의 말을 통해 그의 정체를 알아낼 수 있었다.
“지크 후작 각하의 명으로 그 동안의 연구에 대한 감찰을 위해 나왔습니다.”
“감찰이요?”
“예. 서류상으로는 스콜피온의 개량 및 여러 이유로 마정석을 활용했다고 되어 있습니다. 그에 대한 자료를 보여주시겠습니까?”
당황하던 것도 잠시, 나는 방구석에 보관하고 있던 관련 자료들을 감사원에게 건네주었다. 이미 한 번의 경험이 있었으니까. 물론 그 때는 적응하기에 바빠 딱히 감사에 걸릴만한 일도 없기는 했지만 그 뒤로 테라 방벽 내의 물자를 사용할 때는 항상 근거 자료를 남겨두고 있었다.
“여기 있습니다.”
많은 것을 살필 필요는 없다. 과연 마정석이 목적에 맞게 사용되었는지, 필요한 만큼만 쓰였는지 파악하면 될 일이었으니까. 적어도 양심에 찔릴 만한 짓은 하지 않았다고 자부했다.
“이 과정에서 왜 마정석이 쓰인 겁니까?”
“아, 그건······.”
중간 중간 감사원의 질문에 대답해주며 감찰에 협조한 지 얼마나 지났을까, 마지막 서류를 검토한 마법사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으며 일어섰다. 그 과정을 적극적으로 협조했고 감사원이 지적한 부분 또한 투명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했기에 불안하지는 않았으나 그 웃음에 모든 것이 잘 풀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생하셨습니다. 딱히 문제가 될 만 한 건 없군요.”
“물론입니다. 제국의 자산을 개인적인 일에 사용한다니,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역시 영애께서 말씀하신 대로군요.”
“예?”
“영애께서 말씀을 전해 달라 하셨습니다. 그 때, 자신을 설득해줘서 고마웠다고, 덕분에 어머님께서 편히 잠드실 수 있었다고요.”
감사원으로부터 듣게 된 말은 꽤나 충격적인 말이었다. 설득해줘서 고마웠다는 말이 충격적인 것이 아니라 후작 부인이 잠들었다는 이야기가 충격적인 것이었다. 그 말은 곧 지크 후작이 후작 부인이 죽자마자 혹은 장례식이 끝나자마자 테라 방벽으로 올라왔다는 말이니까.
“편히 잠드셨다는 건······.”
“예. 후작 부인께서는 약 두 달 전에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그 말을 듣자 존경심과 함께 두려움이 들었다. 사적으로 큰 일이 있었음에도 전혀 개의치 않고 곧바로 공적인 일에 돌입하는 것에 대한 존경심이, 동시에 인간의 탈을 쓴 기계와 같다는 두려움이.
“만약 이 곳에서 살아남아 전역을 하게 되신다면 지크 영지를 꼭 방문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리 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 부탁을 드려도 되겠습니까?”
충격과 공포, 두 가지 감정이 뒤섞일 때 이어진 감사원의 말에 나는 한 번 더 놀랐다.
“감찰을 도와주시지 않겠습니까?”
“제가요?”
“예. 사실 이번 감찰을 맡게 된 마법사는 저를 포함해도 두 명으로 턱없이 부족합니다. 듣자하니 평소에는 각 조장들께서 감찰을 진행했다고 들었는데 일드님께서 레닐 군이라면 도움이 될 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감찰을 도와달라는 말에 작년 생각이 문득 들었다. 작년에 나는 일드에게 감찰을 받았다. 별 일은 있지는 않았지만 같은 사람인가 싶을 정도로 냉정하고 딱딱한 모습이었던 것만은 기억이 났다.
소속된 이들을 감찰하는 것은 곧 내부고발로 이어질 수 있었다. 좋지 않은 눈초리를 살 수도 있겠지. 하지만 어차피 이 곳에서 숨긴다한들 자료들이 수도로 넘어가게 되면 들키게 되어 있다. 그걸 알기에 감사원을 내부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조장들이 맡았음에도 별 말이 없는 것이고. 조금 경우가 다르다고 할 순 있겠지만 나쁜 소리를 들을 가능성은 없을 듯싶었다.
“알겠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리면 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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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선배, 접니다. 레닐.”
“네가 갑자기 무슨 일······. 감찰입니까?”
“그렇습니다. 협조 부탁드리겠습니다.”
“예. 뭐, 들어오십쇼.”
예상대로 나에게 불만을 가지는 사람들은 없었다. 애초에 매년 진행되던 일이기도 했고 걸릴만한 일을 하지 않았다면 막을 이유도 없었으니, 오히려 격려를 해주는 선배들도 있었다.
“고생이 많다. 육십 명 가까이 되는 사람들의 자료를 다 살펴보려면 하루 이틀로는 어림도 없을 텐데.”
내가 하는 일은 간단했다. 감사원과 감찰 대상의 중재, 해당 연구가 정말로 테라 방벽의 방위를 위한 연구였는지에 대한 검토 등등. 확실히 돕는다 했지만 한 선배의 말처럼 하루 이틀로 될 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모두가 무사히 감찰을 넘어갈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이건 도대체 무슨 연구지?”
“내, 내 개인적인 연구네. 아무리 자네가 나보다 일 년 일찍 이 곳에 왔다지만 불문율을······.”
“마정석을 제공받은 이상 더 이상 개인적인 연구가 아니지. 테라 방벽을 위한 연구에만 마정석을 제공 받을 수 있으니, 게다가 한 눈에 보기에도 서류상의 연구 목적과 이 연구는 전혀 다른 목적인데. 이게 어딜 봐서 테라 방벽의 방어에 도움이 된다는 거지?”
불과 몇 개월 전 테라 방벽에 속한 신입에게서 문제가 터져 나왔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5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