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34화 (34/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4화 - >

테라 방벽에 입구를 둔 땅굴로 광산 근처까지 도착해 거대한 거점을 만든 뒤, 마정석을 채굴한다는 간단하고도 명쾌한 계획. 그러나 조금만 자세히 파고들어도 전혀 간단하지 않다는 것쯤은 누구나 알 수 있는 계획이기도 했다.

우선 10km에 달하는 길이도 길이지만 마차 두 대쯤은 가볍게 지나다닐 수 있을 정도의 크기가 되어야했으며 몬스터가 위로 지나다니는 만큼 충격으로 인해 땅굴이 무너지면 안 되니 땅 속 깊숙이 만들어져야 했다. 땅굴만 하더라도 그 정도인데 하나의 마을 수준이 될 지하 거점은 또 어떻겠는가.

“다행인 점은 아직까지 땅 속에서 서식하는 몬스터는 발견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간접적인 충격에만 대비하면 되는 만큼 생각처럼 어렵지는 않을 것입니다.”

지금까지 테라 방벽에서 발견한 몬스터들의 종류만 하더라도 수십 종류. 그 중에 지금까지도 두더지와 같은 행동을 하는 몬스터는 보고되지 않았다. 그런 몬스터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예를 들어 샌드윔과 같은 몬스터가 있었으나 주 서식지가 사막이니만큼 몬스터의 대지에는 없다고 봐도 무방할 터였다.

“땅굴······허! 지하 몇 미터를 예상하고 있습니까?”

“최소 10m는 파고들어야지 몬스터들로부터 안전하지 않겠습니까?”

인간이 가장 큰 공포를 느낀다는 높이 10m. 그 깊이에 땅굴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는 단순히 삽과 곡괭이만으로는 어림도 없었다.

하루 종일 교대를 하면서 파고들어가도 몇 미터나 팔 수 있을지, 10km와 그에 못지않을 만큼 거대한 지하 거점을 순수한 인력으로 만들기 위해서 얼마나 긴 시간이 필요할지 가늠조차 할 수 없었으니까.

그러나 이세계에는 발전된 과학은 없을지언정 마력이 있었다. 마력으로 감싼 삽과 곡괭이를 든 기사들은 단단한 바위로 이루어진 지각이라고 하더라도 부드러운 모래를 푸듯 공사를 할 수 있었다. 물론 기사들의 불만은 있겠지만 테라 방벽의 방위에 도움이 되는 일이니만큼 협력을 거부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게 가능하리라 보는 겁니까?”

“적어도 아무런 대책 없이 지상에서 몬스터를 막는 것보다는 훨씬 가능성이 있을 겁니다.”

“흠······. 우선 계획을 구체적으로 세워보죠. 그 다음 마탑에 보고를 한 뒤, 답변을 기다려보도록 합시다.”

한 번 시작한 이상 끝을 봐야 했다. 만약 실패로 돌아간다면 누군가는 실패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할 테니까. 아마 그 책임은 마탑이 질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의 부관 중 한 명이 아닌 마탑의 중요인사인 에반이 왔다는 것 자체부터 이번 광산 개발을 주도하는 것이 마탑이라는 것을 알 수 있는 점이었으니까. 그런 만큼 새로운 방법에 대해 신중할 수밖에 없으리라.

#

텅-

텅-

텅-

스콜피온이 쉴 세 없이 불을, 아니 장창을 뿜어냈다. 표적은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상위종. 먼 거리였기에 적중이 쉽지 않았으나 숫자가 숫자이다 보니 빗나가더라도 뒤의 몬스터가 맞는 경우도 심심치 않게 보이곤 했다.

“좋았어!”

“확실히 다른데.”

“마정석을 들이붓고 있는데, 이 정도는 해 줘야지!”

장창 한 발을 발사할 때마다 누군가는 눈물을 흘릴 정도의 자금이 필요했다. 물론 테라 방벽이 밑 빠진 독은 아니었다. 내륙에서는 구경하기 힘든 상위종이 무더기로 나오는 만큼 그에 따른 수익도 분명히 있었다.

대표적으로 트롤의 피는 외상 치료제의 핵심 재료였으며 오우거의 힘줄은 활의 시위로 첫 손에 꼽았고 상위종의 가죽은 튼튼하고 유연함 덕분에 갑옷의 재료로서 뛰어난 성능을 자랑했다.

또한 흔치는 않지만 베히모스의 뿔은 전격 마법의 촉매로서 돈이 있어도 못 구하는 마법 재료 중 하나였다. 물론 그것을 위한 소모품이 마찬가지로 돈보다도 귀한 마정석이라는 사실에 빛이 바랄 뿐이었지만.

“기대했던 만큼의 성능은 보여주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다행이지. 하지만 여기에 만족해서는 안 된다. 여기에 안주하는 순간 언젠가는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 테니.”

일드의 말이 맞았다. 스콜피온이 예상 그대로의 위력을 보여주며 대(對) 상위종 병기로서 이름을 떨친다 한들 여기에 안주한다면 언제가 되었든 몬스터들 또한 더 강해져 나타날 것이 분명했다.

물론 스콜피온의 발사줄을 오우거의 힘줄로 교체하고 몇몇 장창에 마법진을 그려 넣어 보다 강한 마창을 만들어내는 등 여러 준비를 하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야지, 개량에만 몰두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실전을 거쳐 스콜피온의 사용에 대한 매뉴얼이 갖춰지고 신병들도 조금씩 적응을 하기 시작했을 때, 애써 마련한 매뉴얼을 버려야만 했다.

조금씩 퐁크 후작의 활약이 저조해지기 시작했기 때문에. 여전히 초기에 비하면 뛰어난 활약상이었으나 조금씩 활동 반경이 좁아지는 것이 눈치 챌 만한 사람들은 눈치를 챌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만큼 스콜피온의 활약이 더 필요해질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나쁜 소식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에반의 좋은 쪽으로 서신을 보냈는지 마탑에서도 광산 개발의 새로운 방식에 대해 자세한 계획을 수립해 보고하라는 말이 떨어졌으며 사상자의 숫자도 줄어드는 등 좋은 소식들도 있기는 했다. 그러는 사이 여름 날씨도 점점 선선해지기 시작하며 가을이 다가왔고 연례행사와도 같은 가을 원정도 함께 찾아왔다.

“꼭 가야 할까?”

“그러게 말이야. 다들 봤잖아. 상위종이라고 더 이상 뒤로 물러나 있지 않는다는 걸. 게다가 스콜피온 덕분에 더 많은 숫자의 상위종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굳이 피해가 극심할 가을 원정을 강행해야 하나?”

그러나 이번에는 연례행사와도 같았던 가을 원정에 반대하는 목소리도 적지 않았다. 지크 후작이 없는 만큼, 퐁크 후작이 내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는 만큼 중요한 일에 대한 결정권은 여섯 명의 기사단장과 세 명의 조장들, 원더에게 있었는데 열 명의 의견을 하나로 모으는 것이 쉬울 리가 없었다.

“작년부터 이러했다면 모를까, 적어도 이번 년도까지는 원정을 떠나야 해.”

“맞는 말씀입니다. 스콜피온 덕분에 더 많은 상위종을 죽일 수 있게 되었지만 본격적으로 실전에 사용한 건 고작 이 개월밖에 되지 않았잖습니까.”

“이렇게 생각해볼 수도 있겠지. 상위종이 더 적극적으로 달려들게 된 건 그만큼 상위종의 숫자가 늘어났기 때문이라고. 경쟁에서 뒤쳐진 몬스터들이 먹이를 얻기 위해 더 적극적으로 방벽으로 달려들었을 확률도 있지 않겠어?”

토론은 격렬했다. 그도 그럴 것이 가을 원정이 가지는 말의 무게는 결코 가볍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 중 가을 원정에 참여하지 않은 이들이 없었으며 그들이 테라 방벽에 있는 동안 가을 원정을 시행되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그렇기에 기록상으로만 남아있는 미지의 겨울에 대해 두려움을 갖는 것도 당연한 일. 여섯 명의 기사단장들이 반으로 나뉘어 첨예하게 대립했다.

그에 비하면 마법조장들은 침묵을 지키며 원더가 어떤 결정을 내릴지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사단장들의 머리라 할 수 있는 지크 후작이 없는 것에 비하여 마법사들에게는 원더라는 머리가 있었고 원더가 아무런 의견을 내지 않은 상황에서 섣불리 나서기가 조심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한 마디 해도 되겠나?”

한 공간에서 격렬한 토론과 침묵이 이어지던 가운데, 가만히 침묵을 지키던 일드가 나섰다. 나이로 보나 경험으로 보나 테라 방벽의 연장자 중 한 명이었기에 모두들 토론을 잠시 접어두고 이어질 일드의 말에 집중했다. 어차피 이대로 계속 이야기를 해봤자 평행선을 달릴 것이 뻔했기 때문에.

“우선 결론부터 말하자면 이번 가을 원정은 예정대로 진행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네.”

“일드님!”

“옳으신 말씀입니다.”

당연하게도 반응은 두 개로 엇갈렸다. 그러나 일드는 손을 들어 그들을 진정시킨 뒤 이야기를 마저 이어갔다.

“다들 진정하게. 자네들 말이 틀렸다는 것이 아니야. 자네의 말처럼 우리는 평소보다 많은 숫자의 상위종을 죽였지. 그게 몬스터의 행동에 변화가 생긴 탓이든, 스콜피온의 위력 덕이든 간에 말이야. 그건 여기 있는 모두가 느끼고 있는 사실이지. 체감 상으로든, 실질적인 숫자상으로든.”

“그렇습니다. 아마 그 동안 추가로 죽인 상위종의 숫자만 하더라도 지난 해 가을 원정에서 죽였던 상위종의 숫자에 결코 밀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피해가 극심할 가을 원정을 찬성하시는 이유를 모르겠습니다.”

레닐과 일드가 참여했었던 작년 가을 원정. 출발했던 백사십여 명의 용사들 중 반절 정도밖에 무사생환을 하지 못했을 정도로 극심한 피해를 낳은 것이 가을 원정이었다. 그럼에도 가을 원정을 매년 떠나야만 했던 이유는 그 간의 테라 방벽의 전력으로는 상위종을 충분히 줄일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활동 방식의 변화로 인해, 스콜피온으로 인해 보다 많은 숫자의 상위종을 죽일 수 있게 되었으며 설령 대대적인 공격이 있다고 하더라도 막아낼 수 있다는 자신감 또한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효율이 떨어지는 가을 원정을 강행하자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지크 후작 각하가 없는 지금, 우리들은 후작 각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최대한 안전하게 테라 방벽을 지켜내야 하네. 그런 와중에 불필요한 변수를 우리 스스로가 만들 필요는 없지.”

“고작 그런 이유로 희생을 강요······!”

“게다가 자네들이 걱정하는 것처럼 희생도 크지 않을 걸세.”

일드는 품에서 종이 한 장을 꺼내들었다.

“이게 뭔지는 자네들도 잘 알고 있을 걸세.”

레닐이 각인의 힘을 등에 업고 개발하여 다른 선배들의 조언을 받아 개량한 지도2. 이들이 이걸 모를 리가 없었다. 당장 어제의 방어만 하더라도 아주 효과를 톡톡히 보았으니까. 이미 지도는 지휘권을 가진 이들에게 있어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필수품이 된 지 오래였다.

“가을 원정을 나가는 각 무리의 리더들에게 지도를 배포한다면 피해를 줄일 수 있겠지. 적어도 전투가 벌어지기 전, 주변에 몬스터가 있는지 없는지만 판단할 수 있어도 원정이 훨씬 안전해질 테니 말이야.”

거기에 말을 모두 듣고 있던 원더까지 가을 원정의 속행을 찬성하자 7:3으로 찬성 측으로 대세가 기울었다. 그쯤 되니 반대 측도 더 이상 고집을 부릴 수는 없었고 이야기의 화제는 누가 갈 것인지, 언제 출발할 것인지로 옮겨졌다.

#

“레닐. 작년에는 어땠어?”

“글쎄요. 일드 님과 함께 다녀서 보다 편하긴 했는데, 아무래도 심리적인 부분을 컨트롤하는 게 어려웠죠. 방벽에서와 달리 인간과 몬스터의 관계가 역전된 곳이잖아요.”

작년에 가을 원정을 다녀왔던 나는 이번 년도에는 테라 방벽에 남기로 했다. 그러나 내 동기 중 한 명인 로랑은 어쩌면 마지막이 될 지도 모르는 가을 원정의 구성원으로서 테라 방벽을 나서 몬스터들의 대지로 향해야만 했다.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일드님이 말씀하셨다시피 지도도 챙겨가고 위험한 상황은 최대한 피하라고 하셨으니까. 적어도 작년보다는 훨씬 안전하게, 많은 이들이 살아 돌아올 수 있을 거예요.”

“······그렇겠지?”

작년과 많은 것이 변했다. 스콜피온이 실전배치 되었고 방벽의 방어력을 높이기 위한 방법들도 의논 중이었으며 경험도 쌓였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테라 방벽 내의 이야기. 가을 원정에서 바뀐 것이라고는 지도 밖에는 없었다. 그러니 미지의 땅이나 다름없는 그 곳으로 향한다는 것에 로랑은 꽤나 불안함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럼요.”

“경험자가 그렇게 말하니까 조금 안심이 되네. 무사히 돌아오면 언제 날 잡아서 술이나 한 잔 하자. 아, 너 성인은 맞지?”

“내년이면 벌써 스물이에요. 작년부터 성인이었어요.”

“발끈하기는. 성인식만 치루면 다 성인인가?”

그렇게 며칠 후, 일단의 무리가 테라 방벽을 떠났다. 그 무리에 속했던 작년과 달리 이번 해는 떠나는 무리를 지켜보는 쪽이었지만 이유 모를 불안감이 내 몸에 맴돌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4화 - > 끝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