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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33화 (33/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3화 - >

“아버지!”

집주인을 막아서는 집은 없다. 설령 그의 얼굴을 모르더라도 뒤에 주렁주렁 가문의 상징이 그려져 있는 깃발을 매달고 왔으니 막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더욱이 후작이라는 작위가 설명하듯 그의 영지에는 중앙 도시 뿐만 아니라 여러 도시들이 존재했고 그가 지나간다는 것을 알린 이상 다른 곳은 몰라도 지크 성이 그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오랜만이구나.”

“왜 이렇게 오래 걸리셨습니까.”

“시그루드냐?”

“절······ 못 알아보시겠습니까?”

지크 후작의 장자인 시그루드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자그마치 구 년이다. 물론 구 년 전에도 이미 시그루드는 한 명의 성인으로서 지금과 크게 다르지 않았지만 갖은 고생이 함께한 여정이었으니 그의 얼굴을 잊어먹더라도 이상한 일은 아닐 것이다.

“그럴 리가 있느냐.”

편지와 똑같은 이유로 가족들의 얼굴이 그려진 그림조차 가져가지 않았다. 그러나 아버지가 어찌 아들을 몰라볼까. 영지를 떠날 때만 하더라도 갓 성년이 되었던 아들은 장성하여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있었으나 풍기는 분위기가 조금 더 점잖아졌을 뿐, 그의 기억 속의 아들과 별다른 차이가 없는 얼굴이었다.

“아버지.”

“······시그니구나.”

그러나 그런 지크 후작도 그 동안 그에게 편지를 보내왔던 딸의 모습에 큰 위화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그가 영지를 떠날 때, 시그니는 열 살을 갓 넘긴 어린 소녀였을 뿐이었다. 그러나 지금 마주한 그녀는 언제 결혼을 하더라도 이상하지 않은 여성이 되어 있었으니 어색함을 느낄 수밖에.

“왜 이렇게, 왜 이렇게 늦게 오셨어······요.”

어색함을 느끼는 건 시그니도 마찬가지. 그러나 둘에게는 어색함을 느낄 시간도 없었다. 여기서 낭비할 시간이 없었으니까.

“어서 가요. 어머니께서 기다리고 계세요.”

구 년이 지났으나 저택의 외견은 그가 떠날 때와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내부의 모습은 꽤나 많은 것이 변해 있었는데 그 중에서도 변하지 않은 곳이 있었으니 그의 방만큼은 그의 기억 속의 모습과 똑같았다. 매일같이 청소가 이루어졌는지 먼지 한 톨 보이지 않았지만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는 않았다.

“언제부터냐.”

“병을 앓으신 지는 삼 년이 조금 넘었습니다. 그리고 쓰러지신 지는 한 달 정도 되었습니다.”

그 물음에 시그니가 지크 후작을 원망스럽다는 듯 쳐다봤다. 그 동안 그녀가 보낸 편지를 한 번도 읽지 않았다는 뜻이었으니까. 그러나 지크 후작은 그 눈길에 답해줄 여유가 없었다. 죽은 듯이 누워있는 아내의 모습만이 눈에 들어왔으니까.

‘구 년 만이오.’

자그마치 구 년만의 재회였다. 중년의 나이를 믿을 수 없었던 얼굴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는 없었는지 혹은 그 만큼 투병 생활이 고통스러웠던 것인지 나이에 알맞은 얼굴로 변해있었으며 흰 머리도 숨기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젊은 시절 유일하게 사랑했던 얼굴임에는 변함이 없었다.

“······다들 나가 있거라. 잠시 혼자 있고 싶구나.”

“예. 무슨 일이 있으시면 바로 부르십시오. 바로 달려오겠습니다.”

모두가 빠져나간 그 방에서 지크 후작은 하염없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해가 저물고 밤이 될 때까지도 지크 후작은 그녀의 곁에서 떨이지지 않았다. 마치 그 동안 만나지 못했던 시간만큼 지금이라도 붙어있겠다는 듯, 그러나 조금 늦은 결정이었던 것일까.

이제까지와 다른 방향의 일방적인 기다림이었다. 그렇게 며칠이 흐르는 동안 매일 아침 빼먹지 않던 수련도 하지 않으며 거의 모든 시간을 그녀의 곁에서 떠나지 않았다. 그리고 그녀의 기다림이 오랜 세월을 기다린 끝에 끝난 것처럼 그의 기다림에도 끝이 찾아왔다.

늦은 밤, 모두가 잠에 들었을 시간에도 지크 후작은 아직 잠에 들지 않고 있었다. 그 동안 보지 못했던 것을 지금이라도 보겠다는 듯 그녀를 뚫어져라 쳐다보던 그는 문득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달빛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착잡한 그의 심정과는 다르게 오늘따라 유달리 달빛이 밝았다.

“당신······이에요?”

들릴 리 없는 목소리. 구 년 만에 듣는 목소리였지만 조금도 낯설지가 않았다. 왜냐, 항상 그가 힘들 때면 머릿속으로 되뇌던 목소리였으니까. 변해버린 딸의 모습은 낯설지 몰라도 그녀의 목소리만큼은 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조금도 변하지 않고 그를 맞이했다.

“정신이 드오?!”

“······네. 오래 기다리셨나요?”

“며칠 안 되었소. 당신이 날 기다린 것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잠시만 기다리시오. 아이들을 불러올 테니.”

“잠시만, 잠시만 이렇게 있어요. 당신이랑 하고 싶은 말이 많아요.”

그녀가 깨어나기만을 저택의 모든 이들이 기다리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녀와 그의 재회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 또한 마찬가지. 최고의 상황 속에서 두 사람은 그렇게 둘 만의 시간을 가졌다.

“미안하오. 당신이 이런 모습일 줄은 몰라서, 아니 알았다 하더라도 오지 않았을 것이기에 더욱 미안하오.”

“······괜찮아요. 당신은 당신의 일에 최선을 다했을 뿐이니까, 그런 당신이기에 내가 사랑했던 거니까. 마지막에라도 이렇게 얼굴을 보여줘서 정말 고마워요.”

“누가 당신 딸 아니랄까봐 시그니가 대담하게 행동했지. 내가 움직이지 않는다고 황제 폐하를 움직일 줄이야. 나로서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오.”

둘은 그 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풀겠다는 듯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눴다. 주로 그가 이야기를 하는 쪽이었으며 그녀가 이야기를 듣는 쪽이었다. 만약 지크 후작에 대해 아는 이가 이 광경을 봤다면 믿지 못하고 두 눈을 비비거나 귀를 의심했을 것이다. 지크 후작은 결코 말을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렇게 둘은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대화를 나누었고 마지막에 다다라서야 시그루드와 시그니를 불렀다. 어머니가 깊은 잠에서 깨어났다는 기쁜 소식에 잠옷 바람으로 허겁지겁 달려온 그들의 모습은 후작가의 후계자와 영애의 모습이라고 하기에는 기품이 없었지만 그 누구도 그들의 모습에 신경 쓰지 않았다. 그런 건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어머니!”

아버지와 어머니, 아들과 딸. 한 가족이 구 년 만에 모두 모여 이야기를 나누는 순간이었다. 가문의 모든 이들이 그 만남을 방해하지 않기 위해 최선을 다했고 오랫동안 가문을 위해 일해 온 이들은 흘러내리는 눈물을 소매로 닦기도 했다.

그 날 밤부터 아침과 점심, 저녁까지 한 가족은 모든 것을 함께했다. 거기에 며느리와 손자까지, 너무나 긴 시간의 괴리로 인해 중간 중간 어색할 수 있는 상황도 있었지만 전체적인 분위기에는 조금의 영향도 줄 수 없었다. 그 누구도 그런 어색함을 이유로 지금의 평온을 깨트리고 싶지 않았으니까.

그러나 영원한 것은 있을 수 없는 법. 아무리 긴 기다림도 시간이 지남에 따라 끝이 찾아오는 것처럼 행복에도 끝이 찾아올 수밖에 없었다. 후작 부인이 눈을 뜬 지 이틀째가 되던 날 아침, 그녀는 조용하게 가족들의 품에서 세상을 떠났다. 마치 그 동안 버텨온 것은 오직 어제를 위해서라고 말하듯.

추적추적-

하늘도 그녀의 죽음을 슬퍼하듯 비가 내렸고 성벽 위에는 가문의 상징이 새겨져있는 깃발대신 검은 천이 올라왔다. 한평생을 나라를 위해 살아온 지크 후작이 사랑했었던 사람답게 그녀 또한 자기만 생각하는 여타 귀족들과는 비교를 불허했기에 영지 전체가 슬픔에 잠겼다.

#

그녀의 장례식은 조용히, 그러나 성대하게 열렸다. 지크 후작은 제국에서도 세 명 밖에 없는 마스터 중 한 명이었으며 지크 영지 자체도 제국 동부에서 한 손에 꼽히는 대 영지였으니만큼 안주인의 장례식에 오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제국 남부의 대귀족인 아르센 공작도, 또 다른 마스터 중 한 사람인 권터 후작은 맡고 있는 임무가 임무이니만큼 본인은 오지 못했지만 아들을 보내어 남은 가족들을 위로했다. 그러나 이 사람의 등장에는 모두가 빛이 바랠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야기는 나누었나?”

“예. 모두 황제 폐하의 은혜 덕분입니다.”

귀족들이 죽는다하더라도 황제가 직접 움직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런데 후작 본인도 아닌 후작 부인의 장례식에 황제가 직접 찾아왔다는 건 둘 사이의 관계가 얼마나 각별한지를 알려주는 것과도 같았다.

“······미안하네. 내 명령이 아니었다면 자네가 영지를 떠나있을 이유도, 마지막이 되어서야 부인을 만날 수 있었던 일도 없었을 것을. 믿을 수 있다는 이유만으로 자네를 너무 혹사시켰어.”

“말씀을 거둬주십시오. 혹사라니요. 모두 제가 원해서 한 일이었으며 제국을 위한 일이었습니다.”

황제의 방문에 지크 후작은 시그루드에게 손님들의 접대를 맡긴 후 황제와 단둘이 이야기를 나눴다. 그 대화 중 황제는 후작 부인의 부고 소식을 듣고 이 곳으로 오며 생각한 말을 꺼냈다.

“테라 방벽으로 돌아가지 말고 이 곳에 머물게.”

“폐하. 그게 무슨 말씀······.”

“자네는 그 동안 많은 일을 했어. 다행히 퐁크 후작이 열심히 한 덕에 테라 방벽의 방어에는 큰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 그러니 남은 시간은 가족들과 보내도록 하게.”

지크 후작은 황제를 위해, 제국을 위해 수많은 일을 해왔다. 그가 당장 일선에서 물러난다면 제국의 상황이 조금 더 빡빡해지겠지만 감내하지 못할 수준은 아니었다. 그리고 그것이 황제가 지크 후작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를 위한 제안을 단호히 거부했다.

“제가 더 이상 검을 휘두를 수 없게 되는 그 날까지, 더 이상 두 다리로 설 수 없게 되는 그 날까지 제국과 황제 폐하를 위해 이 한 몸 다 바치겠다고 기사 서임식 때 맹세했습니다. 그 서약을 받아주신 것 또한 폐하이신데 어찌 말을 번복하십니까.”

“자네는 충분히 할 만큼 했어. 남은 가족들도 생각을 해야지.”

이어진 황제의 말에 지크 후작이 과거를 회상했다. 오래 된 과거도 아니었다. 그녀가 세상을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그에게 한 말을 생각한 것뿐이었으니까.

[당신은 당신이 해야 하는 일을 해요. 괜히 나 없다고 침울해져서 틀어박히지 말고. 내가 사랑한 당신은 그런 모습이 정말 안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어차피 아비 노릇도 제대로 못해본 사람이 남아봤자 기존의 사람들만 어색할 뿐입니다. 영지도 시그루드가 잘 경영하고 있고 이 곳에 제가 남아있을 자리는 없습니다. 제가 있어야 할 자리는 이 곳이 아닌 북쪽에 있으니까 말입니다.”

“이 사람······.”

황제가 안타깝다는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나 그 말 속에 견고한 의지가 담겨있었기에 차마 말릴 수가 없었다.

황제로서 명령한다면 받아들이겠지만, 황제로서는 그가 테라 방벽으로 향하는 것이 이득이었으니 황제로서 이 곳에 남으라 할 수는 없었다.

황제로서의 책무를 벗어던지는 일이었으니까. 그렇기에 오래된 친우로서 그를 설득했던 것인데, 아무래도 친구의 입장에서는 그를 설득하기 어려울 듯싶었다.

그렇게 모든 사람들을 슬프고 안타깝게 했던 장례식이 끝났다. 그리고 장례식이 끝난 다음 날.

“오늘부터 네가 가문의 진짜 가주다. 가족들은 물론이거니와 위로는 황제 폐하와 제국을 위해, 아래로는 백성들을 위해 모든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다. 잘 할 수 있겠느냐?”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 시그루드, 아버지 아들입니다.”

“그래 그렇게 말해주니 믿음이 간다. 그리고······시그니.”

“듣고 있어요.”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거라. 주변의 눈치를 볼 필요는 없다. 결혼과 같은 중대사는 시그루드와 신중히 상의하여 결정하도록 해라. 그러나 가장 중요한 건 네 의지다.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느냐?”

“······네. 명심할게요.”

“그래. 다시 만나자꾸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크 후작은 영지를 떠나 테라 방벽으로 향했다. 그녀가 사랑했던 그 모습을 위해서.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3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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