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1화 - >
지원군이 테라 방벽을 향해 머나먼 길을 걷고 있을 때쯤 황명에 의해 퐁크 후작에게 지휘권을 양도한 후 테라 방벽을 떠났던 지크 후작 또한 수도에 도착했다.
제국에서도 몇 없는 후작의 이동이었기에 성대할 만도 하건만 일행의 구성은 매우 단출하기 짝이 없었는데 테라 방벽의 방어를 위해 많은 숫자를 뺄 수 없었던 것이 첫 번째 이유였으며 빠른 이동을 위해 일부러 소수만 데리고 온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그렇게 쉴 세 없이 말을 달려 수도에 도착한 지크 후작은 곧바로 황제를 만났다.
“신 지크문트 지크,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도착했나이다.”
“생각보다 빨리 왔군. 어디보자, 이렇게 얼굴을 맞대는 것이 얼마만인지 모르겠군.”
“오 년 전, 황제 폐하께서 병사들을 위로하기 위해 친히 걸음을 하셨으니 사 년 만에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신의 불충을 용서하여 주십시오.”
“불충은 무슨. 내 명령을 수행하기 위해 한 시도 부임지를 떠나지 않은 것을 불충이라 한다면 나에게 충성을 다하는 사람은 제국에 아무도 없겠군.”
짧은 대화로 몇 년 만의 회포를 대신한 둘.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기에 앞서 황제는 방 안에 있던 호위들을 모두 내보냈다.
지금부터 나눌 이야기는 다른 이들이 들어서 좋을 것이 없었기에. 황제의 호위들은 모두 물러가라는 말에 머뭇거렸지만 지크 후작을 의심하는 것이냐는 황제의 말과 계속된 명령에 어쩔 수 없이 방 바깥으로 물러나 침입하는 이들이 없도록 철통 경계에 돌입했다.
“폐하.”
“왜 퐁크 후작을 보냈냐는 말이겠지?”
“······그렇습니다. 차라리 권터 후작을 올려 보내셔야 하셨습니다.”
북부에 지크 후작이 있다면 남부에는 권터 후작이 있다. 지크 후작이 몬스터를 막아내는 제국의 방패라면 권터 후작은 제국을 노리는 인간들에게 휘둘러지는 칼이었다.
그러나 권터 후작이 없더라도 당장 전쟁이 벌어지지는 않는다. 오랜 시간 평화가 지속되었고 제국의 전력 또한 충분히 강성했으니. 그런 상황에서 권터 후작 대신 퐁크 후작을 올려야 했느냐, 지크 후작은 그리 묻고 있었다.
“내 결정이 잘못 되었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다만 권터 후작이 올라오는 편이 조금 더 최선의 선택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뿐입니다.”
“퐁크 후작은 확실히 지휘관으로는 적합하지 않은 인물이지.”
지크 후작이 아는 것을 황제가 모를 리 없었다. 아니, 더 잘 알 수밖에 없었다. 검을 휘두르는 자야말로 언제 어떤 검을 휘둘러야 하는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어야만 했으니까. 그런 의미에서 황제가 생각하기에 퐁크 후작은 몬스터를 상대로 휘둘러질 검으로서 생각처럼 나쁜 성능의 검이라고 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가장 앞에 서서 싸우는 것으로는 그를 따라올 사람이 없는 것도 사실이야.”
“테라 방벽은 단순히 잘 싸워서 지켜낼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
“부족한 부분은 자네 밑의 부하들이 잘 채워줄 것이네.”
“······하지만.”
“자네가 뭘 걱정하는 지 잘 알아. 하지만 나는 충분히 퐁크 후작이 제 역할을 해줄 것이라고 믿네.”
황제 또한 테라 방벽이 얼마나 위험한 곳인지 잘 알고 있었으며 마스터란 존재 없이 테라 방벽을 지키기에는 테라 방벽에 주둔하고 있는 전력이 부족하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만약 충분했다면 마스터라는 존재를 그런 곳에 묶어두지 않았을 테니, 그만큼 지크 후작이 맡고 있는 역할 또한 막중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황제는 퐁크 후작이 충분히 지크 후작을 대신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길게는 무리더라도 지크의 대타 정도는 충분하다.’
황제가 생각하기에도 퐁크 후작은 지휘관으로서는 낙제에 가까웠다. 만약 인간과 인간의 전쟁이었다면 아무리 상황이 급해도 퐁크 후작에게 지휘권을 맡기지는 않았을 것이다. 퐁크 후작 본인은 상대가 함정을 파든 무슨 수를 쓰든 간에 오직 검 한 자루로 당당히 정면에서 돌파할 수 있겠지만 그를 따르는 부하들은 아니었으니까.
그러나 테라 방벽은 인간과 인간이 아닌 인간과 몬스터의 전쟁. 그럴 일은 없겠지만 몬스터가 함정을 파더라도 상관이 없었다. 방벽이라는 든든한 방어막이 있었으니까. 더불어 지크가 걱정하고 있는 점에서도 아예 감안하지 않은 것이 아니었다.
‘처음에는 제멋대로 굴겠지만 결국 지크의 방식을 따라하게 될 터.’
이렇게 생각한 이유는 단순히 감 따위의 불확실한 요소가 아니었다. 퐁크 후작의 모든 것을 기반으로 한 예측이었지. 그가 가진 무(武)에 대한 자부심은 결국 그를 최선의 길로 움직이게 만들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말게. 퐁크 후작 또한 자네와 같이 내가 휘두를 수 있는 검 중 한 자루야. 더불어 자네의 부하들을 믿지 못하는 건가?”
“······믿습니다.”
“바로 그거네. 상관으로서 부하를 믿어야 할 때도 있는 법이야.”
황제가 저렇게까지 말하는데 더 이상 물고 넘어질 수는 없었다. 그의 말처럼 부하들을 믿고, 황제의 안목을 믿는 수밖에. 가장 중요한 일을 어떤 식으로든 마무리를 짓자 지크 후작의 용건은 그 다음으로 넘어갔다.
문제가 생길 것을 각오하고서라도 퐁크 후작을 테라 방벽으로 보내며 그를 수도로 불러들인 이유. 퐁크 후작이 가져온 교서에는 지휘권을 양도하고 빠른 시일 내에 수도로 올라오라는 말밖에는 적혀있지 않았으니 지크 후작으로서도 이유를 알지 못했다.
“그렇다면 제가 해야만 하는 일이 무엇입니까.”
한평생 황제를 위해 궂은일을 해왔던 지크다. 일부러 그를 불렀다면 분명 그만이 할 수 있는 일일 터, 어떤 난제가 주어질지 적당한 긴장과 함께 황제의 입에서 나올 말을 기다리고 있을 때 알고는 있었던, 하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즉시 지크 영지로 향하게. 그리고 내가 다시 부를 동안은 영지에서 가족들과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알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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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회가 새롭다. 불과 일 년 전 나도 저런 얼굴을 하고 있었던 건가. 왜 선배들이 섣불리 신입들과 어울리려 하지 않았는지 잘 알 것만 같았다. 그도 그럴 것이 저렇게 죽을상을 하고 있으면 나 같아도 어울리기 싫었을 거다. 나에게까지 절망이 전염될까봐.
“자네들이 이번에 지원을 온 마법사들인가 보군. 반갑네. 테라 방벽의 수석마법사를 맡고 있는 원더라고 하네. 내 얼굴을 아는 이들도 있을 것이고 처음 보는 이들도 있겠군.”
“장로님을 뵙습니다!”
이제는 잘 기억나지도 않는 일 년 전의 광경이 그대로 재현된다. 차이점이라면 신입의 숫자들이 꽤나 많다는 것.
그도 그럴 것이 이번 해에 마법사들의 손실은 작년의 두 배에 달했으니 1개조 20명, 총 3개조 60명에 달했던 마법전력은 숫자로만 따진다면 간신히 2개조를 유지할 수 있을 정도로 줄어들었다.
당연히 더 많은 충원이 없다면 곤란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것 뿐만은 아닌 황제와 마탑 간의 교섭이 끝이 났는지 마정석 광산의 조사를 위해 따로 마법사들이 파견을 나오기도 했다.
“저들 중 내년 이 날에 몇 명이나 살아남을까요?”
“글쎄, 작년 동기들이 총 네 명 살아남았으니······. 여덟 명 살아남으면 우리와 비슷하겠네.”
열 명 중 네 명. 생존율 40%. 고작 일 년 만에 여섯 명이 죽었다. A조에서는 나와 로랑이 살아남았고 다른 두 조에서 각각 한 명씩이 살아남았다. 이번 년도가 특히나 많은 사상자를 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마정석의 보급으로 스콜피온이 실전 배치된다는 것을 감안하고 그 외의 요소들까지 고려한다면 올해보다 높으면 높았지, 낮지는 않을 터였다
“자, 그럼 나머지는 각 조의 조장들에게 맡기고 이 늙은이는 이만 물러나지.”
잔뜩 긴장한 모습의 신병들이 뿔뿔이 흩어져 각 조가 위치한 곳으로 찾아온다. A조에 배정된 신입들은 여덟 명. 그 중에는 나보다 나이가 적은 이는, 아니 이번 신입 마법사를 통틀어도 나보다 나이가 적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반갑다. A조 조장을 맡고 있는 일드 넬거다. 얼마나 볼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이 곳에 있는 동안 잘 부탁한다.”
“마리오입니다.”
“단테입니다.”
“마르코입니다.”
그 뒤로 신입 마법사들의 소개가 끝난 후, 모든 것이 비슷하게 흘러갔다. 아직 인정받지 못한 이들과 어울릴 생각이 없다는 듯 사라졌다. 그러나 다른 점이 한 가지 있다면 뿔뿔이 흩어지는 것이 아닌 한 곳을 향해 달려갔다는 점이다.
마정석.
누군가에게는 지원군보다도 더 기다리고 있었던 마정석이 원더와 마탑에서 파견 나온 마법사들의 감독 아래 창고에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오래도 기다렸다.”
“실전 테스트 기간까지 합치면······. 반 년 가까이 됐네.”
“다음부터는 전투 양상이 조금 달라지겠는데.”
“글쎄. 많기는 하지만 막 쓸 수는 없잖아. 아직 광산이 개발되어 시시각각 보충되는 것도 아니고, 여유로울 때 아껴 사용해야 정말 필요할 때 안 부족하지.”
그래도 모두의 눈에 기대감이 서렸다. 황색경보는 규모를 봐야겠지만 적색경보가 울릴 것 같은 규모에는 반드시 사용할 테니까. 사실 몬스터의 규모에 따라 피해 규모가 하늘과 땅 차이로 벌어지는 만큼 자잘한 공격에는 스콜피온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피해 규모는 크지 않았다.
“자자, 일단 스콜피온부터 방벽 위로 올리자고. 진짜 실전에서 사용해봐야 한 번의 전투에 소모량은 어느 정도인지, 어느 정도 규모 이상에서 사용해야 할지 감을 잡을 거 아니겠어?”
지원군의 도착으로 인해 인원 배치, 물자 분배 등등 안 그래도 바쁜 테라 방벽이 한층 더 분주해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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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입니다. 레닐 군. 시연회 이후 한 달 만인가요?”
“예. 한 달 만입니다. 그 동안 무탈하신 것 같아 다행입니다.”
“하하. 그런가요. 사실 무탈하진 못했습니다. 워낙 많은 일들이 있었던 터라, 그래도 무탈하게 보인다니 다행이군요.”
그러나 나는 그 분주함에 끼지 못했다. 나에게는 따로 할 일이 주어졌다. 파견 나온 마법사들의 총 책임자인 에반과 마정석 광산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 최초 발견자라는 이유도 있겠지만 어째서인지 마정석 광산에 관해서는 다들 내게 일임을 해버렸기 때문에. 어쩌면 자신들은 고생하지 않고 달콤한 과실만을 챙기고 싶다는 이기적인 욕구일지도 몰랐다.
“지금까지 종합된 정보들을 알려 주시겠습니까. 보고는 받았지만 그 사이 달라진 것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요.”
사실 마정석 광산에 대해서는 반쯤 답보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지휘관의 교체로 인해 혼란스럽기도 했을 뿐더러 여러 사람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해봤자 명확한 해답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내가 에반에게 말해줄 수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뿐이었다.
“아무래도 평범한 채굴 방식으로는 개발의 시작조차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예?”
아마 에반의 머릿속에서는 무슨 소리냐는 생각으로 가득할 거다. 평범한 방식으로는 안 된다니? 그러나 테라 방벽의 마법사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린 결론은 분명했다. 뭔 짓을 하더라도 몬스터들의 대지 한복판에 자리한 반경 수백 미터에 달하는 광산을 지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고. 배보다 배꼽이 더 커질 것이라고.
“광산 채굴에 대해 저희가 구상한 방식은 이렇습니다. 한 번 들어보시겠습니까?”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1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