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0화 - >
세상에는 기책이라는 것이 있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남들이 흔히 생각할 수 없는 기묘한 꾀’ 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며 보통 불리한 상황을 단번에 뒤집을 수 있는 계책을 말하는 단어였다. 그러나 애석한 말이지만 나에게 그런 기책은 없었다.
기책이라는 것도 상황이 기가 막히게 맞아 떨어져야 나오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상황은 어떤가. 상황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사람이 제 하고 싶은 대로 힘을 휘두르다보니 발생한 상황이 아닌가. 이러니 기책은 있을 수가 없었다. 있다면 대책이 있을 뿐.
“우선 다들 생각하셔야 할 것은 길게 볼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신병들과 마정석이 일차적으로 도착하기까지는 길어야 한 달. 그 한 달 동안만 피해를 최소한으로 줄일 수 있다면 충분하다는 거죠.”
“그러다가 이런 일이 또 벌어지면.”
“그건 그 때가서 생각해볼 일이겠죠. 지금보다 상황이 좋을 수도, 나쁠 수도 있을 테니까요. 스콜피온이 제대로 실력 발휘만 해준다면 나빠질 것 같지는 않지만요.”
한 달. 길어봤자 한 달이다. 지금 테라 방벽의 머리들이 모여 회의를 하고 있는 이유는 간단했다. 퐁크 후작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하고 있는 탓에 평소보다 많은 숫자의 상위종을 상대했기에 피해가 늘어나고 있다는 것.
한 달만 지나면 지금도 창고에서 햇빛을 볼 날만 기다리고 있는 스콜피온들이 활약할 수 있을 테고 실전 테스트에서 보여줬던 위력만 보여주더라도 지크 후작이 돌아오기 전까지 평소와 같은 피해를 혹은 더 적은 피해로 버틸 수 있을 테지만.
“그건 맞지.”
“스콜피온처럼 새로운 병기가 탄생할 지도 모를 일이고.”
스콜피온의 위력은 모두가 인정했다. 수십 번의 실전 테스트를 거치면서 한두 번 봐온 것이 아니었으니까. 그러자 다들 얼굴이 조금씩 밝아졌다. 지크 후작이라는 절대적인 무력의 도움 없이 버텨낼 방법이 아닌 한 달 정도만 버텨낼 대책을 마련하는 것은 난이도가 훨씬 낮았으니까.
“그래서 어떻게 하자는 거야? 단기적으로만 생각한다면 써먹을 방법들이 없는 건 아니지만 시간이 부족해. 당장 내일 아침 몬스터들이 쳐들어와도 이상하지 않다는 건 너도 잘 알고 있을 테고.”
“우선은 할 수 있는 일부터 해봐야겠죠. 아무리 빨라도 당장 내일 아침부터 효과를 볼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
현 상황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방법은 누가 뭐라고 해도 퐁크 후작을 움직이는 일이었다. 어차피 지크 후작도 전투 시에 직접적으로 지휘를 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그럴 능력은 충분했지만 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단순히 숫자로 밀고 들어오는 적을 상대로는 정면으로 맞부딪치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퐁크 후작 또한 마찬가지다. 그럴 능력이 있음에도 하지 않는 것과 그럴 능력이 없어서 못 하는 것에는 큰 차이가 있었지만 하지 않는다라는 점만 놓고 본다면 똑같았으니까.
테라 방벽의 방위에 있어 지크 후작에게 의지하던 부분은 모든 상위종을 혼자서 사냥할 수 있는 무력과 동에 번쩍 서에 번쩍할 수 있는 기동력이었으니 오히려 그 점만 따지고 본다면 퐁크 후작의 활약을 기대할 수 있었다.
물론 그러기 위해서는 퐁크 후작이 자발적으로 움직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지만. 그리고 그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두 발로 뛰고 있었다.
“역시 퐁크 후작님이더라도 지크 후작님을 대신하기에는······.”
“지크 후작님이 더 대단하시지. 일부러 위험한 몬스터만 쫓아다니시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않나?”
그 날부터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이 천천히 테라 방벽을 떠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누구로부터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소문의 내용이 가리키는 사람은 퐁크 후작이었다.
퐁크 후작은 무능하다.
퐁크 후작의 실력은 지크 후작에 비해 떨어진다.
퐁크 후작이 겁을 먹었기에 일부러 만만한 몬스터만 사냥한다.
병사들은 퐁크 후작에게 들리지 않도록 조심했다지만 테라 방벽 전체에 소문이 퍼졌으니 보통 사람보다 수십 배는 예민할 퐁크 후작에게 들리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쾅-
“누가 감히 그딴 개소리를!”
그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에 퐁크 후작이 분노했다. 당연한 일이다. 지금 그를 이 자리에 올려준 것은 그가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고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 검을 휘둘렀기 때문이었다.
그런 만큼 스스로의 실력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자신이야말로 제국 제일의, 아니 제국을 넘어 세계 제일의 검이라고. 그의 성격상 자리에 연연할 리는 없었지만 그의 자부심을 건드리는 소문이 퍼지고 있으니 신경 쓰지 않을 수가 없었다. 비교당하는 이가 황제의 세 자루 검이라며 같이 묶이고 있는 지크 후작이라면 더더욱. 그리고 그게 내가 노리던 점이었다.
‘사람이라면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겠지. 퐁크 후작이라면 더더욱.’
결코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퐁크 후작이 어떤 사람인지 파악하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일단 마법사들은 독서가 하나의 습관인 사람들이었으며 제국 곳곳에서 모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제국의 중요 인물 중 한 사람인 퐁크 후작에 대한 정보가 없을 리가 만무했다.
퐁크 후작은 본래 이름조차 알려지지 않은 기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원래대로였다면 아버지의 길을 따라 지방 영주의 가신으로서 살았을 운명이었겠지만 그의 압도적인 재능과 노력은 그를 진흙 속에 묻혀있는 상황에서도 반짝반짝 빛이 나게 만들었다.
즉 이 자리까지 올라올 수 있었던 이유는 오직 그의 실력 덕분이었으니 자신의 모든 것이라 할 수 있는 것이 의심받고 평가절하는 당하는데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면 애당초 테라 방벽에서 이렇게 제멋대로인 행동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 점이 이런 속보이는 짓을 할 수 있는 배경이었다. 그런 배경을 가진 탓에 그는 머리 쓰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고 덕분에 이렇게 자신을 대상으로 한 소문이 퍼지고 있음에도 주동자를 찾아내어 처벌한다는 생각보다는 소문을 믿는 이들에게 자신의 본 실력을 내보여 입을 닥치게 하겠다는 판단을 내릴 인물이었으니까.
그 판단은 실제로 적중했다. 실제로 다음 전투부터 퐁크 후작의 움직임이 조금 더 넓어졌으니까. 그러나 소문은 여전히 떠돌았다.
우리들이 소문을 계속해서 퍼트리고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퐁크 후작이 상위종 위주로 사냥을 했음에도 여전히 지크 후작이 있을 때보다 피해가 컸기 때문이었다. 없는 소문을 만들어내는 것도 어렵지만 한 번 퍼진 소문을 수습하는 것은 더 어려운 일이었으니까.
근 십 년에 가까운 노하우를 가지고 보다 자신이 필요한 곳을 빠르게 판단하여 움직이는 지크 후작과 단순히 덩치 크고 위협적일 것 같은 몬스터를 찾아 이동하는 퐁크 후작의 활약에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고 퐁크 후작의 드높은 자부심은 결코 그 차이를 용납하지 못했다.
부글부글-
검고 붉은 기운이 방문을 통해 세어 나왔다. 복도가 조금 흔들리는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몸이 좀 무겁게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단순히 기분이 나쁜 것만으로도 주변에 이 정도 영향을 주는 건가.’
진심으로 분노라는 감정을 가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마스터라면 단순히 육체적인 수양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도 보통 사람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단단하다는 이야기니까. 그러나 기분 정도는 나쁘겠지. 소문의 입을 닥치게 만들겠다는 자신의 목표를 아직도 지키지 못하고 있었으니까.
똑똑-
“후작 각하. 일전에 말씀드렸던······.”
“들어와!”
아, 방금 했던 생각은 취소. 생각보다도 더 자존심이 상했나보다. 문을 열고 의자에 앉아있는 퐁크 후작. 그의 존재감은 시선을 향하는 것만으로도 눈이 아파질 정도로 강렬했으며 몸이 긴장으로 인해 얼어붙을 정도였다.
반년도 더 된 일인 지크 후작의 검이 내 목을 향해 휘둘러졌을 때를 떠올리게 할 만큼. 그래도 그 때보다는 지금이 낫다. 그 때는 기세가 오로지 나를 향해 쏟아졌다면 지금은 기세의 범위 안에 들어온 것뿐이었으니까.
“뭐야!”
“이전에 말씀드렸던 아티팩트가 완성이 되어서······.”
“아티팩트?”
회의가 있었던 날 직후 퐁크 후작에게 말했다. 그러나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을 것이다. 필요 없는 물건이라고 생각했을 테니까.
“몬스터의 위치를 실시간으로 표시해주는 지도입니다.”
내가 퐁크 후작에게 주려고 하는 것은 지도(地圖)의 개량판이었다. 여전히 두 개의 각인을 동시에 새기는 것은 무리였기에 마력의 유무와 많고 적음을 표시하는 데는 마법의 힘을 빌려야 했지만 그렇기에 진정한 개량형이었다. 오직 생명체의 마력 반응만을 표시할 수 있었으니까.
“그런 게 있다고?”
“예. 여기 있습니다.”
이걸 퐁크 후작에게 준 이유는 간단하다. 그가 조금 더 활약을 해줘야 했기에. 회의가 있었던 날 이후로 비효율을 이유로 사장되었던 각종 방법들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약 한 달만 버티면 된다는 조건 덕분이었으나 결국 한계는 명확할 수밖에 없었다. 효과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애초에 사장된 데에는 사장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존재했으니까.
그러니 조금 더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라도 퐁크 후작이 더 열심히 현장을 뛰어줘야 했다. 그것이 자의가 되었든 자의라고 생각하는 타의가 되었든 간에.
#
확실히 그 날부터 퐁크 후작의 움직임이 달라졌다. 대충 정리했다싶으면 지도를 본 뒤 마력 반응이 많은 곳으로 향해 또 다시 검을 휘두르면 될 일이었으니까. 격렬한 전투 도중에 테라 방벽 전체를 확인할 정도로 마력을 퍼트리는 것은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으나 퐁크 후작에게는 그다지 문제 될 것이 없는 모양이었다.
“대단하네요.”
“글쎄, 난 네가 더 대단하게 보이는구나.”
“에이. 이게 어디 저 혼자 한 일인가요. 저 지도를 만드는 것도 선배들의 도움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텐데요.”
각인을 통해 다방면에서 활약할 수 있을지언정 순순하게 마법적인 지식에서는 아직 나는 많은 면에서 부족했다. 그래서 이번 가을 원정을 떠나기 전에 완성하려했던 지도의 개량형도 결국 선배들의 도움을 받아야만 했으니.
“천적이네요.”
순수하게 전투에서의 기량만을 따진다면 퐁크 후작이 지크 후작보다 뛰어났다. 물론 그 외적인 부분 - 부하들의 신뢰, 지휘력 등 - 에서는 지크 후작이 한 수, 아니 몇 수는 앞서고 있었지만.
‘처음부터 저렇게 해줬으면 얼마나 좋아.’
지도는 각 기사단장들과 마법조장들에게도 배포가 되었다. 그들은 전투뿐만 아니라 실질적으로 지휘를 맡고 있기도 했으니까. 덕분에 병사들과 기사들의 움직임이 한결 재빨라진 듯, 오늘의 피해는 지크 후작이 있을 때와 비교해도 낮다고 볼 수 있는 정도였다.
“또 알게 모르게 소문을 내야겠네요. 채찍을 내리쳤으면 당근도 줘야 하는 법이니까.”
“퐁크 후작을 말처럼 취급하는 녀석은 네가 처음일거다.”
“폭탄이죠.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 아마 소문의 근원지가 저라는 걸 알면 당장 제 목부터 벨 사람이에요.”
그렇게 한 달의 시간이 흘렀고 내가 테라 방벽에 도착한 지 약 일 년 째 되는 날, 내가 테라 방벽에 도착했던 것처럼 이번 년도의 신병들이 테라 방벽에 도착했다. 작년보다 조금 더 큰 규모의 지원과 함께. 문득 작년에 우리들을 바라보던 선배들이 생각이 어땠을 지를 체감할 수 있었다. 물론 지난 일 년에 비해 앞으로의 일 년은 보다 편하겠지만 편해봤자 지옥일 테니.
“Good Luck.”
행운을 빕니다. 여러분.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30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