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9화 - >
실력은 확실하다. 성격과 태도는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사적인 감정을 배재하고 생각했을 때, 어쩌면 그보다도 실력 면에서 반 수 정도는 위인 사람이 퐁크 후작이었다. 그러나 테라 방벽을 퐁크 후작에게 맡길 수는 없었다.
‘어째서 황제 폐하께서는 이런 놈에게 나를 대신하라고 보내셨단 말인가!’
차라리 남부의 검을 올려 보냈다면 안심하고 수도로 올라갈 수 있었을 텐데. 그가 판단하는 퐁크 후작은 세계 제일의 돌격대장은 될 수 있을지언정 지휘관으로서는 자격 미달인 인물이었다.
“자자, 그렇게 너무 노려보지 말자고. 일단 명령을 받은 이상 나도 최선을 다해 몬스터의 숫자를 줄여 볼 테니까 말이야.”
“······정말로 황제 폐하께서 네 놈에게 나를 대신하라고 하셨단 말이냐?”
“그러면 내가 이 곳에 오고 싶어서 명령서를 위조라도 했다는 건가? 내가? 왜? 차라리 그럴 시간에 잠이라도 한 시간 더 자고 말지. 사람이 변방에 오래 있다 보니 괜한 의심만 늘었어.”
빠드득-
그러나 가지 않을 방도가 없었다. 명령서에 찍혀있는 도장은 의심할 데가 없는 진품이었으며 서체 또한 그가 착각할 수 없는 황제의 서체가 분명했다. 사정이 어떻게 되었든 앞으로 한동안 테라 방벽의 지휘관은 그가 아닌 퐁크 후작이었다.
“아하! 내가 너무 잘 싸워서 더 이상 네가 필요 없어질 것 같아서 그러나? 푸하핫. 걱정하지 말라고. 네가 돌아오면 뒤도 안돌아보고 영지로 돌아갈 테니까.”
잘 싸우긴 할 것이다. 미친 듯이 싸우겠지. 그러나 테라 방벽의 전투는 보통의 전투와는 다르다. 보통의 전투가 전과를 확대하기 위한 전투라면 테라 방벽의 전투는 손해를 줄이기 위한 행동이 우선되어야 했다. 어차피 얼마의 몬스터를 더 죽이든 호수를 바가지로 퍼내는 것에 불과했다.
“네 놈. 내가 돌아올 때까지 헛짓거리를 할 생각은 꿈에도 꾸지 마라. 그 때는 내 검이 제일 먼저 네 놈을 향할 테니까.”
“아아, 명령을 받은 이상 명령자체는 수행한다니까? 무슨 수를 쓰든 간에 테라 방벽은 안전하게 지키고 있을 테니 이제는 좀 가지?”
황제의 명령을 받은 이상 수행한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그 명령이 부적절하게 생각되더라도. 곁에 있다면 최대한의 설득은 해보겠지만 황제의 뜻이 굳건하다면 그에 따르는 것이 신하된 자로서의 도리였다.
#
“퐁크 후작이라면 세 자루 검 중 한 사람이잖아요?”
“그래. 그러니까 문제지. 저 사람이 여기에 왜 왔겠어? 뭔가 일이 터지려니까 온 거지!”
느닷없는 퐁크 후작의 등장에 모두가 불안에 떨었다. 그도 그럴 것이 지크 후작이나 퐁크 후작이나 우리들의 입장에서 보자면 감히 범접할 수 없는 힘을 가진 이들이었고 갑작스럽게 그런 이가 찾아왔다면 아무 이유 없이 찾아오지는 않았을 테니까. 분명 큰 일이 벌어질 징조라며 불안에 떠는 것도 이상한 일이 전혀 아니었다. 그러나 나는 왜 퐁크 후작이 이 곳에 왔는지 알 것만 같았다.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것 같은데요.”
“걱정하지 말라니?”
“사실 제가 수도에 갔을 때, 이런 일이 있었는데요.”
자세한 속사정은 제외한 채, 이들이 알아도 될 정도의 정보만을 가지고 설명을 했음에도 내 말이 끝난 직후에는 대부분이 이들이 불안함을 떨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대신 화제가 퐁크 후작이 온 이유로부터 지크 후작가의 사정으로 변했지만.
“후작 각하께서 얼마나 이 곳에 계셨지?”
“글쎄, 내가 올 때부터 이 곳에 있으셨던 건 확실한데.”
“나도.”
“나도.”
“일드님도 후작 각하보다 늦게 오셨습니까?”
우리들 중 가장 오랫동안 버틴 사람은 일드였다. 올해로 8년차. 앞으로 2년만 더 버티면 이 곳을 명예롭게 벗어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일드였다. 그러나 그조차도 새내기에 불과했을 때, 이미 지크 후작은 테라 방벽의 지휘관으로서 존재하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는 거의 십 년쯤 된 걸로 알고 있긴 한데.”
“오래 되셨네.”
“대단하신 분이지. 솔직히 후작 각하께서 어쩔 수 없이 이 곳에 온 것도 아니고 영지에만 있어도 온갖 부귀영화를 누리실 수 있는데 전투가 벌어질 때마다 가장 앞에서 싸우는 것만 보더라도 절대 평범한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지.”
“다른 일도 아니고 집안에 우환이 생겼다는데 다녀오실 수도 있지.”
만약 지크 후작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었다면 혹은 지크 후작이 지금까지 다른 이들을 방패삼아 호의호식했다면 이런 반응은 나올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열심히, 최선을 다해 싸워왔기에 최고지휘관이 휴가를 떠난다는 말에도 단 한 명도 불평을 내뱉는 사람이 없었다.
“그러면 퐁크 후작 각하가 지크 후작 각하 대신에 남는 건가?”
“그렇게······되겠죠? 큰 문제는 없지 않을까요? 어차피 병사들의 지휘는 부장들이 알아서 할 테니까요.”
“글쎄, 그건 두고 봐야겠지. 알다시피 사람을 상대하는 것과 몬스터를 상대하는 건 전혀 다른 문제니까. 아무리 퐁크 후작 각하라고 하더라도 지크 후작 각하의 빈자리를 메우는 건 단시간 내에는 불가능 할 거야.”
그리고 우리들의 우려와 걱정은 현실이 되어 다가왔다.
#
쾅-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 자기만 마음껏 싸울 수 있으면 된다는 거야 뭐야!”
“목소리 낮춰요. 다른 사람들이 듣겠어요.”
“들으라지! 아니, 사람이 바뀐 만큼 빈자리를 온전히 채울 수 없을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건 아니지! 자기한테는 놀이일 뿐이라고 말하는 거랑 뭐가 다른데!”
잔뜩 흥분한 로랑을 애써 진정시켰다. 윗사람을 욕하는 것치고는 목소리가 너무 높았기에. 그러나 말릴 필요는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목소리가 컸던 탓에 로랑의 말을 듣지 못했을 리가 없을 텐데 그 누구 하나 로랑을 나무라는 사람이 없었으니.
“뭐? 몬스터는 베는 맛이 없어서 심심해? 누군 재미있어서 여기 있는 줄 알아! 누구는 목숨 걸고 싸우고 있는데 그게 장난으로밖에 안 보이나 보지!”
퐁크 후작이 최고 책임자로서 맞이한 첫 번째 전투에서 퐁크 후작은 정말 잘 싸웠다. 그가 있는 곳은 몬스터들이 알아서 피해갈 정도로. 문제는 걱정했던 것처럼 인간과 인간의 전투와 테라 방벽에서 벌어지는 전투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는 것과 그 점을 퐁크 후작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여러 번 말했다시피 테라 방벽은 어디 동네 성벽이 아니었다. 단순히 길이만 하더라도 수 Km에 달하는 방벽이 일자로 세워져 있는 거대한 구조물이었다. 제 아무리 마스터라는 존재가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은 이들이라 하더라도 개인의 힘으로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지크 후작은 끊임없이 움직였다. 굳이 자신이 상대하지 않아도 되는 몬스터는 상대하지 않으면서 병사들이 상대하기 어려운 혹은 방벽에 직접적으로 타격을 줄 만한 상위종 위주로 제거를 한 덕에 방벽에 주어지는 전체적인 부하를 줄일 수 있었다. 그러나 퐁크 후작은 그런 것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벌써부터 후작 각하가 그리워지려고 해.”
“올 거면 스콜피온이라도 배치 된 다음에 올 것이지.”
“최소한 지원군과 함께 오던가. 혼자 와서 이 지랄이야.”
그의 행동은 간단했다. 방벽의 중앙이 되는 점에서 앞으로 돌진하며 적을 베어나갔다. 어디가 위험하고 어디가 여유로운지는 그에게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저 앞에 적이 있으니까 검을 휘두를 뿐. 당연히 몬스터들도 지능이 없는 것이 아니었으니 자신들이 대적할 수 없는 재해를 피해 이동하는 건 어찌 보면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문제는 그 자연스러운 이동이 우리들에게는 너무나 부자연스러운 일이라는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중앙의 인원들을 양쪽으로 적절히 이동시키는 것으로 대처를 했다. 이런 경험은 거의 처음이나 다름없었으나 몇 년 동안이나 몬스터를 마주했던 이들의 대처가 늦을 리는 없었다.
다만 얼마 지나지 않아 양 사이드로 이동했던 이들은 황급히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야 했다. 퐁크 후작이 점점 앞으로 나아가면서 그를 피해 사이드로 이동했던 몬스터들이 다시금 중앙으로 모여들었으니까.
그러는 과정에서 평소보다 많은 피해가 발생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거기까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처음이었으니 자기가 하던 대로 해볼 수 있는 일이니까.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돌아오며 내뱉은 한 마디는 모두를 분노케 하기 충분했다.
[역시 몬스터를 상대로는 영 검을 휘두르는 재미가 없단 말이야. 하긴 본능밖에 안 남은 놈들에게 뭘 기대하겠냐만은, 다음에는 마력을 봉인한 채 싸워봐야 하나?]
“대책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요?”
“대책? 대책이랄 게 뭐 있나. 퐁크 후작께서 지크 후작 각하처럼만 해주면 될 것을.”
대책은 나도 알고 너도 알고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크 후작이 방벽 곳곳을 돌아다니며 활약했던 것처럼 퐁크 후작도 그리하면 조금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적응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러나 그건 고양이 목에 방울을 다는 것과도 같았다.
“퐁크 후작 몰라? 퐁크 후작. 황제 폐하나 되니까 명령을 내리고 받드는 거지, 우리가 말해봐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면 다행이고 감히 자신에게 이래라저래라 한다고 검을 휘두르는 게 보통이야.”
그 말에 모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변방까지 내몰린 이들이었지만 퐁크 후작의 이름은 조금만 귀가 열려 있으면 소문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나마 기대해볼만한 점은 고양이 스스로 방울을 목에 거는 것처럼 전투 도중 스스로 방법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깨닫고 행동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희망이 부질없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결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젠장. 오늘도 똑같군.”
“그래도 오늘은 조금 낫지 않았어요?”
“그게 저 작자 덕이야? 그냥 몬스터가 적었던 것뿐이지. 전임자가 인수인계를 하고 가면 뭐해? 들어 처먹지를 않는데.”
분명히 지크 후작은 테라 방벽을 떠나기 전, 그가 해야 할 일에 대해 똑똑히 알려주고 수도로 향했다. 그럼에도 자기 방식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도 귀가 있고 눈이 있으니 분위기가 좋지 않다는 것을, 피해가 더 늘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 텐데도 방식을 바꾸지 않는다는 건 피해가 늘어나든 말든 ‘방벽을 지킨다.’ 라는 명령만 수행하겠다는 뜻이나 다름없었다.
결국 그 날 밤, 각 단장들과 조장들, 그리고 오랫동안 테라 방벽을 지켜온 베테랑들이 모여 회의를 열었다. 나도 경험은 부족했지만 일드와 함께 참석할 수가 있었다.
“어떡하면 좋겠어? 저렇게 자기 좋을 대로 날뛰어도 우리 상관인데, 우리가 맞춰야지.”
“평생 지크 후작 각하께서 이 곳에 남아계실 것도 아니고, 언젠가는 지금과 같은 방법으로 공격을 막아내야 할 때도 있을 지도 모르지. 미리미리 예방한다고 생각하고 대책을 생각해보자고.”
지휘관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그들 마음대로 배제할 수는 없었다. 그럴 힘도 없을뿐더러 없는 것보다는 있는 것이 나았으니까. 단지 최선의 선택이 뭔지 알면서도 차선을 선택하는 것이 불만일 뿐.
“음, 대책이라······.”
“지원군이 오려면 한 달은 걸릴 텐데.”
“미안한 말이지만 우리들은 더 이상 여유가 없네. 이미 한 사람당 맡고 있는 구역만 하더라도 100m를 넘기고 있으니, 신입들이 오기 전까지는 지금 하는 일만으로도 버거워.”
마법사는 애초에 숫자가 부족했다. 게다가 이번 년도는 특히나 많은 숫자의 마법사가 죽기도 했고. 일드의 말처럼 기존의 일을 포기하지 않고서는 새로운 무언가를 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 뒤로도 원초적인 내용들만이 대화를 채웠다. 사실 뚜렷한 대책이 없다는 말이 맞았다. 단 한 사람이 전혀 다른 움직임을 보이는 것만으로 상황이 이렇게 변했는데 그걸 보완할 대책이 한순간에 나올 리가 없었다.
“이런 방법은 어떻겠습니까?”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9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