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8화 - >
“쯧쯧. 꽉 막힌 친구 같으니라고.”
레닐과 지크 후작의 여식을 밖으로 내보낸 뒤 황제는 답답하다는 듯 읊조렸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가문의 일을 황제인 그에게까지 와서 도와달라고 한단 말인가. 물론 그렇게 된 이유에는 그의 잘못도 있는 만큼 레닐의 부정적인 전망에도 불구하고 거절할 수가 없었다.
‘결국 근 십 년이 다 되어가도록 한 번의 휴가조차 없었군.’
사실 그로서도 지크를 계속해서 테라 방벽에 묶어둘 생각은 없었다. 지금까지 몇 번이고 휘하 기사들에게 맡겨두고 혹은 지원이 필요하다면 황실기사들을 투입할 테니 필요하다면 후방에서 휴가를 가지라고 말했지만 그럴 때마다 지크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제 휘하의 병사들은 단 한 번의 휴식조차 없이 제국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특별한 공도 없이 제국의 병사들을 사지 속으로 밀어 넣고 있는 제가 단순히 지위가 높다하여 휴가를 받아 고향으로 돌아간다면 병사들의 사기는 바닥으로 곤두박질칠 것입니다.]
그 뒤로 몇 번이나 친서를 보냈지만 그 때마다 돌아온 대답은 똑같았다. 어쩔 수 없이 휴가가 필요할 때면 언제든지 말하라고 한 지가 몇 년 전의 일이었으나 지크는 단 한 번도 테라 방벽을 벗어난 젓이 없었다.
‘나를 위해 평생 동안 궂은일을 담당했다. 그런 이에게 남은 세월을 자식들의 원망과 함께 살게 할 수는 없지.’
그러나 함부로 지크를 불러들일 수는 없었다. 테라 방벽의 방위도 중요한 일이었으니까. 지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의 리스트가 머릿속에서 스쳐지나 갈 것도 없었다. 지크를 대신할 수 있는 사람은 두 명밖에는 없었으니까. 그러나 그 중 한 명은 제외. 북부를 방어하고자 남부를 비우는 건 아랫돌을 빼 윗돌을 괴는 꼴이었으니까.
“윈체스터 백작. 지금 즉시 퐁크 후작에게 수도로 올라오라 전해라. 최대한 빠르게!”
“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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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사들의 발걸음이 한없이 무겁다. 그 마음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또 일찍 도착한다하여 수도에서 테라 방벽으로 지원군과 마정석을 보내는 날짜가 앞당겨지는 것도 아니었지만 이대로 있다가는 나까지 그 어두운 마음에 휩싸일 것만 같았다.
“느리네요.”
“그럴 수밖에. 올 때야 얼마나 좋았겠는가. 한동안은 제 목숨 걱정을 내려놔도 괜찮았을 테니까. 하지만 사지를 향해 제 발로 걷고 있는데 발이 가벼울 순 없겠지.”
그들을 괜히 데리고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이 폐를 끼쳐서, 그들의 분위기가 나에게도 영향을 줄 것 같아서가 아니었다. 그들이 정말로 사지로 들어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죽겠죠?”
“그게 네 잘못은 아니다. 저들의 각오가 약한 것일 뿐. 너라도 각오를 단단히 해둬라.”
긴장을 하는 것보다 적절한 긴장감을 유지하는 것이 더욱 어렵다. 특히나 한 번 풀어져버린 긴장을 다시금 잡는 것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차라리 테라 방벽에서 계속해서 사투를 벌였다면 더 오래 살 수도 있었을 텐데, 한 번 평화에 젖어버린 몸이 사투의 현장에 다시 적응할 수 있을까. 적응한다 하더라도 그 시간동안 버틸 수 있을까. 그런 걱정 속에 나와 일행들은 테라 방벽으로 복귀했다.
“황제 폐하께서 후작께 전달하라 하신 교서입니다.”
“음······.”
천천히 황제의 교서를 읽는 지크 후작. 이윽고 짧은 한 마디를 내놓았다.
“고생했다.”
이것으로 길고 길었던 외부에서의 임무는 완벽히 끝났다. 이제는 다시 테라 방벽의 수많은 마법사들 중 한 명으로 돌아올 시간. 그 동안 이 곳에서의 긴장감을 잊지 않기 위해 노력했지만 어쩌면 그 동안 병사들에게서 했던 걱정이 나에게 적용될 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그들에게는 실수를 바로잡을 힘이 없었지만 나에게는 한 번쯤이라면 어떻게든 바로잡을 수단이 있다는 것. 물론 최고의 상황은 그런 일 자체가 벌어지지 않는 것이었지만.
“내 생각보다 훨씬 잘해준 모양이구나. 내 생각 이상으로 많은 양을 지원해주신다고 하니, 여기도 조금 더 여유가 생기겠지. 아무튼 고생 많았다. 오늘 하루는 전투가 벌어지더라도 쉬면서 적응을 마친 후 다시 활약할 수 있도록.”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나는 품 안에서 해가 쨍쨍하나 비가 오나 고이 간직한 한 장의 편지를 지크 후작의 앞에 내려놓았다.
“수도에서 시연회가 끝난 뒤, 따님의 초대를 받았습니다. 이 편지를 후작 각하께 전달해달라고 하시더군요.”
“쓸데없는 짓을 했군. 지금 나는 공무중이다. 사적인 일에 신경을 쓸 시간 따위는 없다.”
“따님께서는 각하께서 그런 말씀을 하실 걸 예상하신 모양입니다. 후작 각하께서 편지를 보지 않으신다면 한 마디만 전해달라고 했습니다.
[어머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버님을 뵙고 싶어 한다.]
고요.”
자세한 사정은 잘 모르겠지만 그 한 마디만으로도 지크 후작의 부인의 살날이 결코 오래 남지 않았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영애가 그 간 소식을 지크 후작에게 전달하려고 노력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 사실을 지크 후작이 몰랐을까? 그럴 확률은 높게 잡아도 1%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의 말은 영애 입장에서 최후통첩이나 다름없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물러가라.”
지크 후작은 잠깐의 침묵 이후 나를 내보냈다. 그 사이 그의 표정에서는 조금의 변화도 느낄 수 없었으나 그의 속마음이 어떨지는 오직 그만이 알고 있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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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주님께서도 관심을 가지시더니 연구해보시겠다고 제작품을 가져가셨습니다.”
“오오오오!”
“진짜로? 탑주님께서?!”
“예. 장로님들께서 놀라시는 그 얼굴을 직접 보셨어야 했습니다.”
“키야! 고생한 보람이 있다!”
나는 동료들에게 둘러싸여 수도에서 있었던 사연을 풀어놓았다. 스콜피온의 제작은 누군가 한 사람의 업적이 아니라 모두가 힘을 모은 결과였으니까. 우리들의 노력이 콧대 높은 귀족들을 놀라게 했다는 말에 모두가 뿌듯해했다. 그 뿐만이 아니라 마탑주가 직접 내려와 살펴본 뒤, 가져갔다는 소식에는 술만 있었으면 술판을 벌였을 것만 같은 분위기였다.
“이렇게 되면 이번 가을 원정은 안 나가는 건가?”
“글쎄, 최근 상위종을 많이 죽이긴 했지만 가을 원정은 테라 방벽의 전통 아닌 전통이니까. 스콜피온이 배치되더라도 가을 원정이 사라지진 않겠지.”
“그래도 이게 어디야. 상위종만 줄어들면 잡다한 몬스터들로는 절대 테라 방벽을 넘을 수 없다고. 전투도 조금은 더 편해지겠지.”
“그건 맞는 말이지.”
이 곳에 돌아와 들은 충격적인 소식이 있었다. 더 이상 상위종의 몬스터가 눈치를 살피지 않는다는 것. 인간에 대한 적대감이 한층 상승하기라도 한 것처럼 눈에 불을 켜고 달려든다는 사실이었다. 그로 인해 사상자도 더 빠른 속도로 늘고 있다고, 그런 와중에 대(對) 상위종 병기인 스콜피온의 실전배치가 멀지 않았다는 소식은 모두를 기쁘게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날에는 술 한 잔 먹어줘야 하는데!”
“아서라. 취한 상태로 방벽 위에 올라갈 생각이 아니라면.”
“한 잔 정도는 괜찮지 않아? 한 잔은?”
그렇게 한참을 이야기를 나누고 난 뒤에야 다들 기분 좋은 여운을 가진 채, 뿔뿔이 흩어졌다. 그리고 최후에 남아있는 사람은 나와 일드 뿐. 모두가 사라진 것을 확인한 뒤 일드가 천천히 다가와 물었다.
“거짓말을, 아니 사실을 숨겼구나.”
“예. 다들 힘들고 지쳐보였습니다. 거짓은 아니니 괜찮지 않습니까. 최소한 다들 기분은 좋아보였고요. 일드님은 어떻게 눈치 채셨습니까? 다들 흥분해서인지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 것 같은데요.”
“거북이가 열심히 달려봤자 토끼보다 빠를 리가 없지. 똑같다. 우리가 아무리 노력해봤자 마탑주님이 보시기에는 아이들의 장난감에 불과하겠지. 아마 한눈에 알아차리셨을 거다. 안 그러냐?”
“······맞습니다.”
“뭐, 어쨌든 고생했다. 다들 지쳐보였는데 네 말처럼 어느 정도 기운을 차린 것 같기도 하고. 착한 거짓말이라는 건 이런 것이겠지. 너도 이만 들어가서 쉬어라. 내일부터는 지금까지의 평화가 그리워질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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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무를 마치고 오랜만의 실전이었지만 테라 방벽은 여전했다. 아니, 더 치열해지고 처절해졌다. 적색경보보다 상위의 경보를 만들어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나왔을 정도의 사태가 벌어졌었던 때부터 지금까지, 단순히 단발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했던 상위종이 적극적으로 전투에 참여했기 때문이었다.
“역시······ 가더라도 나 혼자 갈 걸 그랬네.”
공격 패턴이 바뀌었다. 그리고 바뀐 패턴에 적응하지 못하면 죽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이 세상이 게임이었다면 죽고 되살아나며 패턴을 익히고 결국엔 보스 몬스터를 죽일 수 있겠지만 아쉽게도 이 세상은 게임이 아닌 현실이었다. 죽으면 그것으로 끝. 그리고 안타깝게도 수십 일이나 얼굴을 마주했던 이들이 눈을 감은 채, 일어나지 못하는 모습은 착잡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그 자들은······.”
“위습 경.”
“결국 이렇게 됐군. 그나마 시체라도 건진 것을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 그토록 말해줬음에도 하루를 버티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해야 할지 모르겠군.”
그래도 짧은 시간이나마 인연을 쌓아왔기에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가기를 빌며 곧 자리를 떠났다. 안타깝게도 사람이 죽는 것이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었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버린 일이었기에. 불과 일 년 전만 하더라도 경험이 없어 몬스터를 향해 마법을 날려보겠다고 나섰었는데 지금은 어느새 수많은 혈전을 이겨내고 시체를 봐도 아무렇지도 않은, 조금 어색한 말로 속칭 베테랑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동안 지크 후작은 언제나 똑같은 모습으로 최전선에서 테라 방벽의 방위에 힘썼다. 내가 제대로 말을 전한 것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평소와 똑같은 모습에 경외심마저 들 정도였다. 어떻게 저렇게까지 황제에게 충성을 다할 수 있는가, 피를 나눈 가족들의 근황이, 얼굴이 보고 싶지도 않은가? 그 인내심에 존경을 보내고 싶을 정도였다.
그러던 어느 날, 다들 피로가 극에 달해 전투가 끝나면 드러누워 휴식을 취하는 것이 제 1 덕목이 된 날. 다들 지원군이 하루라도 빨리 도착하기를 기도하며 간신히 하루하루를 버티던 날에 평소와 다르게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무슨 일 있어요?”
어지간한 일은 화젯거리조차 못 되는 곳이다. 그럼에도 사람들이 모여 웅성거리고 있다면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뜻. 자연스레 나의 발걸음도 동료들에게로 향했다.
“수도에서 사람이 왔어!”
“수도에서요?”
이 근래 수도에서 올 사람이라고 해봤자 지원군밖에는 없었다. 하지만 다섯 자리의 병사들이 왔다면 아무리 내가 방금 전까지 방벽 위에 있다가 내려왔다지만 모를 리가 없을 텐데, 지원군의 존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었다.
게다가 단순히 수도에서 사람이 온 일이 이렇게 화제가 될 일인가 싶을 때, 동료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왜 이들이 이렇게 모여있는지 단번에 이해하게 만들었다.
“퐁크 후작 각하께서 오셨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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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이 곳에는 무슨 일이지?”
“황제 폐하의 교서다. 쯧. 명령만 아니었어도 검 한 번은 더 휘둘렀을 것을······. 어서 읽어봐라.”
황제의 세 자루 검이라 불리는 이들 중 두 자루가 한 자리에 모였다. 그러나 같은 칭호를 공유하는 것치고 이 둘의 사이는 그다지 좋은 편은 아니었다.
충성에 모든 것을 다 바친 지크 후작과 개인적인 수련이 더 중요한 퐁크 후작은 태생부터 부딪칠 수밖에 없는 관계였으니까. 명령을 수행하면서도 마지못해 한다는 티를 팍팍 내는 퐁크 후작을 못마땅하다는 듯 쳐다본 지크 후작이 서둘러 교서를 읽어 내려갔다.
사이는 좋지 않지만 지크 후작으로서도 그 실력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는 자가 퐁크 후작이었다. 그런데 다른 누구도 아닌 그를 칙사로 삼아 명령해야할 일이라면 무척이나 중요한 일일 터, 사적인 감정을 내세울 때가 아니었다.
“너에게 테라 방벽의 지휘를 맡기고 수도로 돌아오라고?”
“그렇게 됐다. 그러니까 빨리 짐 싸서 수도로 올라가도록. 네가 없는 이 곳은 내가 잘 지키고 있으마.”
“어림도 없는 소리! 제 좋을 대로 날뛰는 것이 전부인 녀석에게 수만 명의 목숨을 맡기라는 소리냐!”
“그래서, 황명을 거부라도 할 생각이야? 다른 누구도 아닌 네가 황명을?”
빠드득-
약간의 비웃음 섞인 목소리와 이를 가는 소리가 너무나 선명하게 울려 퍼졌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8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