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7화 - >
방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여성은 전형적인 귀족 가문의 여식이었다. 내가 많은 사람을 만나본 건 아니었지만 지금까지 내가 만나본 사람들 중에서는 한 손가락에 꼽힐 정도의 미모를 가진. 나를 데리러온 기사가 아가씨라고 칭했으니 아마 그녀가 나를 초대한 후작 영애이리라.
“앉으세요. 차는 어떤 걸로 드릴까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나도 차를 즐겨 마시는 편이었다. 테라 방벽으로 간 뒤에는 그럴 여유가 없었으며 고향에서는 아버지께서 사치를 금하셨기에 비싼 차는 꿈도 꿀 수 없었지만 적어도 맛을 보고 차의 품질을 느낄 수 있는 정도는 되었다.
그런 나의 판단에 메이드가 건네준 차의 품질은 최상품, 적어도 상품은 되었다. 오래 전, 지크 후작과 함께 마신 차보다는 차의 품질 자체는 떨어졌으나 차를 타는 메이드의 실력이 탁월해 차의 맛을 극한까지 끌어올렸으니 절로 박수가 나올만한 맛이었다.
“차가 무척이나 맛있습니다.”
동시에 차를 탄 메이드가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감사를 표했다. 그녀 스스로도 자신의 실력에 꽤나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표정이었다.
“우선 며칠 전, 초대를 거절한 것을 사과드리겠습니다. 후작 각하의 명령으로 어제 있었던 시연회를 준비하기 위해 사적인 일에 시간을 쏟을 여유가 없었습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말씀하셨던 대로 사적인 일이 공적인 일보다 우선일 수는 없는 일이니까요.”
“감사합니다. 그러면 왜 저를 보자고 하셨는지 이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혹시 아버님께서 저 혹은 가문의 사람들에게 전하라고 하신 말씀이나 편지는 없었나요?”
아무래도 분위기가 내가 예상했었던 흐름대로 흘러가는 것 같았다. 오랫동안 자리를 비운 아버지와 연락 없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가족들. 지크 후작의 상황과 영애의 말과 분위기에서 나올 수 있는 결론은 그것 밖에는 없었다.
“죄송합니다. 저는 황제 폐하께 장계를 올리라는 명령만을 받았을 뿐, 다른 이야기는 일절 듣지 못했습니다.”
“······역시 그런가요.”
내 말에 눈에 띄게 실망한 티를 숨기지 못하는 영애. 하긴 그럴 만도 하겠다. 영애의 나이가 몇 살인지는 모르겠지만 명문 귀족의 여식으로서 아직 결혼조차 하지 않은 것을 보면 결코 많은 나이는 아니리라. 어쩌면 못한 것일 수도 있겠다. 결정권자인 지크 후작이 먼 변방에서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으니 그 누가 지크 후작을 빼고 그의 딸의 결혼을 추진할 수 있을까.
어쨌든 지크 후작이 테라 방벽의 지휘관으로 임명된 것이 십 년이 조금 안 된 일이었다. 그 동안 지크 후작으로부터의 무슨 내용이 되었든 연락을 기다렸을 텐데 매번 헛발질을 한 것이나 다름없었으니 실망스러운 마음을 가지지 않는 것이 어려운 일이겠지.
“레닐 공자께서는 다시 테라 방벽으로 돌아가시겠죠.”
“예. 황제 폐하께서 답을 내려주시는 즉시 테라 방벽으로 돌아갈 생각입니다.”
“그렇다면 아버님께 이 편지를 전해주세요.”
곱게 접힌 한 장의 편지. 건네받은 편지를 품 안에 갈무리한 뒤 그녀를 쳐다보자 마지막으로 그녀가 말했다.
“만약 그 편지를 아버지께서 읽지 않으시거나 읽으신 뒤에도 별 말씀이 없으시다면 한 마디만 전해주시겠어요?”
“어렵지 않은 일입니다.”
“어머님께서 마지막으로 아버님의 얼굴을 보고 싶어 한다······고 전해주세요.”
그것으로 우리들의 대화는 끝났다. 자세한 사정이 궁금했으나 내가 알 필요도, 알려고 해서도 아니 되는 내용이었고 설령 물어본다고 하더라도 외부인인 나에게 자세한 사정을 알려줄 리도 없었다. 그렇게 자리에서 일어나 저택을 나가려 할 때, 이 말이 필요할 것 같다는 생각에 고민 끝에 입을 열었다.
“영애께 제가 한 말씀 드려도 되겠습니까?”
“뭔가요?”
“주제 넘는 말일지 모르겠지만 이 편지에 어떤 내용이 적혀있던 간에 후작 각하께서는 미동조차 하지 않으실 거라는 점입니다. 설령 영애께서 하신 말씀을 전해드린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등을 지고 있어 영애의 표정이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결코 좋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녀의 태도로 보건데 지금까지 이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을 테니까. 어쩌면 내 말이 그녀로서는 인정하기 싫었던 말일지도 모르겠다. 가족보다 일이 우선이라는 그 말을.
“제가 테라 방벽에서 후작 각하를 모신 지는 일 년도 채 되지 않았으나 후작 각하께서 어떤 분이신지 파악하는데 부족함이 없는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한 마디가 두 마디가 되었고 두 마디가 세 마디가 되겠지만 영애는 내 이야기를 잠자코 듣고만 있을 뿐, 중간에 끊을 생각은 없어보였다.
“후작 각하께서는 결코 사적인 일을 이유로 부임지인 테라 방벽을 떠나실 분이 아닙니다. 정말로 영애께서 후작 각하가 잠시나마 영지로 돌아오시기를 바라신다면 이 편지의 대상은 후작 각하가 아닌 다른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게 누구죠?”
“오직 황제 폐하의 명령만이 후작 각하를 움직일 수 있을 것입니다.”
황제와 지크 후작은 오랜 세월을 함께한 둘도 없는 사이라고 들었다. 황제에게 인간의 마음이 조금이라도 남아있다면 어머니가 죽기 직전 아버지를 보고 싶어하니 아버지를 잠시나마 영지로 보내달라는 자식의 청을 거절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내 말에도 불구하고 영애는 섣불리 답을 하지 못했다. 어쩌면 그녀 스스로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일지도 몰랐다.
편지를 몇 통을 보내든 무슨 말을 전령에게 말해주든 지크 후작이 영지로 돌아올 일은 없다는 것을. 만약 지크 후작이 테라 방벽을 떠난다면 그건 황제의 명령이 있을 때 뿐이라는 것을. 그러나 그 긴 세월 동안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 이유는 결국 가문 내부의 일이라는 점 때문이 아니었을까.
“주제 넘는 말이었다면 죄송합니다. 후작 각하께 여러 번 목숨을 빚진 이로서 후작 각하를 위해서 그리고 영애의 어머님을 위해서라도 영애께서 현명한 판단을 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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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며칠이 지났지만 영애는 나를 찾지 않았다. 사실 그런 말을 한 것만으로도 선을 넘었다면 넘은 일이었기에 나 또한 더 이상 개입하려 하지 않았고 시간은 흘러 나는 다시금 윈체스터 백작의 손에 이끌려 황제를 대면했다.
“기뻐하도록. 모든 것이 네 공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네가 시연회에서 실수를 했다면 지금 이 순간, 과인이 네게 들려줄 말은 결코 좋은 소식이 아니었을 테니까.”
“테라 방벽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아주셔서 감사할 따름입니다.”
“너에게 명령을 내리겠다. 이것을 지크 후작에게 전달하도록.”
“황명을 받듭니다.”
이것으로 내가 수도에 온 목적은 100% 아니 200% 달성했다. 이제는 수도를 떠나 다시 테라 방벽으로 되돌아갈 때가 온 것이다. 물론 나를 따라온 많은 이들의 발걸음은 수도로 올 때와는 정반대로 한없이 무겁겠지만 그렇다고 놓고 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두 달 뒤 지원군과 함께 올라가라고 하고 싶지만 테라 방벽의 사정이 급하다 하니 한 명 한 명이 귀하겠지.”
“많은 이들이 지금 이 소식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또한 동료들은 지금도 목숨을 걸고 싸우고 있는데 어찌 여유를 부리겠습니까.”
황제와의 짧은 대화를 끝으로 황궁을 빠져나올 때, 나는 예상치 못한 인물과 마주쳤다. 며칠 전의 대화를 끝으로 서신조차 주고받지 않았던 영애가 호위 속에 황궁으로 들어오고 있었으니까. 서로 눈이 마주치고 목례를 하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한 나는 저택으로 돌아와 위습과 함께 테라 방벽으로 되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빠른 시일 내에 결론이 날 것은 명확했기에 사전에 준비를 해둔만큼 먼 길을 떠날 준비는 금세 완료가 되었고 위습과의 회의를 통해 이미 해가 정상에서 떨어지고 있는 만큼 하루를 더 묵은 뒤, 아침 일찍 출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내가 저택으로 돌아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나를 찾는 사람이 나타났다.
“마법사 레닐. 레닐은 어디 있소?”
“제가 레닐입니다.”
“황명이오. 명을 받드는 즉시 황궁으로 오라는 황제 폐하의 명령이오.”
응? 갑자기? 나는 위습을 바라보며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지만 황실기사가 찾아와 황명을 말하는데 따르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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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래도 테라 방벽의 사정을 듣고 판단해야 될 것 같아서 말이지. 먼 길 가야하는 자를 괜히 부른 것 같아 미안하군.”
“무슨 말씀이십니까. 황제 폐하께 도움이 될 수 있다니 영광일 따름입니다.”
황실기사를 따라 황궁으로 따라가자 나는 졸지에 삼자대면을 하게 됐다. 황제, 나, 후작 영애까지. 적어도 수년 동안 발만 동동 굴렸을 텐데 내가 한 마디 했다고 며칠 만에 행동으로 나설지는 몰랐다.
“과인의 질문에 네가 생각한 그대로를 말하라. 지크 후작이 자리를 비운다면 나머지 병사들의 역량으로 얼마간이나 버틸 수 있겠는가?”
지크 후작이 없는 테라 방벽이라, 테라 방벽에서 대체 불가능한 존재가 있다면 단 한 사람. 지크 후작밖에는 없었다. 단순히 강력한 힘을 가진 존재뿐만이 아니라 어떤 상황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는 정신적인 지주로서, 위험한 상황을 역전시킬 수 있는 비장의 한 수로서 지크 후작은 테라 방벽의 방위에 있어 빠질 수 없는 인물이었다.
힐끔-
황제의 질문에 대한 답을 정리하며 곁눈질로 그녀를 쳐다보자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시선이 느껴졌다. 아마 충분히 막아낼 수 있다는 대답을 원하는 것이겠지. 그녀에게 황제만이 지크 후작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한 사람도 나였으니까.
“외람된 말씀이오나 지금의 테라 방벽이라면 한 달도 버티기 어려울 것입니다.”
안타깝다. 일에 열중하느라 가정에 소홀한 아버지와 시한부 선고를 받은 어머니. 그 사이를 잇고자 노력하는 딸까지.
드라마 속에서나 나올 법한 가정사가 아닌가. 마음 같아서는 그녀가 원하는 것처럼 지크 후작이 자리를 비우더라도 충분히 버틸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내 거짓말로 인해 한 명은 편안하게 세상을 떠날 수 있어도 수천, 수만 명이 고통 속에 잠들 터였다. 미안한 말이지만 저울의 기울임이 너무 극심했다.
“그 정도인가.”
“특별 지원 없이는 괴멸적인 피해를 각오해야 한다는 것이 제 생각입니다.”
“흐음······.”
황제가 고심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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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닐 공자.”
“도와드리지 못해 죄송할······.”
“솔직하게 말씀해주셔서 고마워요.”
고맙다고? 사실 황제의 물러나라는 말에 그녀와 함께 방을 빠져나왔을 때, 뺨 한 대 정도는 각오하고 있었다. 그녀의 입장에서는 다된 밥에 재 뿌린 격일 테니까. 그러나 오히려 고맙다며 고개를 숙이는 모습에 솔직히 한 대 맞은 느낌이었다.
“아쉽지 않으십니까? 제가 버틸 수 있다고 말했다면······.”
“공자께서 저와 제 어머님을 위해 거짓말을 했다면 제 어머님께서는 아버님을 만나실 수 있을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만남은 어머님께서 원하시던 만남은 아니셨을 거예요. 아버님의 얼굴은 분명 분노로 얼룩진 얼굴이셨을 테니까. 또한 어머님 한 분을 위해 수많은 백성들을 죽음에 길로 이끌다니, 지크 가문의 일원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에요.”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에요. 제 행동 때문에 괜한 걸음을 하셨네요. 어서 가보세요. 아버님께서도, 공자의 동료들도 공자가 가져올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요.”
착한 사람이다. 그 아버지에 그 딸이라고 해야 할지, 아니면 아버지도 없는 상황에서 저렇게 올곧게 성장했다는 것에 감탄을 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황제의 결정이 테라 방벽과 지크 후작가. 두 곳을 모두 만족시키는 결정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7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