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6화 - >
긴장이 된다. 많은 사람들 앞에 나서는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지금 이 순간, 긴장이 되지 않는다면 둘 중 하나이리라. 간이 보통 사람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부었거나 눈과 귀가 멀었거나. 그렇다면 나를 향해 쏘아지는 시선들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을 테니까.
더불어 나를 바라보는 시선은 무척이나 적대적이었다. 자신들의 재산을 빼앗아가려는 놈을 누가 좋은 시선으로 바라보겠냐만은 모두를 위해서 필요한 일인데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니, 일 년 쯤 테라 방벽에서 복무하고 난다면 차라리 지원을 더 많이 해주는 것을 택할 텐데 말이다.
“고개를 들라.”
시연회를 펼칠 연무장은 무척이나 넓었다. 하긴 수도를 방어하는 상비군의 숫자는 테라 방벽의 병사들의 숫자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니 당연한 일이겠지만. 마치 열병식을 하듯 자리 잡은 황제와 귀족들뿐만 아니라 그들을 호위하기 위해 삼중 사중으로 둘러싼 기사들까지. 장관이 아닐 수 없었다.
“네가 청한 삼일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준비가 모두 끝났다고 들었는데, 보통의 발리스타와는 크게 다르지 않은 모습이구나.”
“결코 실망시켜드리지 않겠습니다.”
귀족들의 얼굴에는 짙은 실망감이, 한편으로는 안도감이 서려있었다. 신무기라기에 기대를 했지만 한 물 갔다고 평가받는 공성병기인 발리스타에서 조금의 변화도 없는 그 모습에, 한편으로는 위력이 보잘 것 없을 것이기에 마정석을 내주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일 터. 그러나 한쪽에 위치한 마법사들은 주의 깊게 발리스타를 쳐다보고 있었다.
마법은 이 시대의 과학보다 몇 단계는 더 앞서 있었다. 과학으로는 도저히 설명할 수 없는 현상을 마법으로는 간단히 재현 가능하니 단순히 겉모습만 보고 판단하는 것은 바보 같은 일이었다.
[······.]
오거 한 마리가 침묵 속에 연무장으로 끌려온다. 윈체스터 백작에게 요청한 결과였다. 아마도 마탑의 실험용으로 잡혀있던 오거였을 것이다.
이 주변에서 오거 정도의 몬스터를 이틀 만에 잡아오기는 어려웠을 테니까. 끌려오는 오거의 모습에 호위를 담당하던 기사들의 긴장감이 한층 올라갔지만 괜한 걱정이다. 마탑의 마법사들은 이런 중요한 순간에 문제를 일으킬 정도로 호락호락한 이들이 아니었으니까.
“위습 경. 병사들을 준비시켜주십시오.”
“알겠네.”
나와 함께 테라 방벽으로부터 넘어온 병사들이 부지런히 발리스타를 오거를 향해 조준했다. 날카로운 창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음에도 마법을 유지하고 있는 마법사의 실력이 뛰어난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침묵을 유지하는 오거.
‘확실히 테라 방벽의 몬스터들에 비할 바는 아니다.’
같은 오거임에도 테라 방벽에서 볼 수 있는 오거와는 크기부터가 달랐다. 이 근방에서라면 오거 정도의 몬스터라 하더라도 최상위포식자에 속할 테니 상관없겠지만 몬스터의 대지에서는 오거 정도는 먹잇감으로 생각하는 몬스터들이 셀 수 없이 많은 만큼 조금이라도 더 강해지기 위해 덩치를 키우는 선택을 했다. 단순히 크기 차이만 나는 것뿐만이 아니었으니 시연회의 결과는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살아있는 오거가 틀림없습니까?”
“물론이네.”
“그렇다면 마법을 풀고 황제 폐하와 귀족 여러분께 오거가 멀쩡히 살아있다는 것을 확인시켜주십시오. 팔다리를 단단히 고정시켜두었으니 문제가 생기지는 않을 것입니다.”
“알겠네.”
하나하나 황제에게 모두 보고를 하여 차근차근 절차를 밟은 뒤, 오거가 깨어났다. 깊은 잠에서 깨어난 오거는 괴성을 지르며 난동을 피웠지만 사지뿐만 아니라 몸 곳곳에 장착된 구속구들로 인해 쓸데없이 괴성을 지르며 기력을 소비할 뿐,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지금부터 시연회를 시작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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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회는 성공적이었다. 첫 목표였던 오거는 예상했던 대로 단 한 발에 숨통이 끊어졌다. 그러나 황제와 고위 귀족들을 관객인 상황에서 고작 한 발로 시연회가 끝날 리는 없었다. 준비해둔 오거를 두 마리 더 연속으로 하늘나라로 보내 준 뒤에는 더 이상 준비해둔 몬스터가 없었지만 시연회를 계속하기에는 어렵지 않았다.
예상 이상의 위력에 놀라기라도 했는지 그 때부터는 장로들의 방어 마법을 상대로 시연회를 할 수 있었기 때문에. 중간에 장난질이 있긴 했지만 나 또한 목창에 약간의 장난질을 하는 것으로 무난하게 시연회를 마칠 수 있었다. 그러나 마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귀족들에게는 오거의 숨통을 단 한 발로 끊은 첫 장면이 가장 인상이 깊은 듯싶었다.
“내가 한 번 봐도 되겠지?”
“마탑주님께서 직접 봐주신다니, 제작에 참여한 마법사로서 영광일 따름입니다.”
마탑주도 흥미가 생겼는지 직접 찾아와 스콜피온을 살폈다. 그리고 잠시 후, 나는 마탑주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기존의 마법과는 다르군.”
“예. 방벽의 마법사들이 머리를 한데 모아 기존의 마법을 개량한 것입니다.”
“······아니, 그거 말고. 번개의 속성을 부여하는 마법은 개량을 했다고 해도 그다지 놀라울 것도 없지. 결국 흰 말이냐, 검은 말이냐의 차이일 뿐이니. 내가 다르다고 한 부분은 이 쪽이다. 내가 알고 있는 마법과는 체계부터가 완전히 달라.”
각인의 존재를 눈치 챈 마법사는 꽤 있었다. 다량의 마력이 소모가 되고 있는데 눈치 채지 못했다면 마법사라는 칭호를 거둬가도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해야 하니까. 그러나 기존의 마법과 다르다는 것을 한눈에 알아본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개인적인 연구 성과라고 했을 때, 조금 색다른 마법이라고 치부하며 넘어갔었으니까.
“누구지? 이런 걸 생각해낸 녀석은. 테라 방벽에······원더인가? 아니야. 그 늙은이는 이런 새로운 길을 찾아내기에는 머리가 굳었어. 그럼 누구지? 너인가? 이 길을 개척해낸 선구자가 네 녀석이렷다?”
어느새 마탑주의 얼굴은 숨결을 느낄 수 있을 정도로 가깝게 다가온 상태였다. 다른 이도 아닌 마탑주와 시선을 마주하고 있으니 내 주변 1m는 다른 공간이 된 것처럼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마탑주라면 각인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지금까지도 나에게 각인은 미지의 영역이었다. 운 좋게 얻어서 원리도 모른 채 사용하고 있는 능력이었으며 언제 사라지더라도 불평할 수 없는 능력이었다.
지금도 꿈속에서 느꼈던 감각에 따라하여 사용하고 있을 뿐, 한 일 년 쯤 사용하지 않는다면 두 번 다시는 나도 각인을 사용하지 못할 지도 몰랐다. 그렇다고 나 이외의 사람에게 그 당시 느꼈던 감각을 최대한 자세히 설명했음에도 단 한 명의 성공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개인적으로도 계속해서 연구를 하고 있었지만 실마리조차 보이지 않는 상황. 그러나 세계 최고의 마법사라고 일컬어지는 마탑주라면 각인의 비밀을 밝혀낼 수 있지 않을까?
“······개인적인 연구 성과입니다.”
“연구 성과라? 당장 연구 자료를 내게 가져와라.”
“그럴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그게 어쨌다는 건가. 마탑주가 각인의 비밀을 밝힐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르지만 확실한 것 하나는 그가 비밀을 밝혀낸다고 하여 나의 이득은 아니라는 점이다. 비밀을 밝혀내는 건 내가 되어야 했다. 마탑주가 각인을 알려주지 않으면 죽음에 이른다고 한다면 고민 정도는 해보겠으나 그런 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럴 수 없다고? 감히 누구 앞에서 그런 말을 하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마법사가 되어 마탑주님의 얼굴을 모를 리 있겠습니까. 그러나 마탑주님이라 하더라도 마법사 개인의 성과를 훔치실 수는 없습니다. 불문율을 깨실 생각이십니까.”
설령 그가 마탑주라 하더라도 불문율을 깰 수는 없다. 시도했다는 사실이 알려지는 것만으로도 마탑주의 자리에서 내려와야 할 터, 심하게는 추방을 당할 수도 있는 일이었다. 그 만큼 오랜 세월 동안 내려온 불문율은 모든 마법사가 반드시 지켜야 할 도덕이자 법이었다.
“내 제자로 받아주마. 또한 테라 방벽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주지. 네 소식은 들었다. 아직 스물도 안 됐는데 네 개의 서클을 만들었다지? 내 제자로 들어온다면 너는 최연소로 장로의 자리에 오를 수 있다. 네 능력만 충분하다면 내 뒤를 이을 수도 있겠지. 이 정도면 네 연구 성과를 내게 가져오는 대가로 충분하지 않겠느냐?”
보통의 마법사라면 입이 떡 벌어질만한 제안이다. 마탑주가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제안도, 테라 방벽으로부터 빼내주겠다는 제안도. 그러나 나에게는 이미 한 번씩 거절한 제안들이다.
아직 4서클에 부족한 나에게는 마탑주의 가르침이나 원더의 가르침이나 큰 차이가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으며 테라 방벽으로부터 벗어나기만을 원했다면 지크 후작 앞에서 그런 말을 하지도 않았을 거다.
“제게 과분한 제안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러나 여전히 탑주님의 제안을 받아들일 수는 없습니다.”
마탑주는 한동안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말이 없었다. 나 또한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마주하고 있었고, 잠시 뒤 마탑주가 먼저 몸을 돌렸다.
“건방진 녀석이구나. 지금까지 단 한 번도 누군가를 제자로 받아주겠다는 말을 한 적이 없는데,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거절을 하다니 말이야. 그럼 마지막으로 또 다른 제안을 하나 하마.”
“말씀하십시오.”
“테라 방벽으로 마탑이 보유하고 있는 마정석을 최대한 지원해주겠다. 대신 저 발리스타는 내가 가져가마. 이 정도라면 너도 받아들일 수 있는 제안이겠지.”
도대체 마탑주는 각인으로부터 무엇을 보았기에 이런 제안까지 하는 것일까. 어쨌든 나쁜 제안은 아니었다. 스콜피온의 위력을 보여준 이상 지원은 오겠지만 마탑에서 적극적으로 호응해준다면 좋으면 좋았지. 나쁘지는 않을 테니까. 게다가 이유 모를 예감이 들었다. 설령 마탑주가 본격적으로 연구를 시작하더라도 쉬이 비밀을 밝힐 수 없을 것 같다는 정체모를 예감이.
“그래주신다면 감사할 따름입니다.”
“전의 제안은 내가 네 연구를 따라잡기 전까지 유효할 것이다. 내 제안을 받아들일 마음이 생긴다면 언제든지 내게 말하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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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연회가 있은 직후, 나는 끝없는 기다림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만 다행인 점은 윈체스터 백작으로부터 회의가 좋은 쪽으로 흘러가고 있으며 지원은 반쯤 확정이라는 사실을 들은 점이었다.
그러는 한 편 나에게도 꽤나 많은 손님들이 찾아왔다. 거의 대부분이 시연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의 측근들로 나에게 가신으로 들어오지 않겠냐는 제안을 하러 온 이들이었고 적당한 변명거리로 그들을 돌려보내자 이번에는 낯설지 않은 얼굴이 나를 찾아왔다.
“영애께서 다시 한 번 공자를 초대하셨습니다. 이번에는 거부하지 않으시겠지요?”
“······앞장서게. 이 쯤 되니 왜 나를 보고자 하는지 궁금해질 정도군.”
기사를 따라가자 얼마 지나지 않아 지크 후작가 소유의 대저택이 눈에 들어왔다. 가문의 영지가 아닌 수도임에도 불구하고 내 고향의 저택보다도 거대한 크기를 자랑했다.
“아가씨. 말씀하신대로 손님을 모셔왔습니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렸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6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