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5화 - >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오라가라하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일입니다.”
“예의? 윗사람? 나를 영애의 아랫사람으로 본다라, 제국의 기반을 뒤흔드는 말이군. 내가 자네에게 존대를 해서? 아니면 후작 각하의 위세를 등에 업어서? 혹여나 최근에 영애께서 작위를 수여받으셨다면 영애를 찾아뵙고 사죄드리지. 아무래도 테라 방벽에서 복무하느라 소식을 듣지 못한 모양이야.”
부모의 작위가 남작이든 백작이든 자식들의 계급에는 공식적으로 아무런 연관이 없었다. 부모의 작위를 이어받거나, 큰 공을 세워 황제로부터 작위를 수여받는 것이 아니라면 똑같이 귀족이라는 신분을 가진 이들일 뿐. 그 안에서 서열은 없었으니까.
물론 자존심덩어리인 이들이 한 자리에 모이니만큼 부모의 작위에 의해, 영지가 가진 힘에 의해 알게 모르게 서열이 나뉠 수밖에 없었지만 적어도 한낱 기사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아니 되었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게다가 나는 분명히 말했네. 후작 각하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라고. 믿지 못하겠다면 내 아버지이신 드라그닐 자작님의 명예를 걸고 약속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후작 각하의 명령을 멈춰야 할 정도로 초대 이유가 급한 일인가? 아니면 자네에게는 후작 각하의 명령보다 영애의 초대가 더 권위가 높다는 건가?”
“그럴 리가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다면 뭔가?”
“······ 모두가 부족한 저의 실언이었습니다. 사죄를 받아주십시오.”
“이미 말했다시피 후작 각하의 명령을 또한 황명을 받드는 중이기에 영애의 초대에 응할 수 없네. 하지만 삼일 뒤에도 나를 보고자 하신다면 그 때는 기꺼이 초대에 응하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나를 만나야겠다면 영애께서 발걸음을 옮기시라는 말밖에는 해줄 수가 없군. 내 말이 무슨 말인지 알겠나?”
“예. 영애께는 그리 전하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후작가의 기사는 되돌아갔다. 다행인 일이었다. 가끔 영지의 힘을 믿고 선을 넘는 기사들이 존재하기에, 지크 후작의 밑에 그런 기사가 있다고 생각하기는 힘들었지만 그가 영지를 떠난 지 몇 년은 가뿐히 지난만큼 그런 사람이 기사로 뽑히지 않았으리라는 법은 없었으니까.
내 말을 들은 영애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지크 후작의 명령을 앞세웠으니 설령 영애가 분노하더라도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 전에 방금 다녀간 기사가 잘 말려주겠지.
“괜찮겠나?”
“위습 경도 아시지 않습니까. 후작 각하께서는 사적인 일을 공적인 영역까지 끌고 오시는 분이 아닙니다.”
털어서 먼지 안 나오는 사람은 없다지만 적어도 본인에 한해서만큼은 털어서 먼지 안 나올 사람이 지크 후작이었다. 그런 사람이 응해도, 응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초대를 임무 수행 중에 거절했다고 하여 나를 질책한다? 그런 쓸데없는 상상을 할 시간에 어떻게 하면 삼일 뒤의 시연회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줄지 생각하는 편이 백배, 천배는 더 이득이었다.
“계속해서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위습 경.”
“최선을 다하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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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 모인 것 같군.”
황제의 소집 명령을 받은 이들이 빠르게 황궁으로 모여들었다. 백작급 이상의 고위귀족들 그리고 작위는 없지만 명성 혹은 권위로는 그에 준하는 이들이 모였으니 사실상 제국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이들이 바로 여기에 모인 사람들이었다.
“아직도 오지 않은 이가 있나?”
“랭커스터 백작이 병을 이유로 오지 못한 것을 제외하면 없습니다.”
“투병 중이라니, 안타까운 일이군.”
자신의 영지를 가족 혹은 측근에게 맡기고 본인은 수도에서 머무는 이들이 꽤나 많았기에 짧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황제가 원하는 만큼의 숫자가 모이기에는 충분했다.
황제의 명령에 하나둘 황궁으로 모여든 이들도 회의실에 도착한 이들의 면면이 화려하다는 사실에 긴장을 유지했다. 이 정도나 되는 인원을 불러 모았다는 것은 황제가 할 말이 결코 가볍지 않다는 뜻일 테니까.
‘도대체 무슨 이야기를 꺼내시려고 우리를 불러 모으셨단 말인가?’
‘최근에 큰 일이 있었다는 말은 듣지 못했는데.’
‘전쟁이라도 일으키시려는 건가?’
그 중에는 과도한 긴장으로 인해 아직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음에도 각자 앞에 놓인 찻잔의 바닥이 보일만큼 차를 들이키고 있는 이들도 있었다. 그 모습이 퍽이나 재밌었는지 황제는 잠깐 미소를 짓더니 이야기를 시작했다.
“사전에 예고조차 하지 않은 초대임에도 이렇게 다들 모여주어 고맙군.”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황제 폐하께서 직접 내리신 명령에 그 누가 망설이겠습니까. 그렇지 않은가?”
“그렇습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입니다.”
“외람된 말씀이오나 어찌하여 저희를 불러 모으셨는지 연유를 여쭤도 되겠습니까.”
“물론이오. 허나 그 전에 모두 이 것을 본 다음에 본격적인 이야기를 시작하도록 하지.”
지크 후작이 황제에게 보낸 전서는 어느새 수십 장으로 늘어나 있었다. 필체가 달라 사본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으나 내용만큼은 똑같았기에 전서를 읽은 모두의 표정이 굳는 것은 똑같았다.
“전서를 보아서 알겠지만 내가 그대들을 불러 모은 것은 테라 방벽의 지크 후작으로부터 지원을 요청하는 장계가 도착했기 때문이오. 이에 대해 그대들의 의견을 듣고자 하니 의견이 있다면 가감 없이 말해보시오.”
귀족들의 반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었다. 먼저 테라 방벽과 가까이 붙어있는, 주로 북부에 위치해있는 귀족들은 하나같이 우려를 표했다.
테라 방벽으로 인한 혜택을 직접적으로 누리고 있고 테라 방벽이 뚫린다면 그들의 본거지라 할 수 있는 영지를 지키기 위해 테라 방벽으로 보내는 지원보다 더 많은 양의 인적, 물적 자원이 소비될 테니 그들로서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테라 방벽의 안전을 확보해야 했다.
그러나 그들과는 정반대로 테라 방벽과 멀리 떨어져있는 남부 귀족들은 약간은 시큰둥한 반응이었다. 제국 최북단에 위치한 테라 방벽과 멀리 떨어져있어 설령 테라 방벽이 뚫리더라도 피해가 적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위로 올라갈수록 척박해지는 북부와 달리 따사로운 날씨를 자랑했기에 같은 크기의 영지라도 경제적으로도 북부를 웃도는 탓에 비교적 많은 지원을 보내고 있었는데 추가적인 지원이라니, 그들의 표정이 좋지 않을 만도 했다.
결국 두 세력 간에 대립은 예정되어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당장 다다음달에 테라 방벽을 향해 출발할 병력과 물자만 하더라도 어마어마한 양입니다. 여기에서 또 추가적인 지원을 보낸다는 건 너무나 힘든 일입니다.”
“그렇다면 테라 방벽이 무너지도록 내버려두겠다는 거요?!”
“누가 내버려두자고 했습니까? 다른 방법을 찾아보자는 거지요! 지금껏 보낸 지원만으로도 테라 방벽은 굳건히 제국을 지켜왔습니다! 더군다나 신병기의 배치를 위해 대량의 마정석을 지원해달라니, 마정석이 아무 땅이나 파면 나오는 건줄 아십니까!”
“그게 내버려두겠다는 말과 뭐가 다른지 모르겠군! 나만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가벼운 한탄으로 시작한 토론은 점점 격해졌다. 단순한 의견 표출부터 시간이 지날수록 서로를 향한 원색적인 비난이 이어졌다.
황제가 이 모든 말들을 듣고 있다는 사실을 깜빡이라도 한 것처럼. 그러나 황제도, 그 누구도 사람들을 말리지 않았다.
어차피 한 번쯤은 거쳐 가야 할 일이었으니까. 게다가 하늘 위에는 또 다른 하늘이 있는 법. 그들이 아무리 떠들 법석하게 입을 놀려도 의견이 갈린 이상 중요한 결정을 내릴 수는 없었다.
“모두들 잠시 진정하는 것이 좋겠군. 폐하께서 듣고 계시다는 것을 잊지 말게.”
그리고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소란을 잠재운 것은 가장 상석에 앉아있는 황제의 바로 다음 열에 앉아있는 사람이었다. 보통 서열이 높을수록 상석에 가까운 곳에 앉게 되는 만큼 황제를 제외하면 가장 서열이 높다고 할 수 있었다.
“황제 폐하. 제가 이들에게 한 마디 하여도 되겠습니까?”
“그러시오. 아르센 공작.”
머리카락부터 길게 기른 콧수염까지 새하얀 백발을 자랑하는 아르센 공작. 살아온 날이 살아갈 날보다 몇 배는 더 많을 정도로 노년의 나이였지만 그를 늙은이라고 무시할 수 있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순수하게 그의 영지만 하더라도 황제의 직할령을 제외하면 한 손에 꼽히는 크기와 세력을 자랑했으며 수많은 남부 귀족들의 대표와도 같은 인물이었다.
그가 마음을 먹고 귀족들과 연합하여 내란을 일으킨다면 제국이 반쪽으로 갈라진다고 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거물 중의 거물. 황제가 기다리던 중요한 결정을 이끌어낼 수 있는 인물이었으며 모두가 그의 입에서 어떤 말이 나올지 귀를 기울였다.
“자네들의 의견은 잘 들었네. 도중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말들이 섞여있었지만 어디 그게 자네들이 의도한 것이겠나. 지원이 늘어날수록 자네 영지의 백성들에게 주어지는 짐이 더 많아지는 것을 걱정하는 것이겠지. 안 그런가?”
“공작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저희가 어디 개인적인 욕심으로 반대를 하는 것이겠습니까. 다 영지민들의 고생이 늘어날 것임을 알기 때문에 반대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네들도 알아두어야 할 것이 있네. 이 지원 요청을 보낸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지크 후작일세. 어디 그가 헛된 말을 하는 사람이던가.”
지크 후작은 유명했다. 유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실력은 둘째치더라도 자신의 영지와는 멀리 떨어진 곳에서 황제의 명령이라는 이유만으로 춥고 척박한 테라 방벽에서 오랜 세월동안 불평불만 없이 몬스터와 사투를 벌이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그 몇 년 동안 그가 추가적인 지원을 요청한 것도 오늘이 처음 있는 일이었다.
“그가 지원을 요청했다면 정말로 지원이 필요하기 때문이겠지. 그가 마정석을 필요로 한다면 정말 필요하기 때문일 게야. 내 말이 틀린가?”
“공작 각하의 말씀이 옳습니다.”
“틀린 말씀은 아닙니다만······.”
귀족들의 반응이 엇갈렸다. 북부의 귀족들은 환호를, 남부의 귀족들은 어쩔 수 없다는 반응을. 그 둘에 속하지 않는 귀족들도 대세가 추가적인 지원을 하자는 쪽으로 기울자 그에 찬동하는 분위기로 흘러가고 있었다.
“탑주께서는 어찌 생각하시는가? 지금까지 고민을 한 만큼 무언가 생각이 있는 듯 한데.”
황제의 명령에 귀한 걸음을 한 마탑주는 지금까지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한 마디도 하지 않았으며 어떠한 행동을 하지도 않았다. 다만 곰곰이 생각하며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있었을 뿐. 그러나 아르센 공작의 물음에까지 침묵을 지킬 수는 없었는지 정말 오랜만에 그의 입이 열렸다.
“여러분께서 지원을 하기로 결정했다면 그리 하시면 됩니다. 지원의 주체는 여러분들이니 따로 드릴 말씀은 없군요.”
“마정석에 관해서도 말인가? 마탑에서 보유한 마정석의 양이 상당하다고 들었네만.”
그 말에 귀족들이 눈을 빛냈다. 자신들이 사용하기에도 부족한 것이 마정석이다. 그러나 다른 이가 더 많은 양을 낸다면 자신들에게 오는 부담은 적어지는 것이 당연. 자신에게로 쏠리는 시선을 마탑주가 마주했다.
“그래서 폐하께 한 가지 요청 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뭔가. 말해보게.”
“테라 방벽의 마법사들이 개발했다는 신무기인 스콜피온의 모습을 한 번 보고 싶군요. 지크 후작은 뛰어난 기사임과 동시에 청렴한 위인이지만 마법에까지 능통하지는 않은 만큼 휘하의 마법사들이 거짓으로 공을 부풀린 것은 아닌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이어진 마탑주의 말에 많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른 지원은 그렇다 쳐도 마정석의 지원은 지금까지 없었던 일이다. 그 이유가 신무기의 실전배치를 위한만큼 그 위력을 두 눈으로 볼 자격이 이들에게는 있었다. 사전에 예상했던 반응인 만큼 황제도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그럴 줄 알고 지크 후작이 준비를 해 보냈더군. 삼일 뒤, 신무기의 시연회가 있을 예정이니 모두 참석했으면 하네. 그럼 추가적인 지원은 결정된 것으로 알고, 마정석의 지원 여부는 시연회가 있은 후에 다시 이야기를 하도록 하지. 더 할 말이 남아 있나?”
은근슬쩍 두 달 뒤 있을 지원을 더 늘리는 것을 확정지은 황제가 좌중을 둘러보았다. 다행히 거기까지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황제의 말에 반대를 하는 사람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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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주님. 정말 이대로 마정석을 빼앗기실 생각이십니까?”
“······.”
마탑으로 돌아온 마탑주의 곁에서 장로들이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며 성토했다. 그러나 마탑주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테이블을 손가락으로 두드리며 눈을 감고 있을 뿐이었다.
“시연회 때만 제 위력을 발휘하지 못하게 하면 되는 문제 아닌가. 그렇다면 내가······.”
“그건 안 됩니다. 위력을 보자고 요청하신 건 탑주님이십니다. 또한 가장 많은 마정석을 보유하고 있는 것도 마탑입니다. 조금이라도 부자연스러운 일이 벌어진다면 제일 먼저 누가 의심을 사겠습니까?”
“자네는 그러면 가만히 앉아서 마정석을 빼앗기자는 건가?”
헛된 말을 내뱉는 장로들을 에반이 말렸지만 장로들은 멈추지 않았다. 계획까지 짜고 있을 때, 마탑주가 결론을 내렸다.
“일단 시연회는 두고 보지.”
“탑주님.”
“그만. 기껏해야 변방으로 내몰린 마법사들이 만들어낸 무기일 뿐이야. 위력이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면 거기서 끝이고 위력이 충분하다면 광산의 개발에 속도가 붙을 테니 그 때가서 더 많은 것을 요구하면 돼.”
“그렇습니다. 탑주님. 지금 당장은 손해일지 몰라도 차후 더 큰 이득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일단 마탑주가 결론을 내린 이상 나머지 마법사들은 불만이 있더라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미묘한 평화 속에서 삼 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사전에 예고했던 시연회가 다가왔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5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