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4화 - >
“네가 레닐이라는 녀석이구나. 공에는 상이 필요하다는 네 말, 잘 들었다.”
우리 가문이 힘이 없을지언정 경제적으로 궁핍하지는 않았다. 작은 영지였지만 대대손손 이어져 내려온 영지는 오랫동안 평화로웠고 덕분에 테라 방벽으로 가기 전까지의 내 삶은 나름 여유롭고 풍족한 편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귀족으로서 배워야 할 학문 역시 부족함 없이 배울 수 있었으며 그 중에는 예법에 관한 것도 있었다. 그러나 몇 년 동안 배운 그 예법을 실전에 사용해보기도 전에 느닷없이 들려온 황제의 말은 긴장하고 있던 나를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황제라는 작자가 그렇게 기억할 게 없나?’
광산을 발견했을 당시, 나와 지크 후작이 나누었던 대화가 떠올랐다.
[하지만 네 놈이 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것도 사실.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포함해 오늘의 대화까지, 조금의 경감도 없이 기록하여 황제 폐하께 장계를 올리도록 하겠다. 네 녀석의 처분 또한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지쿠 후작이 헛된 소리를 하는 사람은 아니었으니 그 때, 황제에게 올렸던 장계에 나와 지크 후작이 나누었던 대화가 빠짐없이 적혀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아무런 처벌도 없이 잘 넘어가지 않았던가. 오히려 내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일이 잘 풀리기도 했고. 그런데 그 일을 적지 않은 시간이 지난 지금까지 황제나 되는 사람이 기억하고 있을 줄이야.
그 만큼 내가 했던 말들이 좋은 말로는 인상 깊었고 나쁜 말로는 건방졌다는 것일까. 속으로 뭔가 덜컥 하는 느낌이 들었지만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예의를 표하며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고개를 숙였다.
“한낱 마법사의 이름을 황제 폐하께서 기억해주시다니, 가문의 영광입니다.”
“됐다. 이제 와서 그런 말을 해봤자 내 기분이 좋아질 것 같으냐.”
순식간의 방의 분위기가 가라앉았다. 황제의 호위들은 나를 죽일듯한 눈빛으로 쳐다보고 있었고 내 옆의 윈체스터 백작 또한 나빴으면 나빴지, 결코 좋지는 않았다.
황제가 이렇게 대놓고 이야기를 꺼낼 줄은 몰랐기에 혹시 내가 또 다른 사지에 내 발로 들어온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을 때,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당연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웃음을 터트릴 수 있는 사람은 황제 밖에는 없었다.
“크하핫. 그런 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녀석이 어떤 녀석인가 했더니, 과연 그 말을 한 것이 네 녀석이 맞는지 의심스럽구나. 뭐, 상관없겠지. 너를 탓하려고 한 말은 아니었으니, 틀린 말은 아니었다. 그 어떤 신하가 공을 세웠음에도 푸대접하는 군주를 위해 충성을 다하겠느냐? 그런 놈은 군주로서의 자격이 없는 놈이지.”
문제는 그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더 차가워졌다는 것이다. 아마 황제가 없었다면 내 목은 수 개의 칼날에 둘러싸여있지 않았을까 싶을 정도로. 설마 한낱 마법사의 말에 화가 났다는 것을 인정하기 싫어 차도살인지계라도 쓰려는 것일까.
“그래서 내가 준 상은 마음에 들었느냐? 네가 계속해서 충성을 다할 만큼?”
“······예. 제가 이룬 공에 비해 과분할 정도의 상이었습니다.”
“그것 참 다행이군. 뛰어난 인재를 놓치지 않을 수 있어서 말이야. 앞으로도 나를 위하여 너의 능력을 사용할 수 있도록.”
“제국의 번영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황제는 본인을 위하여 힘을 쓰라하였고 나는 제국을 위하여 힘을 쓰겠다 말했다. 서로 뜻하는 바는 달랐지만 주변의 이들은 그 말들을 전혀 문제 삼지 않았다. 이들은 황제의 측근으로서 제국이 곧 황제라 생각하는 이들이었으니까.
“네가 가져온 서신은 잘 읽었다. 추가적인 지원이 필요하다라, 지크가 그렇다면 그런 것이겠지. 그런데 네가 왜 전령으로 선택되었는지 알고 있느냐?”
“출발하기 전 지크 후작으로부터 설명을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길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겠지. 그 스콜피온이라는 무기를 만드는데 얼마나 필요하지? 길게는 줄 수 없다.”
“삼일이면 충분합니다.”
“삼일이라, 윈체스터 백작.”
“예. 폐하.”
“이 자가 원하는 것을 준비해 주도록. 동시에 수도에 상주하는 백작 이상의 귀족들과 마탑의 요인들에게 연락을 넣도록.”
“명을 받들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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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단 한 번도 나에게 충성을 다하겠다는 말은 하지 않았군.’
레닐과 윈체스터 백작이 집무실을 빠져나간 뒤 제국의 황제, 다리우스 3세는 실없는 웃음을 지었다. 그렇게 노골적으로 말을 했음에도 레닐은 제국만을 입에 담았을 뿐, 황제인 자신을 위하겠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런 말을 내뱉은 녀석이라면 무슨 뜻인지 모를 리가 없을 텐데. 그러나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마음 속 깊은 곳에 자리한 야망이 더욱더 불타올랐을 뿐.
‘고작해야 마법사 한 명의 충성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하는데 황제라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일이군.’
제국의 황제라는 자리는 이 세상 모든 이가 올려다봐야 하는 존재다. 그러나 그 각도는 제각각 달랐다. 누군가는 하늘을 올려다보듯 봐야했지만 누군가는 고개를 약간 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를 바라볼 수 있었다. 그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곧 제국이며 제국이 곧 나다. 그런데 왜 내 뜻대로 제국을 움직일 수 없는가.’
국가의 모든 힘이 군주에게 집중되는 전제군주. 그것이 다리우스 3세가 단 한 번도 입 밖으로 꺼내지 않은,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둔 야망이었다. 입 밖으로 꺼냈다가는 모든 귀족을 적으로 돌려야 할 테니까. 아무리 그가 황제라고 하더라도 귀족들의 지지가 없다면 황제로서 존재하기는 힘들었다.
그렇기에 귀족 모두를 억누를 수 있는 군사력이 필요했다. 돈이 필요했고, 인재가 필요했다. 그런 상황에서 레닐의 등장과 마정석 광산의 발견은 그에게 큰 호재나 다름없었다. 광산의 개발을 통해 황실 창고는 한층 더 부유해질 것이며 운이 좋다면 또 다른 걸림돌인 마탑을 견제할 수단을 얻게 될 수도 있었다.
‘필요한 곳에 지원을 보내는 것조차 눈치를 봐야 한다니, 이래서는 안 된다. 황제인 내 뜻에 의해 제국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일 수 있을 때, 비로소 제국은 다시 한 번 날아오르리라!’
그의 나이가 쉰을 넘겼다. 그러나 그의 야망은 현재진행형이었으며 지금은 단지 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었다. 멀리 뛰기 위해 몸을 잔뜩 웅크리는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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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후작 각하의 앞에서 내뱉었는지는 모르나 앞으로는 입조심 하도록 하게. 황제 폐하께서 청년의 젊은 혈기라 생각하고 너그러이 넘어가지 않으셨다면 자네뿐만 아니라 자네의 가족에게까지 화가 미쳤을 것이네.”
“앞으로는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명심하게. 한 번은 실수라 넘어갈 수 있어도 두 번부터는 실수라 할 수 없으니.”
황제로부터 심술로부터 벗어난 나는 윈체스터 백작에게 스콜피온 제작에 필요한 물건들을 요청했다. 우선 발리스타 두세 대는 너끈히 들어갈 만한 크기의 창고, 발리스타는 당연했고 마정석과 약간의 도구들. 내 요청을 들은 윈체스터 백작이 되물었다.
“정말로 이것들로 충분한가? 발리스타를 개량하려면 자네 혼자서는 힘들 텐데.”
“구조적인 개량이 아닌 마정석을 이용한 마법적인 개량이기에 저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자네가 그렇다면야, 최대한 빠르게 구해보도록 하지. 그 전에 수도에 머무는 동안 자네가 머물 곳을 마련해줄 터이니, 잠시 쉬고 있게.”
“감사합니다.”
윈체스터 백작은 자신이 딱지치기로 황제의 곁에서 일하고 있다는 것이 아니라는 듯 유능함을 뽐냈다. 황제의 명령이 있었다고는 하나 순식간에 내가 요구한 물건들을 준비해주었으니까. 너무 유능했던 탓에 나는 제대로 쉬지도 못한 채, 공방을 확인하러 저택을 떠나야 했던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정말로 삼일이면 되겠나?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자네가 스콜피온의 위력을 보여줄 분은 황제 폐하뿐만이 아니네. 수도에 거주하는 고위귀족들과 자네보다 뛰어난 실력의 마법사들이 함께 할 것이야. 조금의 실수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기억해두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일정에 차질 없이 완성하겠습니다.”
“······기대하지. 도대체 어떤 위력이기에 한 번도 아쉬운 소리를 하신 적 없는 후작 각하께서 따로 지원 요청을 하셨는지 궁금하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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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방에 발리스타가 준비된 즉시 나는 작업에 착수했다. 내가 해야 하는 작업은 발리스타에 각인을 새기는 것과 마법진을 구축하는 것. 각각 여유롭게 하루씩은 투자를 해야 비로소 빛을 볼 수 있었기에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작업을 진행했다. 한두 번 해본 작업이 아니었기에 내 손놀림에 실수는 없었다.
“뭐 도와줄 건 없나?”
“괜찮습니다. 엄한 놈이 들어오지 못하게만 막아주십시오.”
“걱정 말게. 쥐새끼 하나 들어오지 못하도록 할 테니.”
오히려 내가 걱정하는 건 어디선가 이 소식을 듣고 내 작업을 방해하러 오는 이가 있지 않을까라는 점이었다. 그렇기에 시간을 촉박하게 잡은 것도 있었다. 제작에 이틀, 검증에 하루. 시간이 짧으면 짧을수록 개수작을 부릴 시간도 줄어들 테니까. 그러나 전혀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나를 만나러 온 손님이 있었다.
“드라그닐 자작가의 레닐님이 맞으십니까?”
“그렇습니다만, 누구십니까?”
엄한 놈은 일차적으로 위습 경이 걸렀을 테니 수상한 목적을 가지고 접근한 사람은 아닐 것이다. 그런 목적을 가지고 접근했다면 위습이 막을 수 없는 위치의 인물이었을 텐데, 복장을 보아하니 특별할 것 없는 기사의 복장이었으니까. 그러나 그의 갑옷의 가슴부위에 새겨져있는 문양을 보았을 때, 나는 위습이 왜 이 사람을 안으로 들여보냈는지 알 것만 같았다.
“영애께서 공자를 초대하셨습니다.”
곧게 뻗은 한 자루의 검. 그만큼 단순하기에 알아보기 쉬운 그 문장이 가리키는 가문은 황제의 세 자루 검 중 하나이자 테라 방벽의 사령관이 가주로 있는 지크 후작가의 문양이었다. 테라 방벽은 지크 후작의 부임지일 뿐, 영지는 아니었으니까. 그 문양이 새겨진 갑옷을 입고 있는 기사가 말하는 영애는 지크 후작의 딸일 터.
“저를요?”
“예.”
“왜 저를 보자고 하십니까?”
“저도 모릅니다. 저는 단지 영애의 말씀에 따라 공자를 모시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영애가 왜 영지가 아닌 수도에 머물고 있을까, 아니 그 전에 나를 왜 초대했을까? 나와 그녀의 인연은 눈곱만큼도 없을 텐데. 굳이 따져보자면 드라그닐 자작가의 ‘레닐’이 아닌 테라 방벽으로부터 온 ‘전령’이기에 초대했을 확률이 높았다. 지크 후작이 테라 방벽의 사령관으로 임명된 이후 자리를 비웠다는 소식은 듣지 못했으니 오랫동안 보지 못한 아버지의 소식이 궁금한 것일 수도.
“따라오십시오. 영애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저 바쁩니다.”
“······예?”
그런 사연이라면 안타깝지만 나도 꽤나 바쁜 몸인 탓에 ‘사사로운’ 초대에 일일이 응할 시간은 없었다. 기사는 설마 내가 초대를 거절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는 듯 어안이 벙벙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되물었지만 내 대답이 바뀔 일은 없었다.
“후작 각하의 명령을 수행하는 중이기에 그 초대에는 응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정 대화를 하고 싶으시다면 영애께서 직접 오십시오. 그 때는 잠시나마 시간을 내보겠습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4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