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3화 - >
“몬스터가 인간에게 다른 몬스터들에게 보이는 것보다 몇 단계 높은 수준의 적대감을 보이는 것에 대한 가설로 대표적으로 두 가지 가설이 있지.
하나는 탄생할 때부터 인간에게 무조건적인 적대감을 가지도록 설계되었다는 가설.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어쩌다가 인간을 먹게 된 몬스터가 주변 몬스터에게 이 사실을 알리기 시작했고, 인간이 다른 몬스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맛있는 먹잇감임을 알게 된 몬스터가 대대손손 이어졌다는 가설이지.”
선천적인 요인과 후천적인 요인. 나는 몬스터가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다른 몬스터와 힘을 합치는 이유에 대해 일드에게 강의를 받고 있었다.
이미 널리 알려진 내용이었고, 마법사라면 모를 수가 없는 내용이었지만 나도, 일드도 잠자코 강의에 집중하고 있는 것은 정보전달이 목적이 아닌 적색경보 이전에 나누었던 말을 현실화함으로서 살아남았다는 것을 체감하는 일종의 의식에 가까운 행동이었기 때문이었다.
“그 두 가설을 바탕으로 수많은 갈래의 가설들이 존재하지. 인간의 마력이 몬스터를 끌어들이기 때문이다.
부모가 자식에게 인간의 존재를 가르치기 때문이다. 뭐, 이건 실험을 통해 아니라는 것이 밝혀졌지만. 그 외에도 기타 등등 그 중에서도 가장 사실에 가깝다고 받아들여지는 건 처음에 말한 가설이지.
어디까지나 가설이긴 하지만 말이야. 만약 몬스터가 왜 인간에게 더한 적대감을 보이는 지 밝혀낼 수만 있다면 테라 방벽도 언젠가 조용해지는 날이 올 지도 모르지. 안 그러나?”
“과연 그런 날이 오겠습니까? 차라리 몬스터들의 대지에서 몬스터가 사라지는 날이 더 빨리 온다는데 걸겠습니다.”
“그것도 테라 방벽이 조용해질 수 있는 한 가지 방법이긴 하지.”
이번 년도 들어 첫 번째로 울린 적색경보는 그 명성답게 큰 피해를 안겼다. 죽은 이들만 하더라도 네 자리 수를 가볍게 넘겼으며 가벼운 부상을 당한 이들까지 합친다면 다섯 손가락 중 두 손가락을 사용하지 못하는 수준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점이라면 한 개의 손가락과 나머지 한 손가락의 마디 두 개 정도는 재활을 거친다면 다시 사용할 수 있을 거라는 점이었다.
“좋아. 어울리지도 않는 강의는 여기까지. 마력을 회복했으면 너도 방벽으로 올라가라. 할 일이 많다.”
“예.”
그리고 그 피해는 단순히 인적 자원의 손실에만 그치지 않았다. 어울리지도 않게 상위종이 제 몸을 바쳐가며 테라 방벽을 두드린 탓에 방벽이 군데군데 무너지거나 부셔지는 등 무시할 수 없는 손상이 있었으며 더불어 큰 피해는 아니었지만 비행 몬스터들은 방벽 내부에까지 침입하여 난동을 부린 탓에 내부라고 하여 멀쩡하지만도 않았다.
기사들과 병사들이 무너진 잔해를 치우고 깔끔하게 공간을 비워놓으면 마법사들이 땅으로부터 퍼 올린 돌로 다시금 방벽을 쌓는다. 마력만 있다면 어디서든 바위를 만들어낼 수 있는 마법사와 별 다른 도구 없이도 거대한 바위를 거뜬히 들어 올리는 기사가 힘을 합치자 복구 자체는 꽤 빠른 속도로 진행되고 있었다.
그러나 가장 큰 문제라고 한다면 병사들의 손실도, 방벽과 건물의 파괴도 아니었다. 기사와 마법사의 손실. 살을 주고 뼈를 취한다는 말이 뼈가 더 치명적인 상처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처럼 병사들이 살이라면 기사와 마법사는 뼈나 다름없었으니까. 살은 금방 붙어도 뼈는 오랜 시간이 걸리는 것처럼 한 명 한 명이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작년, 내가 막 테라 방벽에 도착했을 때 테라 방벽에는 우리들을 포함해 삼백 명이 넘는 기사들과 육십 명의 마법사들이 존재했다. 그러나 지금, 기사들은 이백 여명을 간신히 넘기며 마법사 또한 1/3이 죽거나 큰 부상으로 인해 전선을 이탈한 상황이었으니 치명상이 아닐 수 없었다.
물론 이번 년도가 이례적으로 피해가 많긴 했다. 그 당시 기사들의 숫자는 정확히 떠오르지 않지만 마법사 동기들의 숫자는 고작해야 열 명 뿐이었으니, 아직 일 년이 지나려면 4개월에 가까운 시간이 남았음에도 두 배에 가까운 피해가 발생한 것이다. 나와 같은 조의 동기인 로랑은 운이 좋게도 아직까지 살아있었지만 다른 조의 동기들은 세 명 밖에는 남아있지 않았다.
“뭐 하고 있어! 다들 바쁜 거 안 보여? 멍 때리고 있을 시간에 돌이라도 하나 더 가져오라고!”
“예, 예! 갑니다!”
그러나 그들의 죽음에 슬퍼할 시간은 없었다. 죽은 자의 빈자리는 또 누군가로 채워지게 될 것이고 그들의 가족을 제외한다면 그 누구도 신경 쓰지 않게 될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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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전에 투입해야 합니다. 경험하지 않으셨습니까. 몬스터의 숫자도 숫자지만 상위종이 목숨을 아끼지 않고 달려들자 얼마나 큰 피해가 발생했는지, 스콜피온을 실전 배치한다면 설령 똑같은 규모의 공격이 오더라도 훨씬 적은 피해로 막을 수 있을 것입니다.”
개량에 개량을 거친 특제 발리스타, 지크 후작으로부터 ‘스콜피온’이라는 이름을 받은 발리스타는 여러모로 테라 방벽의 기사들, 마법사들에게 상위종을 효과적으로 상대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화젯거리였다.
“위력 하나는 발군인데······.”
“실전 테스트에서 오거를 단 한 발로 죽음에 이르게 했다는군.”
“그러면서 연사 속도는 보통의 발리스타와 똑같으니 대박이지.”
위력에 대해서는 다들 칭찬이 자자했다. 개량을 거칠 때마다 이어지는 실전 테스트에서 단 한 발로 오거를 침묵에 이르게 했으니 위력 자체는 최강의 5서클 마법이라고 하는 익스플로전에도 뒤지지 않았다. 테라 방벽에 5서클 마법사라고 해봤자 각 조의 조장을 포함해도 한 손에 꼽을 수 있었으니 더욱더 기대를 할 수밖에.
위력에 대해서 좋은 의미의 화젯거리였다면 비용에 대해서는 나쁜 의미로 화젯거리였다.
“진짜 위력만 아니었으면 뭐 이런 물건이 있냐고 했을 텐데.”
“애초에 만들지도 않았을 걸? 결과는 좋다지만 비용이 이래서야······. 조금만 더 효율이 높았으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스콜피온이 확실한 위력을 뿜어낼 수 있게 만들어주는 재료가 마정석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것도 주먹만한 크기의 마정석이 필요하다는 사실은 뛰어난 위력에도 불구하고 부정적인 말들이 나오기에 충분했다.
그에 대한 중재안으로 필요한 마정석을 다른 크기로 대신하고자 했지만 그럴 경우, 횟수가 줄어들 뿐만 아니라 자랑이었던 위력까지도 함께 감소되는 결과가 나와 초기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었다. 이를 두고 과연 실전배치를 할 수 있겠냐는 토론은 한동안 끊이지 않았고 며칠 뒤, 나는 지크 후작의 부름을 받았다.
“수도에 다녀오게.”
“예?”
수도에 다녀오라고? 내가? 왜? 내가 뭐 실수한 일이 있었던가? 아니면 마탑으로부터의 요청이 더 이상 그의 선에서는 막을 수 없을 정도인가?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 때, 이유를 설명해주지 않을 생각은 아니었다는 듯 뒤이어 내가 수도로 가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주기 시작했다.
“자네도 잘 알고 있겠지. 스콜피온의 실전 배치에 대해 말이 많다는 것을.”
“예. 아무래도 필요한 마정석의 크기가 크기이다보니 말이 없을 수는 없겠지요.”
“광산의 개발이 시작조차 하지 않은 지금, 테라 방벽 내에 보관하고 있는 마정석 만으로는 결코 스콜피온을 실전배치할 수 없네. 하지만 그 필요성에 대해서는 나뿐만 아니라 모든 이들이 절감하고 있지.”
그가 아무리 뛰어난 검사라 하더라도 몸이 여러 개는 아니었으니 길고 긴 테라 방벽을 모두 지킬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스콜피온이 얼마나 뛰어난 물건인지, 실전 배치의 필요성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다. 다만 발목을 붙잡고 있는 족쇄가 아무리 지크 후작이라 하더라도 쉽게 벗을 수 없는 족쇄였을 뿐.
“수도로 가서 황제 폐하께 내 서신을 올리도록 하게.”
“내용을 알 수 있겠습니까?”
“별 것 없네. 테라 방벽의 자원만으로는 스콜피온의 실전 배치가 불가능하니 마정석을 요청하는 것뿐이니, 그렇기에 네가 전령으로서 수도에 가게 된 것이다.”
확실히 그런 이유라면 내가 가는 것이 타당했다.
“나는 마법에 대해서는 잘 모르지만 스콜피온의 제작을 위해서는 너의 힘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하더군. 안타깝게도 스콜피온을 싣고 수도까지 가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걸리지. 그러니 자네가 수도에서 스콜피온을 제작해 황제 폐하께 스콜피온의 위력을 시연하도록 하게. 내 말이 무슨 뜻인지 알겠나?”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그렇게 나는 막중한 임무를 받은 채, 미운 정도 정이라고, 나름 정든 테라 방벽을 떠나 수도를 향해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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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에는 처음, 아니 두 번째인가?”
“네 번째인가, 다섯 번째인 것 같네요. 고향이 지방에서도 촌구석이라, 마탑에 볼 일이 없는 이상 갈 일이 없었으니까요.”
나 혼자서 그 먼 길을 갈 수는 없으니 소수의 병력과 함께 수도로 향하는 길. 그래도 아는 얼굴이 있어 적적하지는 않았다. 나와 가을 원정을 함께했던 위습이 동행했으니까. 위습은 경험은 많지만 어디까지나 평기사였으니 직책을 가지고 있어 자리를 비우는 것이 불가능한 다른 이들과는 사정이 달랐다.
“조금 기분이 좋아 보이십니다.”
“그렇게 보이나?”
딱히 위습만의 일은 아니었다. 먼 길을 걸어야 함에도 우리를 따라온 병사들의 얼굴 또한 무척이나 밝았으니까. 이유를 묻지는 않았지만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기분이 좋아 보인다라······맞네. 동료들에게는 정말 미안한 말이지만 잠시나마 테라 방벽을 떠날 수 있다는 사실이 미안할 정도로 기분이 좋군.”
“사람이라면 당연한 반응입니다. 너무 자책하지는 마십시오.”
그들에게 있어, 아니 우리들에게 있어 테라 방벽은 사지였다. 세계 어느 곳보다도 죽음이 곁에 있는 곳. 그런 곳에서 멀어질 수 있다는 데 누가 기뻐하지 않을까. 나 또한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단순히 다녀오기만 하면 되는 그들과 달리 나의 어깨에는 지원을 받아와야 한다는 무게감이 실려 있기에 밖으로 표출되지 않을 뿐이었다.
지크 후작이 친서를 보내는 만큼 황제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지만 스콜피온의 위력이 황제의 성미에 맞지 않는다면 지원을 적게 보내거나, 최악의 경우 보내지 않을 수도 있을 테니까. 동시에 테라 방벽을 떠나기 전 일드가 내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쉽지 않은 길이 될 거다. 테라 방벽으로 마정석을 보낸다고 한다면 마정석을 가지고 있는 이들이 반대할 테니까. 특히나 마탑의 사람들은 무슨 트집을 잡아 반대를 할지 모른다. 철저히 준비하고 남의 말에 흔들리지 마라.]
맞는 말이었다. 테라 방벽을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은 스콜피온의 필요성을 실감하지 못한다. 지금까지 잘 막아왔는데 왜 그런 돈 잡아먹는 괴물을 배치해야 하냐고 하겠지. 그 동안 수많은 이들의 희생은 나 몰라라 하고서. 그런 놈들의 낭패한 얼굴을 보기 위해서라도 꼭 지원을 받아가야만 했다.
그렇게 수도에서의 일을 상상하며 발을 재촉하다보니 수도의 높은 성벽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약 일 년 전, 수도에서 테라 방벽으로 갈 때 걸린 시간과 비교하면 짧은 시간의 여정이었다.
“정기 장계가 아닌 때에 장계를 올리시다니, 테라 방벽에서 무슨 일이라도 일어난 건가?”
무사히 성문을 통과해 황궁으로 향하여 지크 후작의 친서 겉면에 찍혀있는 지크 후작의 증표를 보여주자 우리는 황궁 한 쪽으로 안내를 받았다.
거기서 등장한 윈체스터 백작이라는 사람은 친서를 받고서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적색경보로 인해 큰 피해를 입었다는 말을 전해주자 고개를 끄덕이며 잠시 기다리라는 말과 함께 방을 나선 윈체스터 백작은 잠시 후 되돌아와 따라오라는 말을 남긴 채, 앞장서서 걸었다.
“황제 폐하께 말을 올려주게. 황제 폐하의 명을 받아 테라 방벽의 전령과 함께 돌아왔다고.”
“잠시만 기다려주십시오.”
잠시 뒤, 돌아온 기사.
“황제 폐하께서 두 분 모두 들어오라 하셨습니다.”
“고맙네.”
끼익-
그렇게 나는 난생처음 이 제국의 지존. 그 누구보다도 높은 자리에 앉아있는 황제를 맞닥뜨리게 되었다.
“네가 레닐이라는 녀석이구나. 공에는 상이 필요하다는 네 말, 잘 들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3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