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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22화 (22/123)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2화 - >

꿀꺽-

옆 사람의 침이 목울대를 넘어가는 소리가 선명하게 들려왔다. 분명 몬스터가 땅을 울리며 달려오는 소음덕분에 바로 옆에 있어도 다음 날 목이 부을 만큼 소리치지 않으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들을 수조차 없는데 어떻게 이와 같은 일이 가능할까. 그 소리가 사실은 내가 침을 삼키는 소리라는 걸 깨닫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종합 선물 세트네.”

종합 선물 세트. 그 말이 정말 잘 어울리는 광경이었다. 절대적인 숫자가 아닌 몬스터의 종류만으로도 두 손과 두 발을 전부 동원해도 부족한 숫자의 몬스터들. 땅을 가득 매운 채, 하늘을 가리며 달려오는 그 모습은 나에게 있어 지금껏 유례가 없는 규모라는 것은 확실했다.

“지들끼리나 쳐 싸울 것이지. 뭐 먹을 게 있다고······.”

저들은 서로 다른 종족이다. 우리들은 편의상 몬스터라고 하는 한 단어로 저들을 설명하곤 하지만 돼지, 소, 말 등을 동물이라 부른다하여 같은 종은 아니지 않는가. 게다가 잡식은 있어도 초식은 없는 판에 강자와 약자가 나뉘어져 있으면 서로 잡아먹을 것이지. 왜 인간을 목표로 삼아 서로 연합을 하냐는 말이다. 그것도 평소에는 서로 잘만 잡아먹는 녀석들이.

“무슨 생각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집중해라. 어려운 싸움이 될 거다.”

“왜 먹잇감이 바로 옆에 있는데도 저희를 먹겠다고 달려드는지, 잠깐 고민해봤습니다.”

인간이 맛있나? 식인을 해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답을 내릴 수 없는 문제였다. 그러나 딱히 맛있을 것 같진 않았다. 살이 많이 붙어있는 것도 아니고 육질이 좋을 것 같지도 않았으니.

“몇 가지 가설이 있지만 오늘, 아니 내일일지도 모르겠군. 아무튼 전투가 끝났을 때, 너와 내가 살아있다면 알려주도록 하지. 살아남는다면 말이야.”

“이유를 들으려면 꼭 살아남아야겠군요.”

나와 일드는 잡담을 나누며 긴장감을 풀었다. 나뿐만 아니라 일드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긴장하고 두려움에 빠진 이들에게 다가가 이길 수 있다고, 살아남자고 이야기하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수많은 경험을 한 일드조차도 익숙해질 수 있는 일이 아닌지 긴장을 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어쩌면 자신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 말일지도.

“후. 내일의 태양을 두 눈으로 볼 수 있기를.”

나 또한 전투 직전에 항상 내뱉던 말을 루틴처럼 내뱉고는 그 이상의 잡생각을 그만두었다. 온전히 전투에만 집중해도 어려운 싸움이 될 터, 꽤나 경험을 쌓은 지금조차도 딴 생각을 하며 살아남을 수 있을 정도로 테라 방벽은 만만한 곳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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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헉. 헉.”

예상대로 전투는 평소보다 훨씬 격렬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가장 큰 이유는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높으신 분들 마냥 고생은 밑에 것들이, 이득은 우리들이 먹겠다는 듯 전투를 관망하던 상위종이 거침없이 방벽을 향해 돌진해왔기 때문이었다. 적들이 숫자도 많고 질도 좋고 기세까지 하늘을 찌를 듯 했으니 어려운 전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쿵-

“으아아악!”

그렇다보니 자연스레 놓치는 것들이 많아질 수밖에 없었다. 상위종이 자신의 육중한 몸을 공성추 삼아 방벽을 두드릴 때마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몇 명은 균형을 잃고 방벽너머로 떨어지곤 했다.

평소라면 기사들이, 마법사들이 견제를 했을 텐데 숫자가 숫자이다보니 모두 막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여유를 부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어쩔 수 없는 일이었지만.

땡땡땡땡땡-

몬스터의 공격이 시작된 지 한참이 지났음에도 종소리는 그칠 줄을 몰랐다. 일 년에 많이 울려봤자 한 손가락으로 셀 수 있다고 하는 적색경보. 이번 년도 들어서는 처음 있는 일이었고 내가 온 뒤로 치더라도 두 번째, 그마저도 한 번은 가을 원정으로 빠져있었으니 나로서도 적색경보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종소리가 괜히 울린 것이 아니라는 듯 방벽 위로 올라온 몬스터들을 흔치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방벽 밑의 몬스터를 견제해야 하지만 방벽 위로 올라온 몬스터들에 의해 방해를 받는다. 그러다보니 방벽 밑에 소홀하게 되고 더 많은 숫자의 몬스터가 방벽 위로 올라온다. 악순환의 고리가 계속해서 이어졌다.

‘얼마나 지났지?’

마법사 세 개조가 방벽에 올라온 지 한참이 지나 남아있는 마력은 한줌도 되지 않았다. 방벽 밑을 바라보자 몬스터들의 시체가 작은 언덕을 이루고 있었으나 그게 뭔 대수라는 듯 시체의 언덕을 발판삼아 방벽을 오르려는 몬스터의 숫자가 더 많다는 것은 무척이나 큰 문제였다.

방벽 밑에서 상위종을 상대하고 있는 지크 후작 또한 아무렇지 않아 보였으나 그의 갑옷은 몬스터들의 피로 물들어 원래의 모습은 온데 간데 사라져 찾아볼 수조차 없는 수준이었으니 지크 후작을 따라 방벽 밑에서 고군분투하고 있는 다른 이들은 두말할 필요가 없는 수준이었다.

기름과 함께 화염계 마법이 떨어지며 몬스터를 불태웠고 그 위로 화살들이 쏟아졌다. 몬스터들은 각자의 방식대로 방벽을 기어올랐다. 방벽을 사수하고자 하는 이와 뺏고자 하는 이의 싸움은 끝을 몰랐다.

“아아악! 내, 내 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 한 병사가 개와 비슷한 몬스터에게 팔을 물어뜯기고 있었다. 저대로 놔두면 필시 한 쪽 팔을 잃어버리리라. 허리 오른쪽에 메여있던 총을 꺼내들어 방아쇠를 당겼다.

딸깍, 타당- 탕-

방아쇠 당기는 소리는 그렇다 치더라도 총알이 발사되는 소리가 날 리가 없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환청이 들리는 모양이다. 아무런 저항 없이 날아간 두 발의 총알은 이름 모를 몬스터의 머리를 꿰뚫었다.

4서클에 오르고 단어 단위의 각인을 사용가능하게 되며 나는 대장장이에게 부탁하여 한 자루의 권총을 더 만들어 총 두 자루를 소지하고 있었다.

한 자루는 내가 한 발 한 발 마력을 제물로 총알에 두 글자의 각인을 갈아 넣은, 기존과 똑같이 총알을 총구에 집어넣고 발사하는 방식의 특수탄 전용의 권총.

그리고 지금 한 명의 병사를 구하는 데 쓴 지금의 총이 대장장이에게 부탁하여 새롭게 만든 총이었다. 먼저 설명한 총이 특수탄 전용이니만큼 이 총의 의의는 파괴력이나 각종 특수효과에 있지 않았다.

그저 빠르게 발사하기 위한 총. 그러기 위해 총에 속사(速射)의 각인을, 구조적으로는 방아쇠를 당길 때마다 탄창의 총알이 위로 올라오도록 만드느라 의뢰를 맡긴 대장장이가 어렵다고 불평을 받아주느라 꽤나 고생이었다.

총알은 관(貫-꿸 관)을 새긴 철구가 대신했다. 덕분에 지구의 권총처럼 음속과 비슷한 속도를 내지는 못하지만 관통력 자체는 저런 잡몹의 가죽을 뚫기에는 충분한 위력이었다. 물론 아무런 부가 효과가 없는 탓에 인간 그 이상의 크기를 가진 놈들에게는 효과를 보기 어렵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애초에 그런 놈들을 상대하기 위해 만든 물건이 아니었으니 단점이라고 할 것도 없었다.

또한 조준만 잘한다면 - 반동도 없고 마력의 영향으로 일직선으로 날아가는 만큼 - 저렇게 딱 달라붙어있어 마법으로 처리하기 곤란한 경우에도 수월하게 처리할 수 있었다.

“내려가!”

“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쿵-

부상 입은 병사를 방벽 내부로 내려 보내는 사이 또 하나의 몬스터가 방벽에 몸통박치기를 한 모양이다. 그것도 꽤 가까운 곳에서.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까지 흔들리지는 않을 테니. 아니나 다를까 멀지 않은 곳에서 베히모스가 박치기라도 했는지 거대한 뿔을 방벽으로부터 빼내기 위해 힘쓰고 있는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맞고 뒈져라!’

기껏해야 하루에 한 발 만드는 것이 고작인 특수탄. 4서클 마법사의 모든 마력을 제물로 삼아 탄생한, 게다가 각인의 효율이 일반적인 마법보다 뛰어났기에 위력 자체는 어지간한 6서클 마법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자부했다. 게다가 지금 총구에 들어가 발사만을 기다리고 있는 총알의 각인은 폭뢰(爆雷). 단일 개체에 대한 파괴력만 놓고 보자면 한손가락에 꼽히는 특수탄이었다.

파지지직-

정확히 베히모스의 미간에 박혀든 총알. 그 즉시 베히모스의 몸 표면에 전뢰가 흘렀다. 파직파직거리며 베히모스의 몸을 태우는, 두 눈으로도 볼 수 있을 정도의 전뢰. 비교적 약한 부위라 할 수 있는 눈, 코, 입 내부에서 연기가 새어나오고 전격이 근육을 태웠지만 그럼에도 베히모스를 죽일 수는 없었다.

사실 이 일격으로 베히모스를 죽일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도 않았다. 베히모스는 단순히 신체능력만으로도 대적할 몬스터가 거의 없음과 동시에 뿔로부터 떨어지는 낙뢰 또한 어지간한 몬스터는 단번에 구이로 만들어버릴 정도로 위협적이었다.

솔직히 말해 저 녀석을 일대일로 상대가 가능한 건 테라 방벽에서도 지크 후작밖에는 없으리라. 그렇기에 맞고 뒈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녀석의 몸을 경직시키는 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었다.

치기 좋은 배팅볼을 던져줬다면 그걸 홈런으로 만드는 건 타자의 몫이었으니까. 그리고 테라 방벽의 4번 타자는 눈앞에 치기 좋게 날아오는 배팅볼을 그냥 지켜볼 타자가 아니었다.

강철도 베어 넘기는 기사들의 오러도 가죽으로 받아낸다는 베히모스의 머리와 몸이 칼로 두부 자르듯 분리됐다. 저게 바로 일반적인 기사들의 한계를 뛰어넘은 마스터, 그리고 그들만의 전유물이라 할 수 있는 오러 블레이드겠지.

끄덕-

베히모스의 머리가 땅에 떨어진 것을 확인한 지크 후작이 고개를 들어 방벽 위의 나와 잠시 눈을 마주쳤다.

사람이 손가락보다도 작게 보일 정도의 높이였지만 정확히 눈을 마주쳤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지크 후작은 다시 전투에 돌입했다.

마스터라고 하나 결국은 기사. 한 번의 칼질로 다수를 제거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그가 검을 한 번 더 휘두를수록 죽는 이가 수 명은 줄어드니 전투가 종료되기 전까지 그의 칼이 멈추는 일은 없을 터였다.

나도 짧은 인사를 마지막으로 희생자를 한 명이라도 줄이기 위해 시선을 방벽 위로 돌렸을 때, 순간적으로 눈앞이 깜깜해졌다. 다시 시야가 회복되었을 때, 마력 고갈로 인한 증상이라는 걸 느꼈다. 아무래도 방금 전 폭뢰(爆雷)의 총알을 쏠 때, 총의 각인을 활성화시킨 약간의 마력이 내 마지막 마력이었던 듯싶었다.

“짐 덩어리가 되어버렸군.”

이 상태로 전투를 계속하는 건 무리다. 선배들의 말이 떠올랐다. 마력이 부족하다싶으면 괜한 객기부리지 말고 얌전히 밑으로 내려오라고. 맞는 말이다. 마력이 떨어진 마법사는 일반인과 다른 것이 없었으니. 방벽을 내려가기 위해 마력 고갈의 후유증으로 후들거리는 다리에 애써 힘을 주며 다시 일어서려고 할 때, 이번엔 시력을 잃지도 않았는데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

순간적으로 내 방의 전 주인이 남긴 일기장이 떠올랐다. 그의 동료, 케인이 사이클롭스가 던진 바위에 깔려 죽었다는 내용의 일기. 그리고 지금 내 상황이 케인과 다를 바 없다는 것까지도.

‘죽나?’

수많은 생각들이 주마등처럼 흘러지나갔다. 동시에 살아남고자하는 나의 의지도 해결책을 찾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그러나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방어 마법을 전개할 최소한의 마력도 남아있지 않았으며 주머니에 들어있는 특수탄을 꺼내들 시간이라면 이미 바위는 내 몸을 깔아뭉개고 있으리라.

로브와 옷에 새겨둔 각인이 발동하더라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싶은 크기의 바위였다. 부정적인 생각들이 몸을 잠식할 때, 나와 날아오는 바위 사이로 몸을 던지는 한 사람이 있었다.

텅-

“방심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어떤 미친놈이 마력이 다 떨어질 때까지 방벽 위에 남아있어?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할 최소한의 마력은 남겨뒀어야지. 몬스터가 왜 인간을 잡아먹으려고 힘을 합치는지 듣기 싫어?”

“죄송······합니다.”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주었고 많은 것을 가르쳐줄 사람. 몇 번이나 내 목숨을 구해줬던 이가 다시 한 번 내 목숨을 구해줬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일드님.”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2화 -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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