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1화 - >
“칙사로서 이런 행동은 황제 폐하의 얼굴에 잉크칠을 하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시는 겁니까?”
“불쾌하셨다면 다시 한 번 사죄드리겠습니다. 허나 제 이야기가 들려오는데 그냥 지나칠 수가 있어야지요. 아, 너무 신경 쓰지 마십시오. 두 분의 대화 중에 왜 제 존재가 언급되었는지 알게 되면 제 발로 나갈 테니.”
“그럴 필요 없이 당장 나가주십시오. 저는 마탑주님의 명을 받고 마탑의 의사를 전달하기 위해 드라그닐 자작님과 이야기를 하는 중입니다. 황제 폐하의 칙사라고는 하나, 도브 남작님께서 이 대화를 들을 까닭은 조금도 없습니다.”
에반에게 도브의 말은 절대 용납할 수 없는 말이었다. 드라그닐 자작으로부터 마정석을 테라 방벽으로 보내겠다는 이야기를 듣자마다 옳다구나하며 황제에게로 달려갈 것이 뻔히 보였으니까. 그 어떤 맹수가 자신의 먹이감을 다른 맹수가 훔쳐가려는데 뻔히 보고만 있겠는가. 더군다나 배고픔에 시달리고 있는 맹수가.
“하하.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 어쩔 수가 없군요. 그렇다면 기왕 드라그닐 자작님께 왔으니 제 용건만 말씀드리고 나가도록 하죠.”
그 명백한 적대감을 마주하면서도 도브의 얼굴은 평온하기 짝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감탄한 표정을 지으며 드라그닐 자작을 향해 허리를 숙일 때, 불길함이 에반의 몸을 감쌌고 뒤이어 나온 말에 그 느낌이 결코 헛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자작님의 결단에 황제 폐하를 대신한 칙사로서, 또 제국의 귀족으로서 감사드립니다. 자작님의 결단은 제국의 수많은 백성들의 목숨을 살릴 것입니다”
‘다 들었구나!’
고작해야 몇 마디가 오갔을 뿐이다. 그런데 도브는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행동했다. 그제야 에반은 도브가 처음부터 그를 골려주기 위해 아무것도 듣지 못한 척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자 난감해지는 건 오히려 드라그닐 자작이었다.
‘하루만 늦게 왔다면 좋았을 것을.’
황실과 마탑. 어느 한 쪽의 손을 들어줘야 한다면 단연 황실이다. 마탑의 힘이 강하다고 하나 황실의 힘에 비할 바 아니었으니까.
또한 마탑주의 권위가 높다하나 역시나 황제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황실과 마탑, 둘 중 하나만 고르라 한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황실을 고르는 것이 맞았다.
하지만 현실은 그렇게 이분법적인 계산으로 흘러가는 곳이 아니었으니 드라그닐 자작으로스는 되도록 두 곳 중 어느 한 곳과도 척을 지고 싶지 않았다. 막말로 마탑이 무언가 공작을 벌일 때, 그 모든 것을 황제가 막아주지는 않을 것 아닌가.
하루만 늦게 왔다면 이미 결정된 일인 만큼 최소한 원한을 사는 일은 피할 수 있었을 텐데, 이런 식으로 조롱에 가까운 말을 듣게 된다면 그 피해가 드라그닐 영지에까지 미치지 않으리라는 법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를 어쩐다.’
그러나 에반은 빠르게 두뇌를 회전시켰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상대방의 말에 흥분하여 감정적으로 대응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젊은 나이에 마탑주의 부관이 될 수 있었던 건 뛰어난 재능도 한몫했지만 그 이상으로 뛰어난 지성이 뒷받침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순간 냉정을 유지한 채, 활로를 찾던 에반에게 한 줄기 길이 보였다.
“훌륭한 결정이십니다. 자작님의 그 결정, 도브 남작의 말대로 제국의 수많은 백성을 살리는 결정이 되리라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 짧은 시간에 무슨 결정을 내렸는지 도브의 말에 찬동하는 듯한 말을 하는 에반을 도브가 의구심 섞인 눈으로 바라봤다. 그가 겪은 마법사란 존재는 이득에 따라 이리 붙고 저리 붙는 박쥐와도 같은 존재였으니 한시도 믿음을 줄 수가 없었다.
“허나 무례가 되지 않는다면 테라 방벽으로 몇 할을 보내실지 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만일 전부를 보내지 않는다면 남는 양은 마탑에서 구매하고 싶습니다.”
드라그닐 자작은 단 한 번도 전량을 보낸다는 말은 한 적이 없었다. 그 때서야 도브도 아차하며 뭔가 말을 꺼내려 했지만 에반의 시선은 드라그닐 자작에게만 고정되어 있을 뿐이었다. 도브가 뭐라고 하던 간에 최종 결정은 드라그닐 자작이 하는 것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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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테라 방벽으로 6, 마탑에 4를 보내는 것으로 난감함을 해소할 수 있었던 드라그닐 자작이 자신의 방에서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그 동안의 한숨들이 걱정과 우려의 한숨이었다면 지금 내뱉는 한숨은 안도의 한숨이라는 것이 달랐지만.
그가 생각하기에 지금의 결정은 그가 내릴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이었다. 한 곳에만 선을 댄다면 다른 쪽을 통해 수작이 들어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둘 모두에게 선을 이어놓는다면 어느 쪽이든 함부로 버리지 못할 터, 만약 영지를 노리는 세력이 한 쪽에 더 많은 양을 받치겠다고 제안하더라도 다른 한쪽이 방파제가 되어 줄 테니까.
‘괘씸한 녀석.’
그는 일평생 관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단 한 마디의 예고도 없이 거대한 두 고래 사이에 낀 새우가 되어보니 지금까지의 삶이 정말 평화로웠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동시에 이런 폭탄을 아무런 말도 없이 처리하라고 넘겨준 레닐이 괘씸하기 짝이 없었지만 동시에 무척이나 기특했다. 언제나 철없고 어리게만 보였던 둘째 아들이 황제가 인정할 정도의 공적을 쌓아 선물을 보낸 격이었으니까. 선물이 조금 부담스러워서 그렇지.
“몸 성히 돌아오는 건 바라지도 않는다. 제발 살아만 돌아오거라.”
그라고 하여 왜 레닐을 사지나 다름없는 곳으로 보내고 싶었겠는가. 깨물어서 안 아픈 손가락 없는 것처럼 자식들 모두에게 비슷한 애정을 주었다고 자신했다. 그러나 그 당시에는 레닐이 가는 것만이 최선의 선택이었을 뿐이었다. 한동안 그의 시선이 벽에 붙어있는 가족의 초상화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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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로 이 곳이라고?”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허공을 손가락질하는 마법사를 향해 내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믿지 못하겠다는 듯 다시 한 번 허공과 나를 번갈아 쳐다봤지만 그가 원하는 대답이 나의 입으로부터 나올 일은 조금의 가능성조차도 없었다.
“이건 말도 안 돼! 이런 곳에서 어떻게 몬스터를 막겠다는 거야!”
큰 소리로 반발하는 이들에게 검지를 입에 가져다대어 쉿하라는 제스처를 취했다. 그들의 말대로 큰 소리에 몬스터들이 밀려오면 맨 몸으로 상대해야 할 판이었으니, 내 제스처를 보고 다시 한 번 이 곳이 테라 방벽 바깥임을 깨달은 그들도 제각각의 반응들을 보였다. 그러나 공통적인 반응이라면 소리를 낮추면 낮췄지, 높이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
“마정석이 귀중한 건 맞아. 하지만 목숨만큼 귀중하진 않다고!”
“하지만 윗분들에게는 마정석이 더 귀한 것 같네요. 게다가 일정 궤도에만 오른다면 목숨값은 충분히 해줄 거예요.”
“제기랄. 너는 어쩌다가 마정석 광산을 발견해가지고······.”
“아니, 분명 여기 오시기 전까지만 하더라도 선배들도 좋아하셨잖아요.”
“그거야 이렇게까지 허허벌판일 줄은 몰랐으니까!”
시연회가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당장 실전에서 사용하기까지는 아직도 먼 길이 남아있었다. 보다 완벽함을 추구하는 마법사들이었기에 실전 테스트를 통해 보완할 점을 찾아냈고 특히나 개량한 발리스타는 더더욱 관심이 집중되었다.
테라 방벽의 골칫거리였던 상위종에게 먼 거리에서도 치명상을 입힐 수 있는 수단이었으니, 개량만 순조롭게 된다면 가을 원정을 나가지 않아도 되리라는 기대를 하기에 충분했으니까.
그렇게 머리를 맞대고 있을 때, 위로부터 명령이 떨어졌다. 광산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고 방어를 위한 계획을 수립하라는 명령이. 그 와중 최초 발견자임과 동시에 지도(地圖)의 유일한 사용자인 내가 빠진다는 것은 말이 안 되는 일이었기에 일 년에 두 번 나가면 많이 나간다는 테라 방벽의 성문을 또 다시 나서게 되었을 뿐이었다..
“천혜의 요새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이 정도로 평야일 줄이야. 작은 언덕이라도 있기를 바랐는데.”
“없으면 만들면 되죠. 범인들이 수백, 수천 명이 모여도 할 수 없는 일을 할 수 있기에······.”
“알아. 그게 바로 우리가 마법사라고 불리는 이유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테라 방벽과 거리라도 가깝다면 연계를 시도해 볼 수 있겠고 자그마한 언덕이라도 있으며 미끼라도 만들어 볼 텐데, 너무 평야잖아.”
“당장 만들라는 건 아니니까요.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으니, 일단 시작부터 해보죠.”
간신히 의욕을 불어넣고서는 지도를 쓱 훑어봤다. 안타깝게도 고저차를 표현할 수는 없어 광산 예정지가 얼마나 넓은지는 알 수 있어도 얼마나 깊은 지까지는 파악이 불가능했다.
그럼에도 예전에 마정석을 팠던 경험이 있으니 그렇게까지 깊게 파고들 필요는 없다는 것은 불행 중 다행이었다.
만약 노천 광산이 아닌 갱도형 광산이 예상되었다면 몇 배, 몇 십 배에 달하는 인적, 물적 자원의 소모를 각오해야 할 테고 개발에 회의적인 시선이 더욱 많아질 테니까.
몇 백 미터 지하에서 몬스터들이 달려드는 충격으로 인해 갱도가 무너진다면? 상상만으로도 끔찍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넓다 넓어. 이걸 전부 커버 쳐야 한다고?”
마력 반응이 잡히는 곳만 하더라도 몇 백 미터였으며 마정석의 밀도가 낮아져 마력 반응이 잡히지 않는 것까지 감안한다면 더 넓어지리라. 물론 윗분들이 결정할 일이겠지만 이 넓은 지역을 벽으로 둘러싸 방어한다? 내 생각엔 영 아니올시다였다.
그렇게 해가 저물어갈 기미가 보일 때까지 현장 조사에 몰두하던 우리들은 서둘러 테라 방벽으로 귀환했다. 밤의 몬스터는 더 흉포하고 위험했으니까.
“저거, 설계 잘못하면 개발로 얻은 이득이 광산을 보호하기 위해 전부 쓰일지도 모르겠는데.”
“예상은 했지만 쉽지 않겠네요.”
“보고나 하자. 우리가 이러쿵저러쿵해봤자 위에서 명령이 떨어지면 따라야하는 건 똑같은데, 알아서 잘 결정하시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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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부터 우리들에게 마정석의 활용과 더불어 한 가지 임무가 더 주어졌다. 어떤 식으로 방어를 해야 효율적일지, 개발이 시작되지 않으면 마정석이고 뭐고 아무것도 없으니 제일 급한 사안이기도 했다.
“몬스터들이 올라올 엄두를 못 내도록 높은 벽을 세우는 건 어떨까요?”
“얼마나 높게 만들려고? 게다가 몬스터가 몸으로 밀고 들어올 수도 있으니 두께도 상당해야 할 테고, 날아다니는 놈들은?”
“그렇게 생각하면 끝도 없죠. 피해가 아예 없을 순 없는 거 아닙니까.”
“더군다나 단번에 만들 순 없을 테니 상당한 시간이 소모될 텐데 그 사이 몬스터들이 무너트리면 다시 처음부터 만들자고? 레닐의 말에 의하면 중심지만 하더라도 직경 1km는 될 거라는데, 우리들만으론 무리야. 차라리 작은 성을 여러 개 세워서 몬스터들이 몰려올 때만 그 안에서 버티는 건······.”
그러나 좀처럼 결론은 나지 않았다. 그러나 딱 하나, 모두가 수긍하는 것이 있다면 테라 방벽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 중앙에서의 지원 규모에 따라 방법도 달라질 것이라는 점이었다.
땡땡땡땡땡-
“황색?”
“황색이네. 뭐해! 빨리들 안 올라가고.”
“제발 하나만 하게 해줘. 사람은 점점 줄어드는데 할 건 점점 많아지잖아!”
“조금만 참아. 몇 개월만 있으면 보충병들이 올 테니까.”
물론 그러는 와중에도 테라 방벽은 조용하지 않았다. 어느 때와 같이 비상을 알리는 종이 울렸고 모두들 투덜거리면서도 방벽에 오르기 위해 서둘렀다. 그러나 그 날의 공격은 어느 때와는 달랐다. 저 멀리서부터 솟아오르는 먼지구름부터가 심상치 않았지만 지도(地圖)를 통해 파악한 마력 반응 또한 지금까지와는 궤를 달리했다.
땡땡땡땡땡-!
“어쩐지 잠이 깼을 때 기분이 상쾌하더라니······. 긴장 빡세게 해라. 황색으로 끝날 것 같지는 않으니까.”
오늘따라 유난히 경보를 알리는 종소리가 훨씬 빠르게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1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