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0화 - >
경천동지할만한 위력은 아니었다. 범위는 기껏해야 반경 2-3m. 화력 또한 범위에 비하면 강력했으나 숙련된 4서클의 마법사라면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는 화력. 그러나 이 수류탄의 진정한 위력은 그런 데 있지 않았다.
“하루에 얼마나 생산이 가능한가?”
“마정석이 준비만 된다면 개인당 최대 두 개씩은 만들 수 있을 겁니다. 다만 몬스터에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2개조는 항상 만전의 상태로 대기해야 하니 서른 개가 약간 안 될 것 같습니다.”
“흐음.”
미리 제작을 통해 여유분을 만들어놓을 수 있다는 것. 조금 더 늘어날 수도, 조금 더 줄어들 수도 있다. 최종 결과물이 아닌 시제품이니까. 게다가 마정석의 크기 또한 제각각이다. 철, 금, 은과 같은 광물들과 같이 녹인 다음 일정한 모양으로 만드는 것이 불가능한 만큼 각각이 품고 있는 마력량도 달라 마법사의 세심한 조율이 필요한 덕분에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나쁘지 않군.”
“반경 3m를 휩쓰는 화염이니 한 번에 수십여 마리는 행동불능으로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일드가 마법사들을 대표해 지크 후작에게 브리핑을 마치고 있을 때, 이제는 쓸모가 없어진 허수아비들이 재빠르게 치워지고 이번 시연회의 진짜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보여줄 것이 더 남아있나?”
“예. 레닐이 후작 각하께 따로 명을 받은 만큼 무언가 보여드려야 한다며 저희들에게 조언을 구하며 개량한 무기입니다. 저희들이 보기에도 괜찮은 제안이었으니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드르륵- 드르륵-
짐말이 이끄는 거대한 수레에 실려 시연장으로 들어오는 한 대의 발리스타. 이미 오래 전, 트레뷰셋에 밀려 한 물 간 공성병기였지만 테라 방벽에서만큼은 트레뷰셋보다도 더 유용하게 쓰이고 있었다.
우선 끊임없이 움직이는 몬스터를 조준하기에 트레뷰셋은 너무 느렸다. 더군다나 몬스터들의 두꺼운 가죽은 타격에 강한 저항력을 가져다주었기에 어지간한 바위로는 잠시 움직임을 멈추게 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죽이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고 봐도 좋았다.
사정거리는 짧더라도 조준이 비교적 편리하고 날카로운 쇠붙이를 멀리까지 쏘아낼 수 있는 데다가 방벽 위에 설치할 수 있는 발리스타가 중용된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아까 전과는 달리 대형 몬스터를 겨냥한 무기로군.”
“그렇습니다.”
흥미진진한 눈으로 나와 발리스타를 바라보는 눈빛이 느껴졌다. 과연 얼마만큼의 위력을 보여줄지, 어떤 임팩트를 보여줄 지까지, 단순하게 보였던 주먹보다 약간 작은 천 더미가 그런 멋진 광경을 보여주었으니 다들 기대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준비 끝났습니다!”
이 발리스타를 제작하기 위해 한동안 정말 바빴다. 일드의 말처럼 뛰어난 마법사들을 찾아다니며 조언을 구했으며 그만큼 많은 실패를 겪기도 했다.
지금도 내 방에는 미처 치우지 못한 연구의 잔재들이 방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었으니 그 와중에 소모된 마정석의 양도 결코 적은 양은 아니었다.
대다수의 마법사들이 만들어볼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면 아무리 내가 지크 후작에게 필요하다면 개인적인 연구 - 테라 방벽의 방위에 도움이 된다는 조건이 붙었지만 - 에 마정석을 사용해도 된다는 말을 들었다 하더라도 그만큼의 마정석을 가져다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딸깍- 끼릭끼릭-
수많은 시행착오가 따랐다. 처음에는 발리스타 본체뿐만 아니라 쏘아 보내는 목창에도 마법을 부여하려 했었다.
하지만 몇 번 실패하고서는 목창은 포기했다. 빠른 속도로 날아가는 만큼 마정석이 충격을 받기 너무 쉬웠다.
수류탄과 마찬가지로 종이 혹은 가죽으로 감싸보려고도 했지만 발사될 때의 충격량은 그렇게 만만하지가 않았다. 그렇다고 본체인 발리스타가 아닌 소모품인 목창에 각인을 새겨 넣기에는 도저히 소모량을 따라갈 수 없었고. 그렇기에 미련조차 남기지 않고 포기했다.
그렇기에 발리스타 본체에 매달렸다. 땅에 고정되어 있는 만큼 충격을 받아내기도 쉬어 마정석을 활용하기도 편했으며 부셔지지 않는 한, 몇 발이고 쏘아 보낼 수 있었기에 각인을 활용하더라도 충분한 숫자를 확보할 수 있었다. 다만 문제는 각인과 마법을 조화시키는 일이었다.
활용법도 전혀 다르고 체계도 다르다. 그러나 공통점이라 한다면 마력을 기반으로 한다는 점. 한 그릇에 담긴 두 음식이 서로의 맛에 영향을 주지 않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자장면과 짬뽕을 한 그릇에 먹기 위해 짬짜면이 탄생한 것처럼 시간과 노력 끝에 넘지 못할 장애물은 없었다.
사출(射出), 그리고 번개의 힘이 담겨있는 마법진이 제각각 자신들의 임무에 충실하니 연구를 진행했던 나조차도 깜짝 놀랄 만큼의 위력이 나왔다.
아까 전에 쓰였던 손가락만한 마정석이 아닌 주먹보다 약간 작은 크기의 마정석이 발리스타의 몸체에 장착되었다. 쉽사리 찾아볼 수 없는 수준의 크기인 만큼 무거운 책임감이 어깨를 짓눌렀다. 그러나 무거울지언정 버겁진 않았다. 이 무거움을 이겨낼 자신감이 있었으니.
파직파직-
“발사.”
“발사!”
목표는 사람 두 명이 두 팔을 활짝 벌려 맞잡아도 남을 것만 같은 거대한 통나무. 거리가 멀지 않으나 혹시 모를 오조준을 대비해 뒤에 두꺼운 돌벽을 이중 삼중으로 세워두었으니 애꿎은 피해자가 생길 일은 없을 것이다.
텅-
경쾌한 발사음. 그와 함께 마력 반응이 느껴지며 발사 자체는 성공적이라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또한 발리스타에 장착된 마정석에도 여전히 마력이 남아있어 최소 몇 번은 더 발사할 수 있으리라 예상되었다. 마지막으로 과정만큼이나 결과물 또한 나의 기대를 실망시키지 않았다.
거대한 목창의 창날은 2m가 넘는 두께의 통나무를 관통하다시피 빠져나왔고 통나무 외부로 전기가 눈에 보일 정도로 파지직거리더니 이내 화염에 휩싸였다.
확실히 저 정도의 관통력이라면 제 아무리 두꺼운 가죽으로 보호받고 있다하더라도 파고들어 전기로 지지기에는 충분하리라. 급소라면 일격에 죽일 수도 있을 테고. 기존의 발리스타로는 반쯤 박히는 것에 비하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다른 이들도 이 정도 모습을 보여줄 줄은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고서야 하나둘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지크 후작 또한 단순히 박수만을 치는 것이 아닌 입가에 진한 미소를 띠고 있는 모습에서 이번 시연회는 충분히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을 한눈에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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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당한 가격에 마정석을 매입하는 것은 물론, 드라그닐 영지에 마탑의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적극적으로 나서 도와드릴 의향이 있습니다. 또한 이번 거래를 두고 주변에서 왈가왈부한다면 저희 측에서 군소리가 나오지 않게 만들어드릴 것을 약속드리겠습니다.”
마탑주의 부관인 에반은 회의의 결론이 난 뒤, 지체 없이 드라그닐 영지로 향했다. 괜히 시간을 끌어서 좋을 것이 없는 일이었으니까.
설마하니 마탑과 대놓고 척을 질 사람은 없겠지만 사람 일은 알 수 없는 법. 특히나 돈에 눈이 먼 상인들이라면 마탑의 눈치를 보고서라도 끼어들 공산이 없잖아 있었다. 그렇기에 고작 자작을 상대로 파격적이라 할 수 있는 조건을 내걸었다.
“제안은 고맙네만······.”
그러나 드라그닐 자작은 이런 제안에도 불구하고 헛웃음을 지으며 부정적인 느낌을 숨기지 못했다. 그 반응에 이미 손을 뻗어온 곳이 있다는 걸 알아챈 에반이 다급히 물었다.
“어디입니까? 혹여나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면 저희가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아시다시피 마탑이 나서서 해결하지 못할 것은 대륙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미 거래를 했다면 협박을 하든 협상을 하든 거래 대상으로부터 물량을 마탑으로 돌리면 될 일이다. 불가피한 사정이 있다면 어지간한 건 마탑의 힘으로 해결해 줄 수 있었다. 그러나 드라그닐 자작의 입에서 나온 말은 에반의 예상 범위를 벗어난 말이었다.
“어찌 황제 폐하의 하사품을 돈을 받고 판매할 수 있겠나. 그런 불충한 짓을 할 수는 없지. 게다가 이미 사용할 곳을 정해둔 만큼 결정을 되돌릴 수는 없네.”
“그렇다면 그 곳이 어디인지만,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만이라도 알려주십시오. 굳이 마정석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면 마탑에서 해결해드리겠습니다.”
“자네도 소식을 듣고 온 모양이니 내 둘째 아들이 테라 방벽에 있는 것은 알고 있을 것이네. 황제 폐하께서 하사하신 마정석도 아들 녀석이 발견한 광산 덕분이지.”
“알고 있고말고요. 스무 살도 안 된 나이에 4서클에 다다른, 미래가 기대되는 인재 아닙니까. 저도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고 있습니다.”
레닐 드라그닐.
왜 그 이름을 모르겠는가. 요새 가장 화제의 인물인데, 거래 대상의 아들이니만큼 칭찬을 아끼지 않으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이 에반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설마?’
그리고 항상 설마는 역시가 되는 법이었다.
“테라 방벽은 무척 위험한 곳이지. 그런 곳에 아들을 보내놓고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것이 무척이나 가슴이 아팠네. 내가 알기로 마정석은 마법사들에게 용도가 무궁무진하다고 하더군. 아들을 위해 지금이라도 해줄 수 있는 것이 있다는 것이 다행일 뿐이지.”
마정석을 테라 방벽으로 보낸다는 것. 황제가 내려준 물건을 다시 황제의 품으로 돌려준다는 뜻이었다. 그렇다면 적어도 테라 방벽으로 보내는 동안은 황제의 관심 또한 끊이지 않을 터. 현상유지를 위해서라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이런 바보 같은!’
원더에게 보고를 받은 결과 이번에 발견한 광산으로부터 채굴될 예상량은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수준이었다.
그 일 할이라 하더라도 이런 소영지의 영주로서는 평생을 가더라도 만져볼 수 없는 돈일 텐데, 그 처분을 이렇게 빠르게 결정하다니. 평소 에반이 알고 있던 탐욕스러운, 아니 평범한 귀족이었다면 몇 주, 몇 달 동안 고민을 거듭해도 내리지 못할 결정이었다. 모든 것이 드라그닐 자작의 우선순위가 평화에 있기 때문이었다.
“혹시 칙사에게 이 결정을 알려주셨습니까?”
아직 늦지 않았다. 당황 속에서도 아직 황제의 칙사가 영지에 머물러있다는 걸 떠올린 에반이 다급히 외쳤다. 칙사가 아직 이 사실을 모른다면 자작을 설득할 시간은 충분했다.
“아직은 알리지 않았지. 쉬운 결정이 아니었으니 말이야.”
“그렇다면 잠시만 제 말을 더 들어······.”
끼익-
“제 이야기가 들려오는 것 같아 무례인 걸 알면서도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무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그 때, 응접실의 문이 열리며 에반이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황제의 칙사인 도브 남작이 들어왔다. 결코 좁지 않은 응접실임에도 답답하게 느껴질 정도로 두 사람으로부터 어색한 긴장감이 끊임없이 뿜어져 나왔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20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