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9화 - >
드라그닐 영지는 무척이나 조용한 영지였다. 영지의 규모 자체도 작았으며 특산물이라던가 관광명소가 있는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자리 잡은 위치가 좋았기에 농사를 짓기에는 괜찮은 땅이었으며 더불어 영주인 드라그닐 남작이 여타 귀족들과 달리 영지민들을 살피는데 열심이었기에 조용히 살아가기에는 나쁘지 않은 영지였다. 그러나 오늘만큼은 그 조용했던 영지가 떠들썩하기 짝이 없었다.
“어, 어디라고?!”
“북쪽입니다!”
한가로이 업무를 처리하던 드라그닐 남작에게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랫동안 영주로서 다양한 일을 처리해온 드라그닐 남작으로서도 지금껏 들어본 적 없었던 다급함이었다. 그러나 병사로부터 상황을 들었을 때, 드라그닐 남작 또한 그 다급함에 몸을 맡겨야만 했다.
‘도대체 왜 이런 곳에 황실의 인사가?!’
황실의 상징, 쌍두독수리의 문양이 새겨진 깃발을 든 채, 성을 향해 달려오는 일단의 무리가 있다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었다. 지금껏 그 문양을 본 적이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수십 여 명의 대규모 인원이 오는 것은 처음이었다.
병사들의 안내를 받으며 저택을 빠져나와 북쪽으로 향한 지 얼마 되지 않아, 그는 쌍두독수리의 문양을 몇 개월 만에 다시금 눈에 담을 수 있었다.
“헉. 헉.”
귀족이라는 신분에 맞지 않게 전력을 다한 뜀박질을 했더니 숨이 차오르는 것이 당연하다. 더욱이 드라그닐 남작의 몸은 슬슬 노년의 나이를 향해 달려가는 몸. 재능이 없었던 탓에 두 아들과는 다르게 마력과 수련에는 담을 쌓은 몸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이그닐 드라그닐 남작님 되십니까?”
“그, 그렇습니다. 도대체 황실의 인사께서 무슨 일로 이 작은 영지까지 오셨습니까?”
“드라그닐 남작은 황제 폐하의 명을 받으시오!”
드라그닐 남작은 이어진 칙사의 말에 어안이 벙벙했다. 황제의 명을 받으라니, 칙사가 직접 황제의 칙서를 읽는 경험은 그로서도 단 한 번뿐이었다. 그의 아버지인 선대 드라그닐 남작이 죽은 이후, 작위를 계승함을 인정하는 칙서가 내려왔을 때, 그렇다는 건 그에 준하는 일이 벌어졌다는 말이었다.
털썩-
“황제 폐하의 명을 받듭니다!”
“지금 이 순간부터 드라그닐 남작을 자작위로 승작한다. 또한 이십 년 간 광산의 채굴량의 일 할을 하사하니 영원토록 충성을 다 받칠 수 있도록 하라.”
어안이 벙벙한 상황에서도 수십 년을 귀족으로서 살아온 드라그닐 남작의 신체는 본인도 모르는 사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나 이어지는 칙사의 말은 안 그래도 혼란스러운 그의 이성을 헤집어놓기 충분했다.
‘도대체 뭐가 어떻게 된······.’
고작해야 몇십 분이다. 그런데 그 몇십 분 동안 근 일 년 간 놀란 것보다 더 많이 놀랐다. 그러나 그는 그 문제에 대한 대답을 구하는 것보다 더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을 칙사의 헛기침을 통해 깨달았다.
“충성을 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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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을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입니다. 자작님.”
남작이라는 칭호로 불린 것이 수십 년, 자작이라는 그 칭호가 그토록 어색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것보다 황제의 칙사로부터 들려올 이야기가 더욱 궁금했다.
“아드님께서 정말 큰 공을 세웠습니다.”
아들이라는 소리에 순간적으로 옆을 돌아본 드라그닐 자작. 그의 시선에 그와 똑같이 어안이 벙벙한 큰아들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매일을 저택에서 수련과 함께 차기 영주로서 업무를 돕거나 성 내를 돌아다니며 순찰을 도는 큰아들, 보리스가 큰 공을 세울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럴 능력도 안 되거니와 설사 공을 세웠다하더라도 승작을 이뤄낼 정도였다면 그가 모를 수가 없었을 테니.
‘그렇다면······.’
드라그닐 자작에게 아들은 한 명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의 형을 대신해 저 멀리 위험한 북부에서 목숨을 건 전투를 벌이고 있을 작은아들의 존재가 있었으니까.
“도대체 제 둘째 아들이 무슨 일을 저지른 겁니까?”
잠시 후, 모든 상황을 들은 드라그닐 자작이 작게 한숨을 쉬었다. 좋은 소식과 나쁜 소식을 동시에 가져온 칙사는 휴식을 위해 손님방으로 모셨고 응접실에는 그와 그의 아들, 보리스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표정이 좋지 않으십니다.”
“아들아.”
“좋은 소식이 아닙니까. 레닐이 살아있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큰 공까지 세워 가문의 영광을 드높였는데, 어찌 한숨만 내쉬십니까?”
“······좋은 소식이지. 낯선 곳에서 적응하는 것만으로도 힘들었을 텐데 이런 선물까지 보내다니, 네 말대로 가문의 영광을 드높인 일이다. 단지 그 선물을 우리가 감당하기 어렵지 않을까, 걱정이 앞서는구나.”
칙사로부터 어찌된 사정인지를 들었을 때부터 드라그닐 자작의 머릿속에는 위기를 알리는 경종이 울렸었다.
아무리 중앙과 멀리 떨어진 드라그닐 영지라 하더라도 그 또한 영지를 가진 귀족이었다. 마정석이 얼마나 가치 있는 물건인지 그가 모를 리 없었다. 아마 레닐이 발견했다는 광산의 규모가 작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니 황제가 승작은 물론이거니와 일 할의 채굴량까지 약속했겠지.
드라그닐 영지는 오랜 세월동안 전쟁을 겪지 않았다. 그 이유가 주변에서 침범할 생각을 하지 못할 정도로 강한 군사력을 보유한 것이 아닌 그럴만한 가치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드라그닐 자작은 잘 알고 있었고 레닐의 선물이 평화로운 영지를 망가트리는 분란의 씨앗이 되지 않을까, 그것을 걱정하고 있었다.
“그렇게 걱정이 되신다면 레닐에게 보내시는 것은 어떻습니까?”
“레닐에게?”
“예. 아버지께서는 주변에서 마정석을 탐내 분쟁을 일으키는 것을 우려하시는 것이 아닙니까. 어차피 저희가 가지고 있어봤자 마정석을 제대로 활용할 수 있는 사람도 없고 창고 한 구석에서 썩어갈 바에는 레닐이 있는 동안만이라도 테라 방벽으로 보내는 편이 좋을 것 같습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다시 한 번 만족하실 테고 그 사실이 알려진다면 주변에서도 욕심을 부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쁘지 않구나.”
드라그닐 자작의 생각에도 보리스의 말은 썩 괜찮게 들렸다. 보리스의 말처럼 가지고 있어봤자 창고의 공간만 차지할 뿐이다.
팔려고 해도 황제의 하사품이니 곤란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닐 것이며 괜한 경쟁으로 인해 그가 우려했던 분란을 일으킬 수도 있었다.
그러나 레닐에게 보낸다면? 마정석은 마법사에게 있어 정말 유용한 물건이라고 들었다. 테라 방벽이 안전해진다면 레닐의 생존 확률도 올라가는 것이며 주변 동료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될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그렇게 결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마탑으로부터 일단의 무리가 드라그닐 영지에 도착했다. 공교롭게도 칙사가 수도로 올라가기 전 날의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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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 정말 긴 토론이었지만 대충 의견은 다듬어진 것 같군. 이 곳에 온 지 벌써 7년차지만 자네들이 이렇게 열의가 넘치는 모습은 처음 보는 군 그래.”
“이런 상황에서 잠자코 있을 거라면 마법사라고 불리는 걸 포기해야지요. 조장님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그렇지. 그런 사람이 있다면 마법사라는 칭호를 떼야지. 암.”
마정석의 활용에 대해 많은 의견이 나왔지만 그 중 통과된 의견은 거의 없었다. 다들 한 번쯤은 생각해본 아이디어였지만 그게 실현되지 않은 것에는 이유가 있는 법. 마정석의 숫자로 실현 자체는 가능했지만 효율이라는 이름 앞에 대부분의 의견들은 무릎을 꿇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었다. 결국 결론은 나왔다. 그리고 모두는 깨달을 수밖에 없었다. 간단할수록 효율은 좋은 법이라는 것을.
“자, 그럼 다시 머리를 맞대보자고. 어떻게 해야 더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 말이야. 이렇게 지원을 해주셨는데 우리도 뭔가 결과물을 내놔야 체면이 서지 않겠나?”
아직 광산 개발은 시작조차 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우리가 마정석을 가지고 연구에 몰두할 수 있는 이유는 차후 광산이 활성화되는 시점부터 활용에 나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함. 일드의 말대로 결과물을 내놓지 못하면 다른 이들에게 체면이 서질 않았다. 광산 개발에 따른 위험 증가로부터 생겨난 불만을 잠재우기 위해서라도 더더욱.
나는 처음에 총, 대포와 같은 무기들을 생각했었다. 그러나 곧 그런 것들이 테라 방벽에서는 별로 효율적이지 못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탄을 멀리 쏘아 보내는 것으로 이득을 챙기는 무기들은 테라 방벽에서 쓸모가 없었다. 어차피 몬스터들은 거침없이 성벽을 향해 달려들었고 그에 따라 포(砲)라는 개념이 필요가 없었다. 막말로 포탄의 심지에 불을 붙여 성벽 밑으로 떨어뜨리면 되는 일이었으니.
화약무기도 아닌 마정석을 이용한 무기였으니 그 점은 더욱 부각되었다. 그래서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무기는 수류탄에 더 가까운 무기였다. 마법사들이 미리 만들어놓은 뒤, 던져 충격을 받는 것만으로 폭발을 일으키는.
물론 만드는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았다. 마정석은 매우 민감한 물건이었고 작은 충격에도 마법이 발동되어 사고로 이어지는 경우도 있었다. 생각만큼 파괴력이 나오지 않아 이럴 바에는 다른 용도로 사용하는 것이 낫다는 말이 나오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그럴 듯한 결과물이 나온 것은 순전히 마법사들 모두가 열의를 가지고 임했기 때문이었다.
“결과물이 나왔다고?”
그리고 오늘, 결과물을 모두에게 시연하는 날이었다. 결과물 자체는 겉으로는 볼품이 있다고 보기에는 어려웠다.
손가락만한 마정석을 두꺼운 천 혹은 가죽으로 둘러싸 쥐기 편하게 만든 것뿐이었으니까. 시제품이라는 변명이 함께하더라도 외견상으로는 그다지 대단하지 못한 것이 사실이었다. 실제로 개선할 점이 몇 가지 남아있기도 했고. 그러나 파괴력을 보여주기에는 충분하다고 마법사들 모두가 자신했다.
“어디 한 번 구경해볼까. 부디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시범은 내가 보이기로 했다. 그나마 마법사들 중 신체적인 능력이 평균 이상인 사람은 나밖에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내가 자원한 이유도 있었다.
목표는 멀리 떨어져 앞뒤옆 1m 단위로 땅에 박혀있는, 병사들의 갑옷을 입고 있는 허수아비였다. 사실 던져서 땅에 박히는 수준의 충격으로는 마정석을 활성화하기 어려웠지만 실전에서는 몬스터가 발로 밟는 등 충격 자체는 충분할 것이라는 예상에 마정석을 둘러싼 천의 두께는 보다 두꺼워질 뿐이었다. 원하지 않는 시점에서 폭발하만 한두 명 죽는 걸로는 끝나지 않을 테니까.
그리고 혹시나 불발될 것에 대비해 파(破-깨트릴 파)를 새겨두었으니 뻘쭘해질 상황은 일어나지 않는다고 봐도 좋았다.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지크 후작부터 각 기사단의 단장들, 원더와 마법조장들을 향해 허리 숙여 인사한 뒤 손에 쥔 수류탄을 한 번 바라보았다. 이걸 만들기 위해 수많은 노력이 뒤따랐다. 각인 또한 사용하지 않았다. 내가 평생을 이 곳에 있을 수도 없었으며 나 혼자서는 소모량을 따라잡을 수 없었으니까. 나 혼자서 사용할 무기라면 모를까, 각인을 남발할 수는 없었다.
슉-
수류탄은 포물선을 그리며 허수아비를 향해 날아갔다. 땅에 닿기 직전, 나는 확실함을 위해 새겨둔 각인을 활성화시켰고 동시에 화염폭풍이 몰아쳤다.
내가 알고 있는 수류탄과 달리 오직 폭발로만 적을 죽여야 하는 만큼 범위는 그다지 넓지 않았지만 화력만큼은 일드도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을 만큼 확실했다. 덕분에 중앙의 허수아비를 제외하고도 양옆, 앞뒤로 두 개씩의 허수아비를 집어삼킨 화마는 그 짧은 시간에 허수아비의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게 만들어버렸다.
짝짝짝짝짝짝-
화마가 잦아듦과 동시에 이 모든 작업을 함께한 마법사들로부터 박수소리가 휘몰아쳤다. 동시에 무의식적으로 지크 후작을 향해 고개를 돌린 나의 시선에 느리지만 확실하게 박수를 치고 있는 지크 후작의 모습이 들어왔다.
나쁘지 않은 반응이다. 그러나 진짜 주인공은 아직 무대에 오르지 않은 채, 모두를 깜짝 놀라게 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9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