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7화 - >
질끈-
할 말을 모두 다 한 나는 눈을 감고 처분을 기다렸다. 내 말이 지크 후작을 설득했다면 살 것이오, 설득하지 못 했다면 죽을 것이다. 최소한 몸 성히 이 방을 빠져나갈 수는 없겠지.
꿀꺽.
눈을 감자 목을 살짝 파고든 칼날의 차가움이 더욱 생생하게 느껴졌다. 침을 삼키기 위해 목이 움직일 때마다 칼날이 목을 파고들어 아려왔지만 적어도 칼날은 움직이지 않고 있으니 다행이 아니겠는가.
“건방진 녀석.”
그러나 시간이 지나도 내 머리는 몸과 분리되지 않았다. 검이 공간을 베는 소리가 귀로 들려온 뒤, 살며시 눈을 뜨자 금방이라도 내 목을 벨 듯 했던 검은 어느새 칼집에 들어가 모습을 숨긴 이후였다. 쇠가 말려가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으니 그 동작이 얼마나 깔끔했을 지를 예상할 수 있었다.
“하지만 네 말도 맞다. 가만히 위에서 내려오는 명령만 수행해서는 참된 충신이라 할 수 없지. 참된 충신이라면 주군이 바른 길을 걸으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하는 법.”
살았다. 후. 아주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네. 어느 정도 계산이 섰기에 발을 뻗은 것이지만 지크 후작이 목에 칼을 들이밀었을 때는 진짜 삼도천의 강물이 턱밑까지 올라온 줄 알았다. 더불어 저승사자가 눈앞에 찾아온 줄 알았고, 아니 이 곳은 서양 쪽이니 사신인가? 아무튼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니 넘어가자.
“제 뜻을 알아주셔서 감사합니다.”
목에 난 생채기를 치료하며 생각했다. 만약 지크 후작이 아니었다면 이렇게 정면 돌파를 할 생각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저번부터 그랬지만 지크 후작은 전형적인 기사의 표본과도 같은 존재였기에 이리저리 재는 행동이 오히려 독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았다.
황제에 대한, 제국에 대한 무조건적인 충성심. 다른 이들이었다면 콧방귀를 뀌거나 겉으로나 마지못해 받아들일 이 말들이 지크 후작에게만큼은 최고의 무기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네 놈이 건방진 소리를 내뱉은 것도 사실. 그 동안 있었던 일을 포함해 오늘의 대화까지, 조금의 경감도 없이 기록하여 황제 폐하께 장계를 올리도록 하겠다. 네 녀석의 처분 또한 황제 폐하의 명령에 따를 것이다.”
“그, 그건······.”
조금 많이 곤란한데요. 물론 현 황제가 폭군이라던가, 망나니는 아니었지만, 도리어 평가가 꽤나 좋은 황제에 속했지만 내가 했던 말을 듣고 어떤 반응을 보일지는 미지수였다. 설마하니 고작해야 스물도 안 된 마법사와의 대화를 장계에 넣을 줄이야. 이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네 녀석의 입에서 나왔으니 마무리 또한 네 녀석이 지어라. 방벽에서 보유중인 마정석을 연구에 사용해도 좋다. 마정석을 이용해 테라 방벽을 효과적으로 방어할 수 있는 수단을 강구하도록. 알겠느냐?”
“······알겠습니다. 믿음에 부응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더 이상은 할 수 있는 게 없다.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하더라도 황제에게 보고가 올라갈 수 있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터, 최선은 황제가 생각 이상으로 호탕한 사람이기를 바라며 내려온 명령을 수행하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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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결과가 나온 것은 아니지만 지금까지 나온 결과만 보자면 모든 것이 성공적이었다. 지크 후작을 설득해 마정석을 대량 확보할 수 있는 길을 만들 수 있는 기회를 얻었으며 지크 후작의 호감 또한 순간적으로 바닥에 떨어졌지만 복구에 성공했다. 또한 지금 당장 마정석을 실험에 사용할 수 있게 된 것 또한 이득이었다.
“현실성이 없어서 묻어둬야만 했던 것들이 몇 개인지······.”
지크 후작에게 끝이 보이지 않는 연쇄를 끊겠다고 큰소리친 지 삼 개월이 흘렀다. 그 사이 마정석을 활용한 방법을 고안해보지 않았을까?
당장 떠오르는 것만도 두 손으로 셀 수 없을 정도다. 다만 현실성의 문제로 방구석에 처박아둬야 했을 뿐. 최상등급의 마정석이 아닌 이상에야 철저한 소모품이다. 수요가 공급을 훨씬 초월하는 소모품이 어떤 대접을 받을지는 뻔한 것이 아닌가.
지뢰, 대포, 총 등등 화력하면 생각나는 무기들을 화약 없이 마법의 힘으로 만들고자 한다면 마정석의 존재가 필수였다. 구조를 알 필요도 없었다. 어차피 기계가 맡고 있는 대부분의 과정을 마력이, 마법이 대신 맡아줄 테니까.
‘아니, 마법이 아니라 각인을 활용하더라도 마정석은 필요불가결이었어.’
각인은 넓은 활용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결코 만능은 아니었다. 도리어 소모품이라는 측면에서는 마정석과 비슷한 면모를 가지고 있었다.
저장된 마력이 떨어지면 쓸모를 다한다는 것. 그렇기에 각인을 연쇄를 끊기 위한 가위로서 사용할 수 없었다.
각인을 새길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었으며 누군가에게 전수하는 것 또한 불가능했다. 결국 나 혼자서 열심히 만들어봤자 물량은 턱없이 부족하며 사용할 수 있는 사람도 마력을 다룰 수 있는 이들로 한정될 수밖에 없었으니까.
하지만 마정석은 다르다. 굳이 내가 아니더라도 마법사라면 마정석에 효과를 부여하는 것이 가능했으며 마력을 다루지 못하더라도 사용할 수 있었다. 마정석의 마력이 다 떨어지면? 일회용이 아닌 이상 마정석을 교체하면 해결될 일이었다.
“오직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야.”
마정석을 활용한 신무기의 개발. 내가 아닌 다른 이들이라면 한세월이 걸릴 것이다. 마정석을 활용하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각인이라는 능력이 없기 때문이 아니었다. 신무기에 대한 개념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 개념은 단순히 고민을 한다하여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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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라 방벽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그렇기에 번성을 누릴 수 있는 제국의 중심이자 수도는 오늘도 평화롭기 짝이 없었다. 적어도 제국은 대륙에서 단일 세력으로는 저항할 수 없는 대국이었으며 황제가 권력을 꽉 쥐고 있었기에 제국의 정세 또한 그 어느 때보다 안정적이었다. 그 황제에게 한 건의 장계가 도착했다.
“폐하. 윈체스터 백작이 알현을 청하옵니다.”
“들어오라.”
집무를 보고 있는 황제는 젊지는 않았다. 중년과 노년, 그 사이에 있었으며 마력을 다루는 이들의 평균 수명이 길다 하더라도 결코 젊다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문을 열고 들어오는 윈체스터 백작을 향한 황제의 눈은 미래가 창창한 젊은이들과 비교해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무슨 일인가?”
“테라 방벽의 지크 후작으로부터 장계가 도착했습니다.”
“지크가?”
지크의 장계가 도착했다는 소식에 황제가 눈을 빛냈다.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더라도, 아니 만인지상의 자리에 있기에 함부로 믿음을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지크 후작은 황제가 전적으로 믿음을 주는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였다. 황제 본인이 어릴 때부터 인연을 이어왔으며 어떤 상황에서도 황제에 대한 충성이 우선이었던 지크 후작이었기에 일개 귀족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군사력을 가지는 테라 방벽의 지휘권을 맡길 수 있었다. 그리고 지크 후작은 그 믿음에 보답하여 성실히 테라 방벽을 지켜왔고, 그런 지크 후작으로부터 장계가 도착하였다하니 황제의 관심이 쏠릴 수밖에 없었다.
“여기 있습니다.”
윈체스터 백작의 손으로부터 곱게 접힌 장계가 황제에게 도착한다. 작년의 총 결산을 담은 장계는 이미 오래 전에 도착했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장계는 테라 방벽에 무언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 제국의 제 1 걱정거리라 할 수 있는 테라 방벽이니만큼 황제는 꽤나 서두르며 장계를 읽기 시작했다.
황제의 얼굴은 기쁨에 젖었다가도 무표정으로 변했다가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변하기도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윈체스터 백작은 도대체 지크 후작은 무슨 내용의 장계를 올렸기에 황제의 반응이 저럴까라는 깊은 의문이 생겼지만 차마 황제의 집중을 깰 생각은 하지 못했다.
“크하하핫. 크하하하하!”
마침내 황제가 웃음을 터트렸다. 도대체 무슨 내용이기에 황제가 웃음을 내뱉으며 즐거워하는가. 윈체스터 백작의 흥미가 턱밑까지 치솟았을 때, 그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황제가 장계를 윈체스터 백작에게 건넸다.
한 번 읽어보라는 뜻이었다. 그리고 서둘러 장계를 읽은 윈체스터 백작의 표정도 황제와 마찬가지로 차례대로 놀라움, 무표정으로 바뀌었지만 마지막만큼은 창백한 표정이라는 점이 황제와는 달랐다.
“재밌지 않은가? 고작해야 작위도 없는 마법사 나부랭이가 충에 대해 이야기하다니 말이야.”
“이, 이······! 당장 지크 후작에게 명령을 내려 죄인의 목을 베어야 합니다!”
“아니야. 아니야. 말이야 바른 말이지. 공에 대한 상을 내려주지 않는다면 누가 나를 따를까. 게다가 장래가 유망한 젊은이라지 않은가. 이렇게 죽이기에는 그 능력이 아깝지.”
마정석 광산을 찾아낸 건 큰 공이다. 게다가 그런 말을 한 사연이 무척 뜻 깊지 않은가. 단순히 재물이 아니라 제국의 백성을 살려야 한다. 황제 본인이 아닌 제국에 충성을 바치는 레닐의 말들은 황제가 느끼기에는 괘씸할 만도 하지만 크게 개의치 않았다.
‘내가 곧 제국이고 제국이 곧 나다. 그 능력을 제국을 위해 쓰겠다는데 그 싹을 짓밟을 필요는 없지.’
마정석 광산의 소재지가 공백지라고 한다. 허나 그렇기에 더욱 이득이었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황제라 하나 각지에 영지를 가진 귀족들을 아예 무시할 수는 없는 법, 만약 광산의 소재지가 누군가의 영지였다면 황제가 차지할 수 있는 양은 꽤나 줄어들었으리라.
그러나 제국만이 접해있는 공백지였기에 주변 국가와의 마찰도, 귀족들과 신경전을 할 필요도 없었다. 그리고 황실의 재정은 한층 더 탄탄해질 것이 분명했다.
“채굴된 마정석을 테라 방벽을 위해 내놓지 않는다면 더 이상 광산을 찾아내지 않겠다라······. 한 번 쓰고 버리기에는 아까운 능력이야. 안 그런가?”
“그렇긴 하옵니다만 충성이 불확실한 자를······.”
“어차피 테라 방벽에 뭔가 조치를 취하긴 했어야 했어. 이 녀석의 말대로 언제까지 나의 백성들을 몬스터 따위에게 던져줄 수는 없는 노릇이지.”
황제는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레닐이라는 젊은 마법사를 벌할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상을 줬으면 줬지, 이 자의 말처럼 공을 세운 이에게 왜 벌을 내리겠는가. 말이 조금 건방지기는 하지만 제국에 대한 그 충성은 진실해보였다.
‘최대한 중립을 유지하고 사실만 적어 보내려 한 것 같지만 지크 그 자도 은연중에 꽤나 녀석을 높이 사는 것 같고······.’
공을 부풀리지도, 과를 줄이지도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를 적어 올릴 뿐. 지크 후작의 장계는 항상 그랬다. 그러나 이번 장계만큼은 약간의 사심이 담겨 있었다. 오랫동안 지크와 연을 이어온 황제였기에 남들은 보지 못한 그 사심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지크 후작에게 답을 보내라. 광산의 정확한 규모를 파악하여 보고하라고. 또한 마정석 광산으로부터 나오는 마정석 중 일부를 테라 방벽의 방위를 위해 사용할 수 있도록 약속하겠다. 마지막으로 광산을 발견한 공을 세운 레닐의 가문이······.”
“제국 남서쪽에 위치한 드라그닐 남작가의 차남입니다.”
“흠, 드라그닐 남작의 작위를 자작으로 승작하고 향후 이십 년 간 채굴량의 일 할을 드라그닐 자작에게 하사하겠다.”
“지당한 명령이시옵니다. 지크 후작과 드라그닐 자작에게 한 치의 빠짐도 없이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또한 그 녀석에게는 내가 개인적으로 상을 하나 내리고 싶군. 어디보자, 뭐가 좋을까?”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7화 - >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