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5화 - >
햇볕은 쨍쨍하게 내려쪘고 구름은 언제나 그렇듯 유유자적하게 흘러갔다. 시야를 조금만 내려 보면 소수의 강한 몬스터가 다수의 약한 몬스터를 상대로 만찬을 즐기고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지만 이 곳이 몬스터의 대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일상과도 같은 풍경이었다.
“혹시 모르니 제가 주변을 둘러보고 오겠습니다. 그 사이에 이동했을 지도 모르는 일이니까요.”
“······그렇게 해. 너무 멀리 가지는 말고. 가엔, 너도 같이 다녀와.”
“예.”
그 정도 무리가 이동을 했다면 우리가 눈치 채지 못했을 리가 없다. 안개도 껴있지 않았으며 시야를 방해하는 장애물도 없는 평야에서 최소 5m, 최대 15m의 거구 수백 체가 움직인다면 그것만으로도 시선을 잡아 끌 테니까. 그럼에도 이들이 정찰까지 하려는 것에서 내 말을 믿고자 노력하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가엔과 리트라이가 떠나고 나와 모리토만이 남게 되었을 때, 천천히 말을 몰아 모리토가 나에게 다가와 물었다.
“정말 이 곳에 뭔가가 있긴 있는 거냐? 내가 볼 때는 아무것도 없는 평야다만······. 내 말을 이상하게 듣지는 말고. 네 말을 못 믿겠다는 것이 아니라 네가 가져온 물건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니냐는 말이니까.”
“잠시만,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모리토의 말처럼 지도에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없지는 않다. 글자라는 한계를 넘어 단어의 영역으로 넘어온 것은 최근의 일이며 지도(地圖)를 실전에서 사용해보는 것 또한 처음이었다. 아직까지도 각인의 원리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니 내가 모르는 모종의 이유로 인해 오류가 발생했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왜? 이유 없는 결과는 없는 법. 지금까지 잘만 작동하던 지도가 갑작스럽게 오류를 보인다면 그에 따른 이유가 있어야 하는 법이었다. 정말로 지도에 오류가 난 것이라면 내가 모르는 모종의 이유.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
“똑같은데······.”
혹시나 싶어 지도에 흘러가는 마력 연결을 한 차례 끊었다가 다시 연결했지만 거대한 마력 반응은 여전히 지도의 중앙에서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 단순히 최신화의 문제는 아니라는 뜻. 하지만 하늘을 둘러봐도 땅 위를 둘러봐도 그런 거대한 마력을 가진 존재는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돌아왔습니다.”
고민을 하던 사이 주변 정찰을 떠났던 동료들이 돌아왔다.
“딱히 특별한 점은 없었습니다. 레닐이 무언가 잘못 판단한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어쩔 수 없지. 언제까지 여기서 눈에 보이지 않는 허상을 쫓고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 레닐! 말에 올라타라!”
이 곳은 적진 한 복판이라 할 수 있는 곳. 모리토의 말처럼 나의 심증만을 가지고 오랫동안 한 곳에 있을 수는 없었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임무까지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등자를 밟고 말에 올라타려는 순간, 머릿속에서 한 줄기 벼락이 떨어졌다. 왜 이 간단한 걸 생각하지 못했지?
시(視-볼 시)
바닥에 엎드린 채, 눈을 부릅뜨고 땅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시(視)는 땅의 흙 한 톨 한 톨을 볼 수 있게는 해주었지만 땅 밑에 무엇이 있는 지까지는 보여주지 못했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더 잇아 방법이 없었겠지만 이제는 방법이 있었다.
투시(透視)를 통해 지하를 바라보자 아까 전보다 몇 배의 마력이 빠져나갔다. 그러나 투시라는 단어가 가진 뜻을 반영이라도 하듯 지하의 모습을 훤히 들여다볼 수 있었다.
“갑자기 뭐 하는 거야!”
“레닐!”
“찾았어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지상이 아니었어요. 지상이 아니라 지하였다고요!”
흔들리려던 각인에 대한 신뢰가 다시 한 번 굳어지는 순간이었다.
#
‘이 정도 양의 마정석이 이런 곳에 묻혀 있다니!’
대량의 마력 반응은 지하에 매장되어 있는 마정석이 뿜어내는 마력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무척이나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마정석.
간단하게 말해 마력을 품고 광석이다. 그러나 그 설명만으로도 마정석은 결코 간단하지 않은 물건이 되어버린다.
마력을 품고 있는 광물은 대표적으로 미스릴이 있다. 전설상의 오리하르콘이라던지 아다만티움이라던지, 그런 광물들도 있다지만 어디까지나 전설이고. 아무튼 그런 광물들은 품고 있는 마력이 광물 자체의 특성이 되어버렸기에 용도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마정석은 다르다.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마력을 품고 있기에 사용하고자 하는 용도에 따라 얼마든지 다채로운 활용이 가능했다. 물론 그런 만큼 강도는 돌보다도 약해 유리나 다름없었지만 활용 범위에서만큼은 미스릴보다 더 가치 있는 광물이 마정석이었다.
한 마디로 대박. 마법사들에게는 없어서 못 구하는, 구할 수만 있다면 돈 보따리를 들고 찾아오는 물건이 마정석이다. 그런데 그런 마정석이 무더기로 묻혀 있었다. 제대로 개발만 할 수 있다면 전 대륙이 들썩거리리라.
‘지금까지 왜 발견이······. 그럴 만도 하지.’
마정석은 그 안에 마력을 품고 있지만 바깥으로 마력을 뿜어내지는 않는다. 그저 간직하고 있을 뿐. 그러니 마정석이 얼마만큼 쌓여있건 간에 땅 위를 걸어 다니는 마법사들이 땅 밑의 마정석을 탐지해내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 곳이 어떤 곳인가. 몬스터들이 득실거리는, 인간들에게 있어 금지나 다름없는 몬스터들의 대지가 아니던가.
만약 이 마정석이 마법사들이 우글거리는 마탑의 지하라던가, 최소한 대도시 근처에만 묻혀있었더라도 누군가는 눈치를 챘을지도 모르지만 이런 곳에 묻혀있어서야 누가 알아차릴 수 있었을까. 그런 점에서 지도(地圖)를 활성화한 채 정찰에 나선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정말이지, 여러모로 그 날, 각인을 각성한 것은 천운이었다.
디그. 디그. 디그. 디그.
투시로 확인한 마정석의 양에 흥분한 나는 계속해서 땅을 파고 들어갔지만 결코 투시로 확인한 마정석의 위치까지는 한참이나 남아있었다. 디그라는 마법은 땅 자체를 제거하여 구덩이를 파는 것이 아니라 강한 힘으로 땅을 짓눌러서 구덩이를 만드는 원리였기 때문에 일정 깊이 이상으로는 땅을 파고들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더불어 바위에 막히기도 했고.
“레닐! 빨리 올라와! 몬스터가 온다!”
“쯧. 증거가 있으면 설득이 훨씬 수월할 텐데.”
아직까지 마정석을 탐지하는 기술은 없다. 지금까지 발견된 마정석들은 우연찮게 발견이 되거나 조금이라도 마력이 느껴지는 곳을 파헤쳐가며 찾아낸 것 뿐. 그러니 마정석이 귀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내 말만을 믿고 죽음이 만연한 사지에 인원을 보낼 것인가에 대한 의문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보내겠지. 보낼 수밖에 없겠지. 다른 것도 아니고 무려 마정석이다. 마법의 마 자 밖에 모르는 반쪽짜리가 어딘가에 마정석이 묻혀있다고 해도 진지하게 탐색을 진행하는 곳이 마탑이다. 내가 어리다지만 4서클의 마법사고 마탑에서도 주목하는 천재 마법사였다. 본격적인 개발까지는 무리더라도 탐색까지는 충분히 이끌어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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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뭐라고 한 것이냐? 내가 잘못 들은 것이 아니겠지?”
“마정석이라고 말한 것 같은데, 그게 정말이냐?!”
나로부터 몬스터들의 대지 지하에 마정석 광산이 있는 것 같다는 소식을 들은 원더와 일드, 그리고 보토와 마지마는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은 채 나에게 되물었다.
“예. 깊이가 깊이인데다가 몬스터가 다가오는지라 실물은 보지 못했지만 확실할 겁니다.”
“가져왔어야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져왔어야지!”
“그런데 실물도 못 봤으면서 무슨 수로 거기에 마정석이 있다고 확신하는 거야?”
주먹으로 책상을 칠 정도로 아쉬워하는 원더. 그러나 다른 이들은 내 말의 진위여부부터 판단하고자 했다. 뜬금없이 내가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겠지만 허위보고의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정찰 중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상세히 이야기했다.
“그것 참, 신기한 물건인데······. 한 번 봐도 될까?”
“예. 여길 보시면 이 사각형이 저희가 있는 방입니다. 표시되는 푸른 점이 마력 반응이고 짙고 얕음에 따라 강약을 나타내죠. 그리고 마력을 조금 더 넓게 퍼트리면······.”
지도에 나타나있던 다섯 개의 푸른 점이 점점 작아지더니 이내 더 많은 숫자의 푸른 점이 나타난다. 범위를 넓힘에 따라 각각의 방에서 머물고 있을 마법사들의 존재까지 지도에 표시되고 있었다.
“더 넓게 볼 수도 있고요.”
“오오! 진짜 네가 만든 거야? 대단한 아티팩트인걸. 마음 같아서는 네 바짓가랑이라도 붙잡고 관련 자료를 좀 보여 달라고 사정이라도 하고 싶을 정도야.”
“이거 혹시 더 만들 순 없어? 가을 원정 때 가지고 가면 불필요한 전투도 회피할 수 있고, 전투 도중에 기습도 먼저 알아차릴 수 있으니 엄청 유용할 것 같은데.”
맞다. 이건 정말 유용한 물건이다. 실전 테스트도 한 번 거쳤으며 일단 뿌리기만 한다면 실전 테스트를 해줄 사람들은 이 곳에 널리고 널렸다. 만들기도 어렵지 않았다. 일단 각인만 새겨놓으면 다른 이들도 마력을 부여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사용이 가능했으니까. 물론 새겨진 각인을 확인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문제는 이 지도(地圖)의 작동 방식이 조금 복잡하다는 것에 있었다. 단순히 마력을 불어넣는 것만으로는 자신을 중심으로 시선이 닿는 주변의 지형만을 보여줄 뿐, 진짜 가치를 보여주기 위해서는 탐(探) 혹은 색(索-찾을 색)과 연계하여 사용해야만 했다.
“죄송해요. 어쩌다가 만들긴 했는데 제 마력에만 반응하는 탓에······. 연구를 계속하고 있으니 이번 가을 원정 때만큼은 모두가 사용할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요.”
“으음······. 네 연구에 동참시켜달라고 하고 싶지만 개인의 연구 성과니 어쩔 수 없지.”
“필요한 게 있으면 얼마든지 말하거라. 가능한 선에서라면 지원을 해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지도를 향해 탐욕서린 눈빛을 보내는 이들로부터 지도를 지켜낸 나는 서둘러 주머니 한 쪽에 지도를 보관하고서 화제를 다시금 마정석으로 옮겼다. 지금 중요한 건 지도가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정찰 도중 엄청난 마력 반응을 확인한 뒤, 그 곳으로 찾아갔습니다. 아무것도 없는 널찍한 평야였는데 문득 땅 밑으로부터 보다 짙은 마력의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아시다시피 마정석은 거의 마력을 뿜어내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그 정도라면 필시 엄청난 양의 마정석이 매장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마정석이 아닐 수도 있잖아?”
“말씀하신대로 마정석이 아닐 수도 있겠지만 확인을 해 볼 이유는 충분하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묻혀있는 마력의 정체가 마정석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들은 아니다. 하지만 확인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마정석이라면 응당 확인을 해야 하고 마정석이 아니라면 더더욱 확인을 해야 한다. 그만한 마력 결정체가 지하에 묻혀있다면 정체가 무엇인지 궁금하지 않은가. 끝없는 호기심과 탐구. 그것이야말로 마법사의 본질이니까.
“각하께는 내가 말씀드리도록 하지. 레닐의 말대로 확인을 할 이유는 충분한 듯하니, 게다가 본격적인 개발은 아니더라도 확인뿐이라면 소수만 가더라도 충분하지 않겠는가. 내가 직접 가도록 하지. 레닐!”
“예. 장로님.”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도록 대기할 수 있도록. 정확한 위치를 아는 것은 자네뿐이니까 말이야.”
“그렇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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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정은 순식간이었다. 지크 후작은 기사임과 동시에 한 명의 귀족이었다. 마정석에 대한 가치를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렇게 다음 날, 날이 밝자마자 나와 원더 거기에 기사단 단장까지 포함된 열 명의 일행은 말을 타고 빠른 속도로 목표 지점을 향해 달려 나갔다.
“이 곳이더냐?”
“그렇습니다.”
내 입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순식간에 가라앉는 대지. 6서클 마법사라는 경지를 딱지치기로 딴 것이 아니라는 듯 나와는 수준이 다른 위력이었다. 그러나 결국 디그라는 마법의 한계는 어쩔 수 없었고 그 때부터는 기사들이 나서기 시작했다.
파악- 파악-
곡괭이와 삽에 마력이 휘감긴 상태에서 땅을 파자 단단한 대지라는 것이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속도로 땅이 파헤쳐졌다. 그렇게 퍼 올린 흙은 나와 원더가 미리 옆으로 밀어놓은 공간에 옮겨졌고 사람 몇 명이 누워도 거뜬할 크기의 구덩이가 위를 바라보았을 때, 자그마한 원처럼 보일 정도가 되서야 내가 외쳤다.
“멈추세요!”
투시(透視)로 확인한 결과 조금만 더 파고들면 마정석이 그 모습을 보이리라. 마력이 휘감긴 무기조차 견뎌낼 수 있는 미스릴과 다르게 마정석은 유리처럼 약하기 짝이 없었다. 이제부터는 과격한 움직임이 아닌 섬세한 손길이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 때부터 유적을 발굴할 때나 등장할 법한 도구들이 등장했다. 못, 붓, 망치 등등 마정석에 자그마한 상처가 나는 순간 품고 있던 마력이 유출되는 만큼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그렇기에 마정석 광산의 개발이 어려운 것이고. 그렇게 조심스럽게 파헤치기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가 기다리던 연두빛 광택이 모습을 드러냈다.
“진짜 마정석이야.”
“이게 그 마정석이라는 겁니까? 듣기로는 미스릴 만큼이나 귀하다던데······.”
“크하하하. 마정석, 마정석이라니! 이 복덩이 같은 놈! 이제부터 네 별명은 복덩이다! 복덩이!”
마정석의 빛에 취해 윈더가 내 등을 팍팍 내리칠 때, 오히려 나는 다른 생각이 머리에 가득했다.
‘이거, 얼마나 받아낼 수 있지?’
< 남작 가문 차남 이야기 - 15화 - > 끝